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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9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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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만약 출판 편집자가 삿포로에 간다면
- 아름다운 ‘공원 옆 도서관’ 하루에 다 둘러보기

 

 

 

이영미(출판 편집자, 『마녀체력』 저자)

 

2020. 04.


 

세상엔 크게 두 부류의 여행자가 있겠다. 늘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도전가 타입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익숙한 곳에 가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후자에 가깝다.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가본 곳을 표시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간 적이 훨씬 많다.

 

여기저기 짧게 옮겨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면, 지난번에 묵었던 숙소를 다시 찾곤 한다.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이방인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 고향인 서울 말고도 그렇게 친숙한 곳을 몇 군데 만들고 싶다. 그것이 필자가 추구하는 여행의 속성이랄까.

 

일본 삿포로도 그런 여행지 중 한 곳이다. 1년 동안 세 번이나 방문했다. 날짜로 치면 50일 정도를 한 도시에서만 머문 셈이다. 웬만한 현지인보다 지리에 더 훤할지도 모른다. 이젠 시내 지도나 지하철 노선도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얼굴을 알아보는 단골 카페가 생긴 것은 물론이다. 자주 들르는 가게는 포인트 카드까지 만들어 두었다. 머지않아 또 다시 들르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일본의 5대 도시 중 하나인 삿포로엔 워낙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공원의 도시’로 손꼽을 만하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잘 조성된 공원들이 포진해 있다. 하루에 공원 하나 제대로 둘러보는 게 벅찰 만큼 넓고 울창하다. 운동화를 신고 달리거나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마녀체력’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러나 책이 없다면, 어떻게 천국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누가 편집자 아니랄까 봐, 필자의 더듬이는 어딜 가든 맹렬하게 움직인다. 책이 내뿜는 페로몬을 향해서. 흠뻑 땀을 흘리고 난 뒤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쉬고 싶다. 그렇게 공원에서 달리거나 호젓한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간이 촉박한 여행객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지에 익숙해지는 가장 느긋한 소일거리이기도 하다.

 

삿포로엔 사계절 아름다운 ‘공원 옆 도서관’이 많다. 게다가 필자가 자주 가는 곳들은 도시 중심에 다 몰려 있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걸어서만 다녀도 좋다. 단 하루만 시간을 내면, 시내 구경은 물론 공원과 도서관의 은혜를 담뿍 받는다. 싸고 맛있는 우동과 달콤한 디저트, 진한 커피는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그런 것이 바로 도시가 몰래 보여주는 속살이 아니겠는가. 만약 출판 편집자가 삿포로에 간다면 꼭 들러보길 권하는 하루 코스를 소개한다.

 


코스 소개

 

지하철을 타고 도시의 중심인 삿포로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바로 근처에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홋카이도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문 학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자그마한 교문을 통과하며 ‘에계.’ 하고 실망하다간 금세 뒤통수를 맞는다. ‘이것이 과연 학교인가, 공원인가.’ 할 정도로 광활한 들판과 나무와 실개천이 손 벌려 기다리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을 맞아 캠퍼스 투어를 정기적으로 할 만큼 볼거리가 많다. 계절만 잘 선택하면 오래된 포플러나무 행렬이나 은행나무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커다란 매머드 몇 마리가 남아 있는 박물관도 볼 만하다.

 

과연 도서관은 어떨까. 나처럼 잠시 머무는 외국인도 들어가서 책을 볼 수 있을까.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교 시스템은 어떤지 모르겠다. 짐작으로는 졸업생조차 드나들며 시설을 이용하긴 어려울 듯하다. 필자가 졸업한 모교만 해도 오래전부터,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입구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입구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내 열람실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내 열람실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내 미디어 센터


홋카이도 대학 도서관 내 미디어 센터

 

홋카이도대학 도서관은, 간단하게 1일용 출입증만 작성하면 입장이 가능하다. 다만 시험 기간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얼마간 사용할 수 없다고 미리 공지한다. 2층은 오픈 공간으로, 담소를 나누거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보기만 해도 널찍한 테이블 사이의 공간이 쾌적하다. 3층은 이야기를 나눌 순 없지만 컴퓨터를 쓰는 건 가능하다. 4층과 5층은 오로지 개인 책상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만 할 수 있다. 아무런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기 그지없다.

 

각 층마다 독서실처럼 분리된 개인 책상이 줄지어 놓여 있다. 하지만 벽을 마주보는 숨겨진 구석자리도 좋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카페처럼 일렬로 놓인 의자도 맘에 든다. 2층 한쪽에는 미디어 센터라고 이름 붙은 세련된 휴식 공간을 만들어 놨다. 이 안에서는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거나, 심지어 큰 대 자로 드러누워 잠을 잘 수도 있나 보다.

 

교정을 둘러본 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곧 배가 고플 시간이다. 근처에 있는 학생식당에 들러 우동을 한 그릇 비운다. 교정을 뒤로하고 나오면 필자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게 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30여 년 전 과거를 둘러본 느낌이다. 대학생의 싱싱한 에너지를 나눠받은 듯 발걸음마저 힘차다.

 

처음 삿포로를 찾았을 땐, 대도시의 명성에 비해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그렇지, 거리에 사람이 좀 적은데?’ 금세 이유를 알았다. 삿포로는 바둑판처럼 조성된 지상 도로 밑에 길게 지하도가 뻗어 있다. 삿포로역에서 다음 역인 오도리공원역, 그리고 다음 역인 유흥가 스스키노역까지 이어져 있다. 단순한 복도식 통로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양옆으로 유명 백화점은 물론 화려한 쇼핑몰이 펼쳐져 있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어쩌면 현지인은 죄다 이곳으로만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북적북적하다.

 

여행객인 필자는 늘 지상의 길을 선택한다. 도심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1.5km의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리 잡은 오도리공원을 걷기 위해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2월 눈 축제가 열리는 현장이기도 하다. 총 12개로 나누어진 블록마다 나름의 개성을 자랑한다. 특히 동쪽 끝에 서 있는 TV타워는 삿포로의 대표적인 랜드 마크다. 밤이 되면 우아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인다.

 

탑에 디지털로 표시되는 시계도 좋지만, 오도리공원 근처에는 오래된 시계탑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100년도 넘은 목조 건물 위, 고풍스러운 시계탑에선 아직도 정시마다 낭랑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도리공원을 둘러본 뒤 시계탑을 구경하고 나서 들를 곳은 근처에 있는 ‘삿포로시민교류플라자’라는 흰색 빌딩이다. 이 건물 1층과 2층에는 누구나 머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삿포로 시민교류플라자 도서관 복도 좌석


삿포로 시민교류플라자 도서관 복도 좌석

 


삿포로 시민교류플라자 도서관 내부


삿포로 시민교류플라자 도서관 내부

 

척 보기에도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진 실내 공간은 아늑하다. 거기가 답답하다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창가에도 오픈 좌석이 놓여 있다.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된 시내 한복판에 웬만한 카페보다 더 쾌적한 도서관이라니! 1층에는 연극과 공연, 2층에는 전시, 3층에는 콘서트가 열리는 극장이 있다. 말 그대로 시민들이 모든 문화를 한자리에서 향유할 수 있는 복합 공간이다. 오도리공원을 실컷 즐기다가, 책을 읽으며 다리를 쉬어 가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여기까지 둘러봤다면 점심에 먹은 우동이 다 소화되었을 것이다. 진한 커피 한잔에다 달달한 디저트가 간절해지는 시간이다. 우유가 맛있고 신선하기로 소문난 홋카이도 아닌가. 특히 삿포로에는 그런 우유로 만든 질 좋은 디저트가 넘쳐난다. 길에서 파는 허름한 가게의 소프트아이스크림조차도 눈에 띄기만 하면 먹으라고 할 만큼 풍미가 진하다. 치즈나 버터, 빵, 비스킷 등, 우유로 만든 제품은 뭐든지 다 맛있다. 그러니 디저트를 만드는 과자점과 직영 카페가 많을 수밖에.

 

그중에서도 시내에 나갈 때마다 들르는 곳은 ‘기타카로’ 본관이다. 역시 오도리공원 근처에 있으니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 유독 이 카페를 찾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층 매장에 기타카로에서 만드는 모든 디저트 제품을 진열해 놓았다. 손님들은 구경하면서 공짜로 제공되는 샘플을 맛볼 수가 있다. 하나하나 맛을 보며 적당하게 집어먹으면 요기가 될 정도다.

 


기타카로 본관 1층에서 파는 디저트류


기타카로 본관 1층에서 파는 디저트류

 


책처럼 만든 초콜릿


책처럼 만든 초콜릿

 


도서관 느낌을 살린 본관 2층의 북카페


도서관 느낌을 살린 본관 2층의 북카페

 

허름한 돌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와 어우러진 벽면 가득한 책장에 시선을 빼앗긴다. 천장에 커다란 흰색 천막을 쳐놓은 듯한 현대식 북카페다. 사실 이 건물은 1926년에 지어진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그 유명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현대 감각으로 도서관 내부를 리노베이션해 재탄생시켰다. 건축상까지 받은 유명세와 더불어 세트로 파는 디저트가 입에서 살살 녹는다. 테이블이 그리 많지 않고 사람들은 느긋하므로, 언제든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만큼 수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여기서 나와 남쪽 스스키노역 쪽으로 방향을 잡아 이동한다. 좀 피곤하다 싶을 땐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점프를 하면 나카지마공원역이다. 색다른 경험을 원한다면 천천히 움직이는 노면 전차 시덴을 잡아타도 좋다. 초록색 구식 디자인부터 윤기 나는 새빨간 전차들이 도로 위 철로를 따라 미끄러지는 풍경은 언제 봐도 이색적이다.

 

삿포로에서 가장 오래된 나카지마공원은 탁 트인 호수를 끼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호텔 호헤이칸이 유명하다. 천황이 첫 숙박객이었다는 연보랏빛 건물 앞에 서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맞은편에 있는 손바닥만 한 천문대를 지나면 ‘키타라’라는 유리로 된 콘서트홀이 나온다. 그 음악당 옆에 서 있는 ‘새끈한’ 건물이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이다.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내 도서관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 내 도서관

 


홋카이도의 대표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와 문학관을 설계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


홋카이도의 대표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와 문학관을 설계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

 

1933년생인 와타나베 준이치는 홋카이도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대표 작가다. 30대 후반까지 의사로 살다가 전업 작가를 선언했기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러고 나서 1년도 안 되어 『빛과 그림자』로 63회 나오키상을 수상했으니 얼마나 놀라운가. 1996년에 쓴 『실낙원』은 300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 국민 배우인 야쿠쇼 코지가 주연을 맡아 영화로도 대성공을 했다. 불륜과 자살로 이어지는 파국적인 결말은 ‘실낙원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을 정도다. 70대에 쓴 『둔감력』이란 에세이 또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문학관 역시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1998년에 지어졌다. 흰 새가 눈 위에 한 다리로 서 있는 듯한 이미지를 전면에 담았다. 출생부터 서거까지 인생과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와타나베 준이치라는 대작가와 금세 친숙해질 수밖에 없다. 1층의 우아한 카페에 앉아 그의 소설 한 권을 읽는 것으로 ‘공원 옆 도서관’의 뿌듯한 일정은 조용히 마무리된다.

 

2월 중순에 가벼운 마음으로 삿포로를 다녀왔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불과 한 달 만에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선포되는 공포스러운 국면까지 이르렀다. 이웃집에 다녀오듯 일본을 편안히 갈 수 있었던 게 꿈인가 싶을 만큼 교류도, 비행기조차도 멈춰 섰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이 사태는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도서관에 앉아 미친 듯이 내리는 눈발을 마주한 채 세상이 정지된 듯 책에 빠져들었던 그 시간이 더욱 그리운 경험으로 피어오른다. 보랏빛 라벤더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7월 즈음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을 읽은 출판 편집자들이 언젠가 삿포로를 찾아 ‘공원 옆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어슬렁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영미(출판 편집자, 『마녀체력』 저자)

출판 에이전트로 일하며, ‘인생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강의를 하고, 라디오와 팟캐스트에서 책 소개를 한다. 문학사상사, 디자인하우스, 웅진단행본, 펭귄클래식코리아 등에서 100여 권의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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