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24  2021.08.

게시물 상세

 

[인터뷰] 지역출판의 그루터기, 호밀밭 출판사

 

 

 

 

2021. 8.


 

 

문화가 지니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화가 생기고, 문화가 발전하는 곳에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난다. 그러한 트렌드는 지역에 색다른 활기를 불어넣고 또 다른 문화의 곁가지를 틔운다. 호밀밭 출판사는 부산지역에서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를 중심으로 13년째 지역출판과 지역문화를 이끌고 있다. 〈격주 호밀밭〉 발행, 독후감 대회 운영과 같이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지역의 교육과 학술 연구, 스토리텔링 등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는 호밀밭 출판사의 장현정 대표를 만나봤다.

 


출판사 입구 입간판에 직원들이 돌아가며 쓴 시를 적어 놓았다.


출판사 입구 입간판에 직원들이 돌아가며 쓴 시를 적어 놓았다.

 

〈출판N〉에 장현정 대표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웹진 독자에게 소개와 인사말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호밀밭 장현정입니다. 코로나19를 비롯해 불안, 우울, 차별, 혐오 등 여러모로 사나운 시기에 모두 건강하시고 무탈하시길 바라며 인사드립니다. 특히 요즘처럼 콘텐츠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는 시대에, 그럼에도 뚜벅뚜벅 ‘출판’이라는 화두를 안고 살아가시는 분들께 인사드리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호밀밭 출판사는 2008년 부산에서 시작해 올해로 13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지역출판의 선구적 위치에 있는 호밀밭 출판사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2008년 11월,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였는데 진로를 고민하다 출판사를 만들었습니다. 13년이란 시간이 짧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제야 조금 출판에 대해 알게 된 기분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배워야 할 게 더 많아지고 갈 길도 멀다는 생각이 들어 ‘선구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호밀밭은 한국 사회의 삶이 지니는 경로나 양상이 너무 획일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좀 더 다양하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과 태도를 소개하고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문사회 분야 책을 주로 기획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 에세이, 예술, 어린이, 실용 등 여러 분야의 작가들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문화, 젠더, 동물권, 청년, 노동 등 여전히 인문사회 분야 주제의 책이 주를 이루고 있긴 합니다.

 

‘호밀밭’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것처럼 ‘누구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진심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어떤 책이라도 펴내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또 소설에서도 호밀밭에서 뛰어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세상과 만나게 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세상의 때가 더 묻기 전의 참신한 신인 저자들을 많이 발굴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호밀의 기능입니다. 땅의 지력이 다하면 호밀 같은 거친 작물을 심어 지력을 되살린다는 데서 착안했습니다. 호밀을 몇 번 심었다가 수확하는 사이 땅이 힘을 상당히 회복하게 되어 이후에는 더 여린 작물을 심어도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역량은 모자라지만 새로운 문화적 시도를 겁내지 않고 우리 사회의 마중물 역할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과거 밴드 앤의 보컬로 활동하며 앨범도 발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대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셨어도 괜찮으셨을 텐데, 어떠한 계기로 부산에서 출판사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2집 준비하는 동안 멤버들과 너무 자주 싸우게 됐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너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고 무엇보다 가족, 친구, 애인 등이 모두 부산에 있어서 다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왜 서울로 갔는지 생각해보니 부산에서는 연습하고 곡 만들고 공연하는 등의 활동까지는 가능한데 앨범 발매나 후반 작업 같은 마무리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가 일종의 생태계라면 마디가 하나 빠져 있는 셈이었습니다. 음악 활동을 할 때도 가사 쓰는 걸 좋아했는데 책과 관련된 생태계도 비슷했습니다. 읽고 쓰는 건 가능한데 단순한 인쇄나 제본을 넘어 유통과 후반 작업 등이 단단하게 받쳐주는 출판은 부족해 보였습니다. 제가 음악 활동을 하던 당시 한국에 ‘인디’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인디레이블이 가능한 것처럼 인디출판사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0년 호밀밭 출판사에서 뮤지션들과 함께 가사 중심 공연으로 꾸민 “사색의노래”


2020년 호밀밭 출판사에서 뮤지션들과 함께 가사 중심 공연으로 꾸민 “사색의노래”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올 만큼 어려운 게 현재 출판업인데요. 지역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출판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원동력은 호밀밭을 아껴주는 분들의 지지와 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에는 1인 출판사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은 다른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동료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출판에 대해 얘기도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일을 도모해볼 동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 사이 이런저런 분들이 점점 호밀밭을 중심으로 모이고 작은 출판사인데도 기꺼이 원고를 주시는 등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지금도 그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호밀밭 출판사의 책들은 인문사회, 문화예술 도서가 주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호밀밭 출판사만의 저자나 작품 선정 기준이 있나요?

 

한국 사회는 근대화나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겪기도 했고 그 밖에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일상이 너무 빠르기도 하고 다들 너무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담론, 기존 고정관념을 환기해주는 내용 등을 우선 선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기성 저자보다는 한 번도 자신이 저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삶의 경험이나 태도가 독특하다면 꼭 저자로 함께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한편으로는 공부하면서 각 분야의 고전이나 중요한 저작들이 의외로 우리나라에 너무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시장이 작아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나라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지식 콘텐츠의 두께가 지나치게 얇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학을 가지 않으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리겠다는 우려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많은 양을 출판하진 못했지만 조금씩 각 분야의 중요한 클래식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계획도 있습니다.

 

지역출판사 대표로서 지역출판이 갖는 힘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와 함께 지역출판이 필요한 이유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현장성과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 사회를 예로 들면, 조금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해하시겠지만 뛰어난 학자들도 젊은 시절에는 자리가 어디에 나느냐에 따라 소속되는 학교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다 보면 예기치 못한 지역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기도 합니다. 각 지역에 그렇게 우수한 학자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 지역에서 함께 무언가를 해볼 동료를 찾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콤플렉스에 갇혀 제풀에 지치는 경우를 봤습니다. 반대로 지역에 있다 보니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상의 풍경과 만나 훨씬 현장 중심으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발전시켜가는 경우도 봤습니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분야의 저자들도 비슷합니다. 그런 현장성이야말로 책상에 앉아서, 혹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저작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기형적으로 중앙집중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수도권에서 더 이상 새로운 담론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세련되고 프로페셔널하지만 고인 물 같다는 느낌도 들어서 외국 트렌드를 빠르게 소개하거나, 이미 역량을 검증받은 저자 중심으로 출판 활동이 이루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 면에서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참신한 시도는 각 지역에서 그만의 고유성을 토대로 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호밀밭 출판사 사내 연구 모임


호밀밭 출판사 사내 연구 모임

 

여러 지역출판사의 다양한 노력으로 지역출판을 더욱 활성화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지역출판이 앞으로 더 발전하려면 여러 출판사와 독자들, 서점들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보다 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각 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멋진 지역출판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래 출판의 역사도 국가 단위가 아닌 도시 단위와 함께해왔습니다. 출판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이 다른 매체와 달리 스스로 찾고 판단하고 성찰하는 여러 노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점이나 독자들처럼 출판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가 미디어나 트렌드에 휘둘리기보다 좀 더 다양하게 각자의 관점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바라봐주시면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해봅니다.

 

이어서 지역출판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바람직한’ 같은 형용사가 나오면 제가 순간적으로 좀 경직됩니다만, 그냥 저희가 하는 시도 중 하나를 말씀드리면 출판과 관계없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분야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출판의 꽃이 ‘편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단순한 텍스트의 배치나 편집을 넘어선 ‘사회적 편집(social editing)’의 개념으로 확장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사회학을 공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가치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그 사이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역에서 출판을 할 때는 이런 여러 영역의 다양한 관점과 가치들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고 조율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호밀밭 출판사는 출판계와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길 원하시나요? 방향과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저는 아직도 가끔 ‘인디 1세대 뮤지션 출신’ 같은 말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악 활동을 할 때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입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인데 10년 넘게 버티다 보니 지역출판에 대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과분한 오해를 받을 때도 많습니다. 모두 고마운 일이지만 무겁지 않게, 해오던 대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어떻게 하면 오래오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최우선입니다. 저희가 출판계나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먼저 어떤 걸 계획하거나 의도할 역량은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희는 코로나19를 비롯한 여러 시대적 흐름과 더불어 출판과 관련된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중입니다. 구독경제, 팬덤 등의 모델이 결합한 형태인데 이런 시도가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공간적 제약을 많이 받는 지역에 있는 출판사들에는 새로운 실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많은 양의 책을 팔아서 큰 수익을 올리기보다 소수라도 안정된 독자 풀을 확보해서 함께 출판의 미래를 그려보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또 출판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 지역출판의 가치와 미래에 대해 함께 논의하자고 권유하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 중 하나의 결실로 부산에서는 ‘부산지역출판조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아직 이 조례의 영향력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저희가 만들어낸 조례라고 감히 자부심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년째 지역에서 연구 모임을 진행하며 부산지역출판조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수년째 지역에서 연구 모임을 진행하며 부산지역출판조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끝으로 〈출판N〉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상극(相剋)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고 보니 상보(常保)의 관계였다는 걸 새삼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책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가 기본적으로는 라이벌 관계일 수도 있지만, 더 큰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출판의 가치와 힘을 지키고 확장시켜야 할 동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호밀밭이 자주 ‘지역출판’이라는 틀로 소개되는 것처럼 더 넓게 보면 한국 출판 자체가 세계적인 맥락에서는 그야말로 변방의 지역출판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위기가 한편으로는 기회라는 말처럼, 디지털 기술이나 출판을 위협하는 여러 시대적 흐름이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됩니다. 세계적 맥락에서 보면 지역출판에 불과할 수도 있을 한국 출판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난 다양한 기술적 역량을 배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장현정

 

장현정(호밀밭 출판사 대표)

1975년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고 10대 후반부터 록밴드에서 활동했다. 군 복무 중 수필 「꿈꾸는 영혼」으로 등단, 이듬해 시집 『바람 사이로 보다』를 발간했고, 1998년 록밴드 ‘앤(Ann)’의 보컬로 활동하며 1집 앨범을 발매했다. 『소년의 철학』, 『록킹 소사이어티』, 『무기력 대폭발』, 『아기나무와 바람』 등의 책을 썼고 연극 〈나투라〉의 각본을 쓰거나 독립영화 〈보름달〉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부산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호밀밭 출판사를 설립했으며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 (주)부산노리단 공동대표, 지역문화지 〈안녕광안리〉 편집장 등으로 활동했다.
hjmiro@naver.com
facebook.com/hjmiro

 

人사이드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