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12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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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북스의 역사 담론,
한국은 역사상의 선진국이었다

 

 

 

이재민(너머북스 대표)

 

2020. 07.


 

너머북스란 출판사 이름으로 낸 역사책이 지난 10년 동안 70종 남짓 됩니다. 앞으로 10년을 노력한다고 해도 낼 책은 두 자리 숫자일 것 같습니다. 그 유한함이 책의 방향성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이 한 출판사 도서목록의 행간에 깃들어 있는 문제의식과 기획의 주안점 등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너머북스가 만나고 배운 역사학자와 만들어온 책을 가지고 근대 패러다임, 유교모델론, 새로운 모색 등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노학자 세 분의 한국을 향한 열정

 

먼저 그동안 국내외 역사학자와 지적 관심을 공유하며 우정 어린 관계를 해오는 과정에서 각별한 가르침을 주신 미야지마 히로시, 마르티나 도이힐러, 김자현 선생님 등 노학자 세 분을 소개합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학자이자 스승입니다. 2002년 5월, 도쿄대에서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연구실로 찾아뵌 이후 물음이 생길 때마다 선생에게 여쭙고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한국사 공부』, 『양반』, 『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 3권과 ‘19세기의 동아시아’ 시리즈 4권을 만들었고, 올가을에 신간 『(가제) 한중일 비교 통사』를 낼 예정입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제가 출판에서 이루고 싶은 한 가지를 말하자면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님의 선집을 4~5권 정도 내는 것입니다. 그 제1권이 될 ‘조선토지조사사업사 연구’는 황당하게도 한국학계에서 그를 식민지근대화론자로 오인한 저작입니다. 당시에 선생은 “내기 보기에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농민들이 토지를 대량으로 상실했다는 견해만큼 당시의 농민을 우습게 보는 시각도 없다. 조선시대 토지제도 자체가 근대화에 도달할 만큼 이미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며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토지조사사업을 토지 수탈을 위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 했습니다. 미야지마 선생님의 책과 역사관은 이하 글에서 좀 더 나올 겁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선생님. 한국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와 사회구조에 미친 영향을 살핀 대표작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재간한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출간할 무렵인 2013년, 선생님을 누하동의 출판사에서 만났습니다. 팔순을 앞두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1천여 쪽에 이르는 신작을 거의 탈고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국어판을 너머북스에서 내는 대신에 번역자를 직접 정하겠다는 것이 선생의 유일한 조건이었죠. 그 책이 『조상의 눈 아래에서』였습니다. 한 챕터씩 번역원고가 나올 때마다 이메일로 꼼꼼하게 검토하고 피드백을 해주심은 물론, 번역자의 생계를 염려하여 연금을 쪼개어 몇천의 스위스프랑을 네 차례에 걸쳐 송금해 주기도 하셨답니다. 대작『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그렇게 나온 책입니다. 선생은 올해 86세로 에드워드 와그너(하버드대), 제임스 팔레(워싱턴대) 등으로 이야기되는 서구의 한국학 1세대 중 유일하게 살아 계신 분입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김자현 교수님(컬럼비아대)은 너머북스가 선생의 대표 저서 두 권을 출간하며 한국학계와 독자들께 소개했다는 보람이 있습니다. 한국 학계의 탕평론은 끊임없이 유해하기만 한 붕당론에 대항하여 쓰였고, 그 붕당론은 종국에 왕조의 멸망을 이끈 타성과 혼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라며 차라리 영조는 붕당 정치의 대안을 모색했다는 논지의 『왕이라는 유산_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과 임진왜란을 통해 한국에서 민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파격적인 화두을 제시하며 의병봉기, 한글의 사용 등을 주요인으로 논증한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입니다. 이 책은 2001년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에 따라 출판된 미완성 유작입니다. 미국 학계에서 한국사가 주변부 위치에 있지만, 선생은 주류 역사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컬럼비아대 제자 김지수 교수(조지워싱턴대)를 통해 열정적인 학문 세계, 서구학자들과의 치열한 논쟁, 그리고 글쓰기의 수사학과 자존심 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김지수 교수의 ‘조선시대젠더, 신분 그리고 법적 퍼포먼스’를 다룬 『정의의 감정』이 올 하반기에 나올 예정입니다.)

 

 

 

근대 패러다임이 한국의 ‘전근대’를 가두어버렸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 역사학의 세계에는 새로운 계보가 만들어져 왔습니다. 미국의 동양사 연구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기에 ‘근대 패러다임’을 앞세우며 그 유명한 페어뱅크 교수(하버드대)가 주도했습니다. 근대 패러다임이란 서구적 근대, 자본주의가 영원히 발전하리란 믿음이 강력하게 작동된 체제라 할 수 있습니다. 68혁명을 기점으로 조너선 스펜서 교수(예일대)가 앞 체제를 비판하며 등장했죠. 너머북스에서 올해 완간한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전 6권)를 기획한 티모시 브룩(UBC 교수)과 윌리엄 로(존스홉킨TM 교수) 등 저자들은 스펜서의 차세대인데, 살펴보시면 이들이 중국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하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60년대 전후 역사학이 민중사 연구를 거쳐 90년대 이후 ‘현대 역사학’으로 바뀐 흐름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했을까요.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전 6권)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전 6권)

 


티모시 브룩 교수


티모시 브룩 교수

 

역사책 애독자분들께서는 아마도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이란 역사관을 접해 보셨을 줄 압니다. 여기서 잠깐 ‘내재적 발전론’이란 역사관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할게요.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는 ‘식민사학’의 청산, 극복이었습니다. 이 흐름에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1980년대까지 한국 역사학계를 주도한 사관이 내재적 발전론입니다. 정치사에서는 중앙의 지배층이 교체되는 가운데 한국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고려시대의 호족-문벌-권문세족-신흥사대부와 조선전기의 훈구-사림 등이 그것인데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공부를 상기해 보시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일조각)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사회 경제사에서는 경영형 부농의 출현(김용섭의 농업사 연구)과 조선후기 신분제 해체를 골간으로 한 자본주의 맹아론이 활발히 연구되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이 내부적 발전 논리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 핵심 요지입니다.내재적 발전론은 전근대의 조선이란 중세를 빨리 해체하고 근대로 와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며 지체되었다는 역사 인식을 낳았고, 결국 지금까지 조선시대를 그저 과거에 가둬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1980년대 풍미했던 민중사 연구는 동유럽과 소련이 해체되면서 힘을 잃었죠. 한국사(연구)는 길을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너머북스의 역사책은 지금까지 한국사와 역사 인식에서 지배적인 ‘근대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은 질문이며 고민의 산물입니다.

 

존 던컨(미국 UCLA 교수)의 『조선왕조의 기원』은 현행 국사 교과서를 포함한 학계의 통설인 ‘신흥사대부’ 건국론을 정면에서 비판합니다.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신흥사대부가 타락한 중앙 귀족(권문세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나의 한국사 공부』에서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며 한국 사회의 근대 이행의 특질을 밝혀냅니다.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보고 조선후기를 해체기로 파악하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전전(戰前)의 일본 봉건제론과 같이 조선시대 발전 모델을 서유럽에서 찾으려 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저자의 ‘소농사회론’과 ‘유교적 근대’ 같은 연구 성과를 풀어낸 바 있습니다. 오항녕 교수(전주대)는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으로 불렸던 광해군이 오늘날 재평가되며 다시 살아난 토양이 ‘근대 패러다임’이라 비판합니다.

 

 

 

유교망국론과 유교모델론

 

지난 10여 년간 펴낸 너머북스의 역사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이 역사상 선진국이란 역사 담론’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지금 입증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지만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선진국’ 담론의 핵심은 ‘유교모델’입니다.

 

우리에게는 유교모델에 기반한 정치혁신이 그다지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는 상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양상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도 유럽 사회가 귀족주의적인 세습적 권력을 바탕으로 통치되었던 것은 단적인 예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유교모델’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걸고 이 이념의 실현을 지향한 국가·사회·사상 체제입니다. 중국 송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이 모델은 중국에서는 명대에 확립되었고, 한국에서는 조선왕조 성립을 계기로 본격화되었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선진 사상이었던 주자학을 내걸고 능력에 기반을 둔 관료제와 과거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특권이 통하지 않는 토지 소유 구조 등 서구에서는 근대 이후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이 확립되었는데,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유교적 근대’로 이름 지으며 한국의 근대는 19세기 개항 때부터가 아니라 소농사회가 형성되는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역사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지워버린 역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데는 역사교육 또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에서 성리학이 국가이념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상이며 왜 조선시대에 와서 그 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거의 결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교에 물들지 않아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외쳤던 ‘유교망국론’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통하는 까닭이 유교모델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잃어버린 근대성들』에서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는 세계적 차원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있는가?’ 하는 주제를, 중국, 한국, 베트남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공정한 경쟁에 입각한 시험, 즉 과거제에 기반을 둔 관료제의 역사적 유산을 중심으로 펼쳐낸 바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유교문명’에는 관료제와 능력주의, 사회 복지의 이상 등 오늘날의 현안까지도 시행했던 경험이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비판과 대안까지 축적해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을 방치한 채 왜 서구적 근대만 표준으로 삼고 그에 의지하려 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한국의 역사상을 재정립할 새로운 계보를 기대하며

 

지금 우리는 밀레니엄이란 숫자로는 실감할 수 없었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비로소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 전조가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아닐까 합니다. 사고 직후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현 문명이 망했다는 걸 깨닫는 것이 다음 문명론의 전제라는 말씀하신 기억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유교모델과 그 역사적 경험이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모델은 근대(합리화 과정) 과정이 단순히 자본주의의 역사만으로 귀결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도 진행될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일찍 선취했는지가 아니라 그 역사적 경험을 자산으로 삼아 오늘날 인류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는다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재를 비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자 경험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에 만난 역사 공부를 하는 20대들께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지적체험을 해왔고, 세계와 소통하며 관계할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앞 세대와 선생에게 묶이지 않고 스스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에서 과거에 갇힌 역사상을 재정립할 새로운 계보가 생겨날 것이란 희망을 품어봅니다.

이재민(너머북스 대표)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휴머니스트 출판사 편집주간을 지내고, 현재 너머북스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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