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6  20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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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본 불매 운동… 출판은?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2019. 09.


 

일본이 강제 징용 피해 배상 판결을 이유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출 규제에 나서자마자 국민들이 일본 상품에 대한 자발적인 불매 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페이스북에 공지를 하나 올렸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본 에도시대 소설의 출간을 연기한다는 내용이었다. 다 만들어 놓은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도 썼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몇 군데 언론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자는 신간 출간을 미루게 된 경위와 함께 어떤 심경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며칠 사이에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이 내용들은 다음날 기사화되었다.

 

〈일본 장르소설을 전문으로 내는 북스피어는 최근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인 작가 소설 출간을 준비하다가 인쇄 직전 멈췄다. 김홍민 대표는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 책들을 페이스북에 광고하고 있는데, 일주일 전부터 그 광고에 ‘쪽발이 소설을 광고하다니 제정신이냐’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더라”면서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책들에도 그런 댓글이 달리는 걸 보고 겁이 덜컥 나 일단 신간 출간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 영향이 출판계로 미치고 있다.(조선일보, 7월 23일)〉

 

비슷한 내용이 〈문화일보〉에도 실렸다. 기사를 찬찬히 곱씹으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불매운동의 와중에도 소신껏 일본 작가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에게 송구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출판계의 대표도 아닌 마당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함으로써 또 하나의 프레임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그 뒤로 여타 매체에서 온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했다. 다른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내가 처음 일본 작가의 책을 펴낼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도 나는 같은 일을 겪었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를 만난 건 2004년 무렵이다. 그의 이야기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한때의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내가 쓰고 싶어 하던 이야기가 여기 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스물아홉의 봄부터 겨울까지 나는 미야베 미유키의 이야기 속에서 헤맸다. 인간은 사회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악한 성질 때문에 초래한다고 여기고, 그의 처벌을 통해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인을 향한 사회적 시스템의 폭력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를 변호하기 위해 등장하는 대변인 같았다. 개인의 비난이 아니라, 범죄가 일어나게 된 동기를 추적하여 사회의 시스템을 제대로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듬해 나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를 차리고,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을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척 근사한 경험이었다. 대사 하나 몸짓 하나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과 그들의 시대가 어찌나 선명하고 활기에 넘치는지,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입에서 술술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빼앗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대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제가 에도 시대물을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렇게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때문입니다.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작가의 견해에 완전히 공감했다. 나는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작을 비롯하여 10종의 시대물과 10 종의 현대물을 계약했고, 몇 군데 매체에 미야베 미유키에 관한 글을 썼다.

 

마침 이 시기를 전후로 온갖 분야의 출판자본이 장르문학으로 유입되었다. 이때 종수로나 매출 규모로나 가장 크게 성장한 분야는 추리소설이다. 셜록 홈즈와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변되는 영미권 소설이 꾸준히 소비되는 가운데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를 필두로 한 일본 소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며 시장을 견인했고, 엘러리 퀸, 조르즈 심농, 마쓰모토 세이초, 대실 해밋 전집이라는 굵직굵직한 기획도 줄을 이었다.

 

실로 다양한 추리소설들이 제대로 된 번역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추리소설을 탐독하다가 저자(번역자), 혹은 기획자(편집자)가 된 세대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획자들은 영미권과 불어권, 일본어권 추리소설에 만족하지 않고 북유럽 추리소설도 시장에 선을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본 소설에 대한 언론의 시선은 ‘유독’ 차가웠다.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사를 인용해 본다.

 

〈일본 소설들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닌 이즈음이다. 대형 서점 매대는 벌써 오래전부터 일본 소설들로 뒤발되어 있다. 일본 소설이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은 어딘지 무겁고 답답한데 일본 소설은 산뜻하고 ‘쿨’해서 좋다는 것이 독자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여기에다가 한국 소설에는 이야기가 부족한데, 일본 소설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내장하고 있다는 평가가 곁들여진다.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한국 소설의 이념 과잉이 독자 이탈의 주범으로 들먹여지기도 한다. (한겨레신문, 2007년 4월 2일)〉

 

이런 논조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대개 한국 소설이 맥을 못 추는 반면 비논리적이고 가벼울 뿐인 일본 소설이 마구잡이로 수입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일본 소설 거품론’이다. 정말 그런가. 일본 소설이 수입되기 때문에 한국 소설이 팔리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수입된 미국 소설은, 그리고 영국 소설은 왜 문제 삼지 않는가. 물론 이것은 전반적으로 일본 소설의 판매가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겠다. 어쨌거나 ‘일본 소설에 점령당한 한국 소설(경향신문, 2007년 6월 12일)’ 같은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면 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소개된 인터넷서점의 감상평에도 여지없이 비난의 댓글이 달렸다.

 

때문에 독도나 한일 어업협정 문제가 불거지면 나는 그 즉시 납작 엎드렸다. 실제로 몸을 납작 엎드린 건 아니고, 일정을 수정하여 일본 소설을 미루고 미국 소설을 출간했다. 이렇게 써놓으니 그동안 출간한 미국 소설들에 미안한데, 나는 이것이 미국 소설이기 때문에 출간한 게 아니다.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출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소설이기 때문에 출간한 것이 아니다.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출간한 것이다. 아니, 재미있는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출간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출간의 기준은 오직 ‘재미’였지 국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국적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그렇게 (비유적인 의미로) 몸을 납작 엎드려야 할 일이 생겼다.

 

다시, 이야기를 2019년으로 되돌려보자. 한일 관계의 악화로 “쯧쯧, 쪽바리 소설을 광고하다니”라고 욕을 먹은 것은 최근 10년을 돌아보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2005년에 출판사를 차리자마자 일본 소설을 내면서 매년 한두 번씩은 꼭 들었는데 이제 10년에 한 번으로 바뀐 것이다. 게다가 내가 페이스북에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본 에도시대 소설의 출간을 연기한다”는 공지를 올렸을 때 달린 독자들의 댓글들은 전부 “그래도 책은 출간해야 한다”는 당부이거나 “힘내라”는 등의 응원이었다.

 

과거, 독도 문제가 불거져 미야베 미유키 작가를 향한 비난의 댓글이 달렸을 때 응원하고 싶지만 혹시 귀찮은 싸움에 휘말려들까 싶어 눈치를 보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래서 출간은 미뤘지만 예전만큼 속상하진 않았다. 일본이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니 사과는 사과대로 받아내되, 책은 그 후에 출간하면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작가, 에이전트, 인쇄소, 독자가 연관되어 있는 만큼 걱정이 아주 없진 않다. 다만 전전긍긍해봐야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겠거니 하며 기다리는 쪽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교훈을 과거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게 비난받을 일이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응원해 준 형제자매님들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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