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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8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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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출판사를 만나다]
그림책공작소 민찬기 소장
명왕성에 가고 싶다

 

 

 

김세나(퍼블리랜서 대표)

 

2023. 10.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긴 시간과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1인 출판은 기획부터 편집, 마케팅, 영업 등 다방면의 업무를 개인이 해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개인 창업으로서는 비교적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1인 출판에 도전하는 움직임이 많아지는 추세다. 1인 출판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그에 대한 궁금증이 많을 터. 〈출판N〉에서는 [작지만 강한 출판사를 만나다]를 통해 1인 출판사가 전하는 가감 없는 그들의 출판 도전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 본고에서 ‘1인 출판사’는 대표 포함 5인 미만의 출판사를 말함.

 

그를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 그때 나는 출판전문지를 만드는 편집자였고, 그는 이제 막 출판사를 창업한 편집자였다. 그는 새로 나온 그림책을 가지고 와서 나와 후배에게 한참을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그림책 한 장 한 장을 펼쳐 들고, 이 장면에서 왜 의성어는 단독으로 뺐는지, 판형과 폰트는 왜 이것으로 선택했는지, 원래 원문 단어는 이러했는데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글은 또 왜 여기에 배치했는지 등…. 초판만 가지고 온 게 아니었다. 초판이 나오기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본 테스트 출력본까지 가지고 와서, 그렇게 두어 시간을 쏟아냈다. 당시 나는 판매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평론가도, 인플루언서도 아닌, 그저 보도자료를 참고하여 짧게 몇 줄 신간을 소개하는 일개 편집자였는데 말이다. 내 소개로 그 책이 한 권이라도 더 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날 그림책 독자를 한 명 더 만들어낸 건 확실했다. 그전까지 그림책은 어린이나 읽는 거라고 생각해왔던 편견을 깨고, 그림책 세상이 이렇게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 처음 깨달았으니까.

 

내가 퇴사하고도 그는 잊지 않고 책이 나올 때마다 연락해왔고, 내가 처음 동네책방을 열었을 땐 누구보다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줬으며, 책방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문을 닫았을 땐 벚꽃 핀 봄날 문득 그 앞을 지나가다 옛 추억이 떠오른다며 책방 시절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내가 언니와 우애 깊은 게 인상적이었다며 『흔한 자매』(조아나 에스트렐라, 민찬기 옮김, 2017)라는 책의 주인공을 내 이름으로 해봤다고 연락해왔는데…. 생각해보니 여기 다 쓰지 못할 정도로 감동받은 순간이 여럿이었다. 특별히 나와 대단한 친분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는 그렇게 책 세계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림책공작소가 직거래를 맺은 동네책방만 100여 군데가 넘고, 심지어 어린이책 분야 최고 권위를 지닌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아시아 부문 ‘최고의 출판사’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바 있다. 이쯤 되니 그의 출판사 운영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찾아갔다. 경이로움을 안고.

 

그림책공작소 민찬기 소장

 

 

그림책 편집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부터 그림책 편집자로 시작했던 건 아니에요. 국문학을 전공하고 운 좋게 취업했는데, 첫 회사는 ‘노벨과개미’라는 학습지 회사였죠. 어린이 교재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책 뒷부분에 나오는 부록, 예를 들면 이솝우화라든지 위인전 인물 단락을 정리해서 한두 컷 그림을 발주하는 작업이 너무 재밌었어요. 마침 강남 교보문고가 생겨 자주 가던 차에 유아 어린이 코너의 그림책에 이끌려 이태 정도 자주 가 봤는데 그때 그림책 편집에 대한 꿈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시절, 유독 좋아하는 책들이 있었어요.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장 마르크 레제르(Jean-Marc Reiser)의 카툰집 『원시인』 같은 책들이죠. 시를 읽을 때마다 짧은 글의 거대한 힘을 느꼈고 카툰, 그래픽 노블에서 보이는 이미지 내러티브는 임팩트가 상당했어요. 글자 하나 없이 4컷, 8컷 그림으로 메시지가 전해지는 게 정말 놀라웠죠. 짧은 글과 이미지가 주는 힘, 그 두 가지가 다 결합된 게 결국 그림책이잖아요. 책을 만들면서 몇 군데 이직하다 보니 결국 내가 소싯적에 가장 흥미를 느꼈던 짧은 글과 이미지가 결합한 매체, 그림책을 20년째 만들고 있더라고요.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가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그렇게 첫 직장인 학습지 회사를 거쳐 그림책에 이끌려 도서출판 마루벌로 옮겼다가, 다시 한솔교육을 거쳐, 2006년 보림에 입사했어요.

 

 

같은 어린이책이어도 단행본은 교재 개발과는 확연히 달랐죠?

 

많이 다르죠. 교재 분야에서 프로젝트성이 있는 책들은 전체를 그려야 하고, 리뉴얼 작업이 많아요. 만약 신상품을 출시한다면, 최소 6개월에서 몇 년 동안 독자의 반응이나 피드백 없이 개발자들끼리 이게 맞네, 저게 맞네 하면서 만드는 거죠. 하지만 단행본은 단기간 집중해 책을 내고, 독자 반응을 보고, 그 에너지로 또 다시 다음 책을 도모하지요. 시장을 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할 수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외국 그림책은 한 달이면 만들 수도 있어요. 지금 수준에서는 한 달을 고민하나 두 달을 고민하나 비슷할 거예요. 어차피 책 만드는 일에 정답이 있을 수 없으니까 집중해서 고민하면 방향과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다만 한 달 동안 준비해서 90% 완성도로 출간하느냐, 두 달 혹은 그 이상 준비해서 91% 완성도를 지향하느냐 같은 가치지향적 차이는 있겠죠.

 

 

보림에서 편집자로 오래 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은 어땠나요? 사실 그림책 출판사 중에서 보림이 가지는 파급력은 엄청나잖아요.

 

보림은 우리나라 그림책의 태동기와 중흥기를 이끌었고, 당시에 진행되었던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으로 우리나라 그림책 발전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그림책 편집을 잘 배우고 익히고 싶은 저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 출판사였어요. 저는 주로 창작 그림책들과 전통문화그림책 “솔거나라” 시리즈를 담당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 말도 못할 다채로운 인쇄 사고와 이제는 희미해진 숱한 갈등을 겪었죠. 그럼에도 6년 넘게 보림에서 책을 만들었던 이유는 그림책을 만드는 게 너무너무 재밌었거든요.

 

게다가 그림책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소명의식으로 40년 넘게 보림을 가꾸신 권종택 사장님, 그림책 편집자로서 롤모델인 최정선 주간님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두 분께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들이 지금껏 ‘그림책 편집자’라는 직업으로서의 삶을 이어온 밑바탕이고, 공작소를 시작한 토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모교 같은 곳이라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모든 이들 역시!

 

 

보림에서 나와서 바로 그림책공작소를 창업하셨나요?

 

아니요. 2012년 보림을 퇴사한 후, 오래 전 근무했던 마루벌에서 편집권과 인사권을 제안해서 잠깐 다시 근무했어요. 주간 내지 총괄팀장 같은 역할이었는데, 일부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나름 결정권이 있었고 그 경험 또한 공작소를 운영하는 데 보탬이 된 거 같아요.

 

그때 마루벌에 가서 제일 먼저 한 게 온라인서점 공급률과 할인율 조정이었어요. 그땐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이었으니 할인율 제한이 없어서 그전까지 너무 낮은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던 거죠. 도서정가제가 없던 시절, 그림책 시장은 정말 어려움이 많았어요. 누가 30% 할인하는 신간을 사겠어요? 박리다매 방식으로 반값이나 깎아주던 베스트셀러만 사지. 그래서 그림책 분야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0위까지는 거의 10여 년 동안 변화가 없었어요. 기본적으로 그림책 독자층은 아이들이니까 매년 신규 집단이잖아요. 실제 구매층인 엄마들도 새로운 집단이고. 당시 엄마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베스트셀러인 데다가 반값에 파는 책만 사는 거죠.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시장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독자가 계속 바뀐다는 게 중요한 지점이네요.

 

주 독자와 구매자가 다른 유일한 층이 유아동 분야 같아요. 그러니까 역으로 아동책을 만드는 편집자, 출판사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이들한테 유익하면서 올바르고 분명한 가치관을 책에 담는 건 기본이고, 30~40대 젊은 엄마나 아빠가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와 물성과 트렌디한 감각까지 반영해야 판매가 원활한 거겠죠. 이렇듯 그림책을 만드는 출판사나 편집자는 책을 만들 때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아 종종 양가감정에 빠지곤 합니다.

 

 

창업하실 때 출판사명을 ‘그림책공작소’로 했단 말이죠. 그런데 보통 출판사명은 분야의 확장성을 위해 이렇게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내지 않잖아요. 처음부터 그림책만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져놓으신 거 같아요.

 

내가 좋아하고 그나마 할 줄 아는 일 그리고 더욱 잘하고 싶은 일이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림책 출판사로 결정했고, 그림책 독자들이 출판사명만 봐도 우리가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을 바로 인지하도록 하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그림책에 대한 내 신념이나 확신이 흔들릴 때 혼자인 나를 붙잡아줄 명분과 각오도 ‘그림책공작소’라는 출판사명에 담았던 셈이죠.

 

 

그림책공작소에서 저자나 콘텐츠를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기성 작가를 탐색합니다. 국내외 막론하고 관심 있는 작가를 오랫동안 예의주시하죠. 또 기존에 관계를 맺었던 외국의 그림책 출판사도 주목합니다. 그렇다고 MBTI 유형 중 ‘INFJ(Introvert/Intuition/Feeling/Judging, 내향/직관/감정/판단)’인 제가 너스레를 떨면서 먼저 연락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그들의 책과 근황을 꾸준히 지켜보며 응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작가들과 텔레파시가 통한 듯 연락이 닿고, 이내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작가와 함께 신나게 책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웃음) 그림책 세상은 좁디좁지만 다행히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따뜻하고 친절해요.

 

 

작가로부터 직접 투고는 받지 않나요?

 

투고 시스템은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안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다양한 루트를 통해 투고가 들어오긴 해요. 창업 초기 2015년쯤 불특정 다수의 투고 메일에 회신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거절하더라도 모든 원고를 다 검토하고 그림책 편집자로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다 해줬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새벽 4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투고에 회신 메일을 쓰고 있는 제 모습에 깊은 허무함을 느꼈고, 이후로는 투고가 들어와도 ‘투고를 받지 않는다’라는 정도로 회신합니다.

 

 

투고를 받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좋은 그림책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에요. 기획, 편집, 디자인, 제작, 마케팅, 관리 등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하는 1인 출판사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시간적, 물리적, 심리적 한계를 거의 매일 느껴요. 결국 유의미한 콘텐츠를 확보해야 하는 기획편집자 입장에서는 성향과 역량이 검증된 기성 작가들과 작업을 도모함으로써 완성도와 생산성을 담보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셈이죠.

 

작가나 출판사를 주목할 때 특별한 지침이나 안목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작가들의 작품을 오래 지켜보면 그들의 가치관, 세계관, 지향점, 역량, 취향을 가늠하게 되는데 실제로 만나보면 놀랄 만큼 일치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저 그림책공작소가 지향하는 가치와 유사성을 생각할 뿐이에요. 외국 출판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한번 작업했던 외국 출판사는 공작소가 지향하는 메시지와 아트워크(artwork)에 다시 부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계속 주시하죠. 저희가 만든 외서 중 ⅓은 에이전시에서 제안한 게 아니라 제가 먼저 책을 찾은 다음 계약을 도모해요. 『여름 안에서』(솔 운두라가, 김서정 옮김, 2018), 『전쟁』(조제 조르즈 레트리아(글), 안드레 레트리아(그림), 엄혜숙 옮김, 2019), 『아무도 지나가지 마!』(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글), 베르나르두 카르발류(그림), 민찬기 옮김, 2016), 『야호! 비다』(린다 애쉬먼(글), 크리스티안 로빈슨(그림), 김잎새 옮김, 2016) 등이 다 그렇게 만든 책들이고요.

 

 

덜 알려진 작가지만 그림책공작소에서 먼저 알아보고 계약해서 한국어판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 받은 책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방법이 따로 있으실까요?

 

『여름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글), 마달레나 마토소(그림), 이상희 옮김, 2016), 『전쟁』 같은 책들이 그랬는데 그저 운이 좋았지요. 이미 유명한 작가의 신간이나 수상작들은 어차피 선인세 경쟁으로 갈 확률이 높으니 불리하고, 다른 출판사가 이미 공들였던 작가의 작품을 공작소가 가지고 오는 것도 상도에 어긋나는 거 같아 꺼리는 편이에요. 결국 부지런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지요. 외서를 검토하는 기준은 ‘한국에 이미 소개된 그림책과 견주었을 때 비교 우위에 있는가?’를 봅니다.

 

예를 들어 ‘여름,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관한 그림책은 많아요. 그런데 여름에 관한 그림책을 다 모아놓고 마치 누군가에게 발표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책과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으면 출간을 결심하고 계약을 도모하죠. ‘메시지 전달 방식은 충분히 효과적이고 남다른가?’, ‘이미지는 신선하고 감각적인가?’, ‘기존에 소개된 것보다 월등한 지점이 있는가?’ 등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거죠.

 

그림책공작소에서 출간된 책들

그림책공작소에서 출간된 책들

 

 

더 나아가 그림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가장 고민하는 것이 있나요?

 

음악, 미술, 영화 등 대부분의 문화 소비가 그렇듯, 우선은 나를 자극하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봐요. 그게 독자와 사회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면 더할 나위 없고요. 초기에는 기성 출판사의 책들과 조금 다른 주제나 표현 그리고 새롭고 특별한 것, 이를테면 글자 없는 책이나, 특수 제작을 선호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남들과 다른 것만으로는 나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투영되어야 나의 색깔을 찾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림책을 선택하고 만들 때 주제나 해석, 독자 면에서 확장성을 고민합니다. 반복해서 읽을 가능성이 있는지, 타인에게 권할 가능성이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요. 확장성이 클수록 스테디셀러가 될 확률이 높아지고, 결국 절판 확률이 적은 부동의 리스트로 이어지니까요.

 

 

국내 그림책과 외국 그림책을 만들 때는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창작 그림책은 작가와 더불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니 기본적으로 성취감이 상당합니다. 게다가 메시지와 아티클 모두 작금의 우리 사회를 대변하고 직시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에요. 하지만 완성도에 따른 작가의 부담이나 시장성에 따른 출판사의 부담은 언제나 가볍지 않은 리스크죠.

 

반면에 외국 그림책은 이미 만들어진 거니까 주제와 형식이 정해져 있고, 편집 디자인에 개입할 여지가 적어 계약만 하면 국내 창작 그림책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공력과 짧은 기간이 소요돼요. 게다가 외국 현지의 독자 반응을 이미 가늠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리스크가 적죠. 외국 그림책을 만들 때 무엇보다 좋은 건, (분명 역사와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상상력을 뛰어넘는 주제, 이미지, 장면 연출, 제본을 보면서 만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과 사고의 확장은 언제고 다시 창작 그림책을 만들 때 투영되기도 해요.

 

 

기획, 편집, 제작, 마케팅, 판매 관리까지 혼자 다 해야 하는 1인 출판사! 너무 힘들 거 같은데 지금까지 1인 출판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림책공작소 정도면 충분히 규모를 좀 더 확장해도 될 텐데 말이죠.

 

아주 깊이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어쩌면 제가 누군가한테 뭔가 맡기는 걸 불안해하는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이어서일 수도 있고, 나름의 자부심과 긍지가 높아서일 수도 있겠네요. 1인 출판사는 상상 이상으로 노동 강도가 세요. 특히 기획, 편집, 제작, 마케팅, 판매 등 성격이 전혀 다른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요. 그럼에도 9년째 혼자 일하는 이유는 그림책공작소가 추구하는 그림책의 결, 유의미한 메시지와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가급적 오래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책을 만드는 데 정답은 없습니다. 제목, 제호, 판형, 종이, 디자인, 커버, 띠지, 후가공, 정가, 마케팅까지! 예를 들어 어떤 책의 정가가 1만 9,000원이면 정답이고 2만 원이 오답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책의 완결성이나 완성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개인차가 심하다는 거예요. 특히 그림책은 내용(글과 그림)을 보기 전에 표지와 판형, 물성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완결성이나 완성도와 직결되니까 더 민감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책 만드는 일은 정답이 없지만 보는 이에 따라 때론 오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안목, 미감, 시각, 감성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있을 리 없으니까 오답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대체로 즐겁고 때로는 너무나 힘들고 외롭지만 여전히 혼자 책을 만드는 것 같아요.

 

 

혼자 꾸려가다 보니 출간 종수를 늘리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출간 목록이 많지 않음에도 꾸준히 출판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도 궁금합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스테디셀러 덕분입니다. 매년 2,000부 이상 판매되는 『나의 엄마』(강경수, 2016),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글), 야마무리 코지(그림), 엄혜숙 옮김, 2015),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김선남, 2021),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코린 로브라 비탈리(글), 마리옹 뒤발(그림), 이하나 옮김, 2021), 『시간이 흐르면』 같은 책들이죠. 앞서 이야기했듯, 그림책은 유아부터 독자 대상이니,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성장배경에 따라 독자층과 구매층은 항상 신규 유입돼요. 그럼에도 몇 년 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덕분에 출판사 운영이 수월한 거죠.

 

『나의 엄마』, 『비에도 지지 않고』,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시간이 흐르면』

『나의 엄마』, 『비에도 지지 않고』,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시간이 흐르면』

 

 

두 번째는 규모가 큰 출판사보다 조금 더 모색하고 모험하는 성향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 제시하면 좋을 만한 주제의 외서를 찾아 빨리 결정한다든가, 제작할 때 BEP(break-even point, 손익분기점) 산출표를 버리고 용지나 수입 잉크를 쓸 수 있는 모험심을 발휘하면, 결국 책이라는 상품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쌓이면 내용과 형식을 공들여 만드는 출판사라는 인식이 독자에게 생겨요. 처음에는 용지대나 인쇄 비용에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큰 브랜딩 자산이 되는 겁니다. 독자의 신뢰를 쌓는 거죠.

 

마지막으로 말할 세 번째 비결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주제와 독자 확장성을 고민하면서 꾸준히 책을 낼 수 있는 건, 다양한 그림책을 (찾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인쇄하고) 소개하는 일이 여전히 너무 즐겁다는 겁니다. 내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독자의 반응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즐거움이 사라지면 결코 할 수가 없거든요.

 

 

10여 년 전 처음 뵈었을 때 소장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무언가에 몰입했을 때 나오는 에너지랄까, 정말 강렬했거든요. 신생 출판사였지만, 그림책공작소는 앞으로 내로라하는 출판사가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책을 만들 때 마치 바둑판 위에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는 돌을 두긴 싫었어요. 그림책 한 장면을 연출하는 글자와 이미지, 색감과 이런 것들이 다 바둑판의 돌이라고 생각하면 이유 없이 두는 돌은 결국에는 죽은 집이 돼서 쓸모가 없어지잖아요. 그림책의 시각적인 모든 요소가 완성도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니,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죠. 의성어 하나를 따로 빼는 것도 스스로 불확실할 때는 외국에 있는 작가한테까지 DM(Direct Message)을 수십 통 보내서 꼭 확인했어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만족해서 떳떳하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죠.

 

 

그래서 2021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아시아 부문 최고의 출판사 최종 후보에 올랐던 거 아닐까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후보에 오르게 된 짐작되는 이유가 있는지요?

 

지금 들어도 거짓말 같네요. (웃음) 후보로 선정됐다고 들었을 때,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올해의 출판사’는 대륙마다 5개 출판사를 후보로 올리는데 우리나라만 수백, 아시아 수천 곳의 그림책 출판사 중 후보로 뽑혔다니!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죠. 미루어 짐작하면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출판사들과의 협업을 통해 쌓아온 나름의 선택과 집중 덕분인 듯해요.

 

그림책공작소는 처음부터 영미권이나 일본의 그림책보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 덜 소개된,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유럽 그림책을 검토했습니다. 네덜란드 출판사 램니스카(lemmiscaat), 포르투갈의 출판사 플라네타 탄제리나(Planeta Tangerina), 파토로지코(Pato Logico)는 자주 안부를 나눌 만큼 여러 번 작업했죠. 또 프랑스의 라그륌(L’agrume)이나 뤼드몽드(Rue de Monde)와도 작업했어요. 자국에서는 내로라하는 그림책 출판사고, 수많은 책들이 다른 언어권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곳들입니다. 그들의 책을 한국에 소개한 덕분에 볼로냐 측에서도 눈여겨본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2021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던 그림책공작소(좌), 포르투갈의 출판사 플라네타 탄제리나의 담당자들과 찍은 사진(우)

2021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던 그림책공작소(좌), 포르투갈의 출판사 플라네타 탄제리나의 담당자들과 찍은 사진(우)

 

 

2016년 파주 어린이책잔치에서 완판했었고, 이후 이번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공식적으로는 처음 참관했습니다. 당시 완판의 비결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그동안 도서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가 혹시 따로 있으신지요?

 

2016년 5월 초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강경수)를 동시 출간했는데요. 그 직후 파주 어린이책잔치가 파주출판단지에서 열렸어요. 당시 그림책공작소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출판지식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해 있었는데, 참가비를 지원해준다기에 입주했던 여러 출판사와 함께 나가게 됐습니다. 그때 출간 종수는 10여 종이었고, 종당 30부씩 400~500부를 가져갔는데 마지막 날 오후에 정말 완판이었어요. 완판하는 비결은 책을 조금 가져가면 됩니다. (웃음)

 

팔 책도 없고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던 저는 천막을 내리고 종이에 ‘완판’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고 행사장을 나섰습니다. ‘그림책공작소’ 간판을 걸고 현장에서 독자를 만나는 첫 번째 자리였으니 무척 고무됐었고, 마침 책도 다 팔렸으니 너무 감사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책 위에 올려놓는 등, 책을 함부로 대하는 일부 독자들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어요. 그 당혹스러움 때문에 이후 모든 도서전을 외면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기저에는 그림책이 메인인 도서전이나 행사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내심 작용했던 거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7년 만에 다시 찾은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소감이 남달랐을 거 같아요.

 

모든 도서전을 외면했던 제가 7년 동안 깨달은 건, 만드는 데 애쓴 만큼 판매와 영업도 신경 써야 한다는 거였어요. 게다가 2022년에 론칭한 새 레이블 ‘롭(LOB, Less Ordinary Books)’을 알리고 싶었고, 더불어 텀블벅 이후 현장에서만 판매하기로 한 하이엔드 핸드메이드 그림책 『우리는 공원에 간다』(사라 스트리스베리(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그림), 안미란 옮김, 2023) 한정판도 소개하고 싶었죠. 도서전은 경험이 없으니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결국 책만 들고 나갔어요. 그런데 다행히 이번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비록 ‘완판’을 써 붙일 수는 없었지만 4박 5일 도서전 기간 내내 정말 앉아 있을 새도 없이 많은 분들이 찾아왔고, 매출은 1,000만 원이 훨씬 넘었죠. 특히 오시는 분마다 그림책공작소의 인스타그램을 잘 보고 있다고 하셨어요. 혼자서 책을 만든 고단함도 SNS를 꾸려온 부담감도 도서전 며칠 동안 충분히 보상받았고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도서전을 통해 독자들의 성향이 확실히 세분화되고 뜨겁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신 분들로부터 “이 책도 집에 있고 이 책도 있는데, 이게 다 여기 책이네”라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출판사는 매출이 아니라 브랜딩을 위해 도서전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또다시 느꼈죠.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그림책공작소와 롭 부스에서의 민찬기 소장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그림책공작소와 롭 부스에서의 민찬기 소장

 

 

그림책공작소 팬들이 정말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웃음) 그림책 출판사로 1만 명 넘는 SNS 팔로우를 가진 곳이 거의 없잖아요.

 

저는 가장 확실한 마케팅이 감성 마케팅이라고 생각해요. 요즈음 말로는 흔히 통칭해서 ‘브랜딩’이라고 하죠. 콘텐츠의 완결성, 정가 대비 가성비 같은 문제가 아니라 이걸 만지고 구매하는 행위와 콘텐츠를 감상하고 리뷰를 올렸을 때 콘텐츠 메이커가 이 리뷰에 대해 피드백까지 하는 것, 이 모든 게 다 브랜딩과 관련 있다고 봐요. 저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그림책공작소’ 해시태그의 게시물은 다 가서 살펴보고 하트 누르고요. 스토리에 올라온 건 전부 공유해요. 온라인서점 이벤트가 아니라 그런 소소한 것들이 제가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우리 책을 사랑해주는 독자에게 최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감성 마케팅이라고 생각해요. 1인 출판사가 정치인이나 연예인 못지않게 퍼스널 브랜딩이 가능한, 가장 적합한 기업이잖아요. 제가 보내는 어떤 메시지, 책과 매칭해서 올리는 사진 하나하나가 다 독자에 대한 서비스라고 봐요. 그래서 책만 달랑 찍는 게 아니라 재미나게 연출하여 찍으려고도 많이 노력하고요.

 

 

브랜딩에 진심이어서인지 그림책공작소와 직거래 하는 책방이 100군데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동네책방과 가장 네트워킹을 잘하는 출판사라고까지 생각하는데, 직거래로 인한 어려운 점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동네서점과 상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림책공작소는 1인 출판사이고, 그림책만 만들고, 직거래를 한다는 세 가지가 유독 남다른 부분이지만 어쨌든 상업 출판사입니다. 상업 출판을 하면서도 전국구 도매 업체인 북센과 거래를 안 했던 것이 직거래를 하게 된 배경이지요. 북센과 거래를 안 한 까닭은 크게 두 가지예요. 우선 그들의 거래 조건은 공급률 55%, 100만 원 이상 매출은 4개월 어음이거든요. 밤새 만든 책을 내가 먼저 반값에 보내는 것도 싫었고, 어음이니 위탁이니 장부니 하는 말들은 책을 만들기만 했던 ‘편집자 민찬기’한테 거부감을 불러오기 충분했어요. 예전에 보림에서 연중 업무로 반품 정리를 할 때 봤던 북센의 반품 방식도 잔혹한 기억으로 떠올랐고요. 결국 마케팅 베이스보다는 콘텐츠 베이스를 지향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출간한 책들이 온라인서점의 주목 신간에 오를 때마다, 북센은 공급률 55%에 4개월 어음을 10번도 넘게 안내했고, 그때마다 괴로웠어요.

 

출판사가 서점과 직거래를 할 수 있는 필수조건은 당연하게도 도매 거래를 안 하는 거예요. 하지만 더 중요한 충분조건은 좋은 책을 만드는 거죠. 그래야 온라인서점에 노출되고 그로써 독자 구매 또는 학교나 도서관의 납품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수서 과정에서 납품 리스트에 오르면 지방서점은 결국 출판사에 연락해서 직거래를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시간과 매출의 잣대로만 보면 출판사에도 책방에도 직거래는 효율성이 낮은 방식입니다. 출판사는 출고와 계산서 발행 업무가, 책방 역시 별도의 주문과 회신과 입금을 체크해 처리해야 하니까요. 게다가 택배로 보내니 공급률을 높여야 하지만 제가 선택한 방식은 온라인서점과 공급률을 맞추는 거였어요. 5부 이상 공급률 65%. 월 매출 수백만 원인 온라인서점과 몇 만 원인 책방의 공급률을 똑같이 적용한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고 셈을 못하는 것 같지만, 책방지기들의 큐레이션, 디스플레이, 홍보에 대한 노고를 생각하면 차마 값을 더 받을 수 없었어요. 게다가 도매를 안 하는 상황에서 지방에 있는 독자가 우리 책을 보고 읽고 만지고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직거래 책방이었으니, 저로서는 모두 특별했고 감사했죠.

 

 

그런 감사함에 보답하고자 ‘직거래 책방 띠지 이벤트’도 기획하신 거죠?

 

맞아요. 2019년 직거래 책방은 100군데를 넘어섰고, 고마움도 임계치를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책방 고유의 메시지와 로고를 넣은 책방 띠지를 만들기로 했어요.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받고, 그 답변과 책방 로고를 패턴처럼 디자인한 띠지를 만들어 50군데 책방에 전달했습니다. 일명 ‘직거래 책방 보은 띠지 이벤트’는 2020년에 70여 군데로 늘어나 다시 띠지를 만들어 보냈어요. 그리고 2021년에는 급기야 길벗체 책방 간판을 만들어 화수분 같은 감사함을 전달하기도 했죠. 최근 두 해를 말없이 지나쳤지만, 조만간 다시 책방에 선물할 예정입니다. 아마 2024년 10월, 공작소 10주년 행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2019, 2020년에 선물했던 감사의 띠지

2019, 2020년에 선물했던 감사의 띠지

 

2021년에 선물했던 길벗체 책방 간판

2021년에 선물했던 길벗체 책방 간판

 

 

그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직거래 조건과 비법을 묻곤 했어요. 처음에는 공급률이나 회신 방식, 분기별 계산서 발급 등 표면적인 부분을 답하곤 했는데 지금은 “친구처럼 대하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저 책을 몇 권 파는 지역서점이 아니라 ‘우리 출판사를 응원하고 우리 책을 정말 좋아하고 심지어 독자에게 팔아주는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비즈니스 마인드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프렌드십(friendship)’으로는 거뜬히 할 수 있거든요. 2020년 이후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의 B2B(Business to Business, 기업 간 거래) 사업 확장으로 인해 책방들의 직거래 주문 빈도가 월 20회에서 월 5회 내외로 줄었지만, 책방과 함께 하는 추억과 우정은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계속 책방과의 직거래만 고수하실 예정인가요?

 

책방과 직거래하는 건 변함없어요. 다만 북센에서 2년 만에 다시 거래 제안이 왔습니다. 작은 그림책 전문 1인 출판사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해서 곧 거래할 예정입니다. 40권을 출간하고 9살이 돼서야 출판 유통에서 도매 역할을 인정하고 영업 마인드가 조금 생긴 듯해요. (웃음)

 

 

앞서 잠깐 이야기 나왔던, 그림책공작소의 새 브랜드 ‘롭(LOB)’에 관해서도 궁금해요.

 

롭(LOB)은 ‘Less Ordinary Books’의 약자로, 일반적이지 않은 예술 그림책을 지향하고 만들 때는 ‘새롭게, 자유롭게, 조화롭게, 까다롭게, 경이롭게’ 같은 의미를 되새기려 합니다.

 

 

‘새롭, 자유롭, 조화롭, 까다롭, 경이롭’의 롭롭롭, 마치 힙합 라임 같군요. (웃음) 그림책공작소를 통해서도 충분히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데, 새로운 브랜드 ‘롭’을 론칭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세상을 담은 책, 세상을 바꾸는 책’을 모토로 내세운 그림책공작소는 2014년부터 모두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었습니다. 1인 시스템도 콘텐츠도 나름대로 신선했고 업계와 시장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요. ‘모두를 위한’ 덕분에 어른에게 더욱 적합한 수준의 그림책들도 과감히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9년이 흐른 지금은 모든 그림책 출판사가 모두를 위한 그림책, 나아가 어른을 위한 그림책에 공들이고 있습니다. 유능한 인력들과 더 많은 자본이 있는 기성 출판사들이 더 과감한 책들을, 더 많이 만들어, 더 좋은 굿즈까지 붙여 시장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다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끼다가 외부가 아닌 내부, 나를 탐색해봤습니다. 2014년, 그림책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던 해맑은 내가 아니었어요. 7~8년 동안 출판사를 꾸려오면서 매출, 원가, 마케팅, 이벤트, BEP 등 콘텐츠가 아닌 부수적인 것을 신경 쓰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더군요. 편집자에서 발행인으로 학습화됐다고 하기에는 시장에 길들여진 답답함이 느껴졌죠. 다시금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년 차 편집자로서 그림책을 보는 인식과 안목이 달라졌고, 그림책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으니, 다시 심장 뛰는 그림책을 찾아 새롭고 자유롭고 조화롭고 까다롭게 만들어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롭을 준비하고 새롭게 론칭한 계기입니다.

 

새로운 브랜드 롭을 시작한 민찬기 소장(로고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다), 롭에서 출간된 『우리는 공원에 간다』

새로운 브랜드 롭을 시작한 민찬기 소장(로고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다), 롭에서 출간된 『우리는 공원에 간다』

 

 

한층 더 까다로운 그림책이 롭을 통해 나오겠군요.

 

여러 책을 준비 중입니다. 모두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어 하죠. 비룡소, 사계절 등은 앞서 30년 전 출발했고 이미 안나푸르나까지 올랐을지 몰라요. 따라가려면 밤새도록 가도 모자란데 따라갈 이유를 생각하다가 목적지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거죠. 아무도 가본 적 없고 갈 수 있을지조차 모르지만 저는 명왕성에 가고 싶어졌어요. 그게 ‘롭’이에요.

 

그림책공작소는 국내 기성 작가와 함께 창작 그림책을 만들거나 제가 만족하는 외국 그림책을 들여올 테고, 롭은 국내 시장에서 통용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국적 상관없이 상상력이 훨씬 풍부한 곳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전혀 새로운 지구상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나갈 거예요. 계속 도전할 겁니다.

 

 

롭을 통해 진일보한 하이엔드 그림책이 많이 나오길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그림책 편집자로서 요즈음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림책공작소에서 언제까지 그림책을 만들 수 있을까?’, ‘롭은 그림책으로 어디까지 제시할 수 있을까’ 크게 이 두 가지 정도를 고민합니다. 좋아하고 그나마 잘하는 일이니 오래 하고 싶었고 이제 발행인이니까 죽을 때까지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퇴보하는 감각과 시각, 이해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인 현상들을 접할수록 점점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은퇴는 운동선수만 겪는 순간이 아니겠지요. 두 고민 모두 1인 출판사로서 한계를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문제인데, 저는 정말 오래도록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림책공작소 로고(좌)와 사무실 벽면(중), 민찬기 소장의 일하는 모습(우)

그림책공작소 로고(좌)와 사무실 벽면(중), 민찬기 소장의 일하는 모습(우)

 

 

앞으로 그림책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요? 그 변화 속에서 그림책공작소는 나아갈 방향은 또 무엇일까요?

 

앞으로 그림책 시장은 더 격렬하게 양분화될 겁니다. ① 작가는 상업성을 좇는 작가 vs 작가주의 작가로, ② 출판사는 대형 출판사 vs 1인 혹은 소형 출판사로, ③ 책은 유튜브나 동영상 매체에 견주는 대중적인 만화풍, 캐릭터풍의 그림책 vs 글과 그림이 조화로운 전통적인 형태에서 예술적으로 진일보한 하이엔드 그림책으로, ④ 독자 역시 온라인서점 베스트셀러만 읽는 패신저 리더(passenger reader) vs 외국의 원서들까지 섭렵하는 헤비 리더(heavy reader)로!

 

이렇게 예상되는 양극화 중 무엇을 좋다 나쁘다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그림책공작소와 롭의 방향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림책 헤비 리더들이 인정할 만한 하이엔드 그림책을, 작가주의 작가들과 공들여 만들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방향성과 결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1인 출판사로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예비 그림책 편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이들이 무엇을 채우고 가꿔야 할지 말이죠.

 

그림책은 그림으로 메시지를 직시적이면서 임팩트 있게 전달하는 인쇄 매체라는 걸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림책 편집자의 필수 자질은 없지만, 모든 편집자가 그렇듯 세상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야 하고 교양서와 철학서, 미술사나 디자인 폰트와 관련된 예술 서적도 많이 보면 좋죠. 하지만 무엇보다 그림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림책은 정말이지 본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이니까요!

 

 

 

오전 11시 30분에 시작한 그와의 인터뷰는 해가 저물고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오늘도 그는 자기가 만든 책뿐만 아니라 ‘그림책 편집자 민찬기’가 사랑한 수십 권의 그림책들을 내 앞에 펼쳐가며 열정을 다해 이야기했다. 10여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한결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역설적으로 나는 그가 명왕성에 가지 못해도 좋겠다. 그저 그가 이 지구에 남아 오래도록 그림책을 만드는 걸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민찬기 소장
국문학을 전공한 22년 차 그림책 편집자. 2003년부터 마루벌, 한솔교육, 보림 등에서 창작 그림책 50여 종, 외국 그림책 100여 종을 기획, 편집했다. 2014년에 1인 출판사 그림책공작소를 설립했고 2022년에는 새로운 레이블 롭(LOB)을 론칭했다. 그림책공작소는 2021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출판사’ 아시아 최종 후보에 올랐다.
challymin@naver.com
https://blog.naver.com/challymin
그림책공작소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icturebook_gongjackso
롭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lob_publisher

 

김세나

김세나 퍼블리랜서 대표

출판 전문지 〈기획회의〉 편집자, 이색서점 ‘세렌북피티’ 운영자를 거쳐, 현재는 출판 커뮤니티 ‘퍼블리랜서’에서 출판하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다. 느슨하지만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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