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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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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출판 도약의 발판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2019. 05.


 


펼쳐진 수많은 책들


(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1.

 

얼마 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화재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가 하면 이 화재가 유독 다른 재난에 비해 큰 주목을 받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서구 중심적 세태를 문제 삼았다. 노트르담 성당이 일부 불탄 것은 그토록 슬퍼하면서 스리랑카 성당이 테러 공격을 받아 백 수십 명이 숨진 것에는 무관심하고, 성당 수리에 기부할 돈은 있어도 빈민 기부에는 인색한 것이 서방세계 시민들의 속내라는 것이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노트르담 성당이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면, 이번 화재를 접한 전 세계 많은 이들이 느낀 안타까움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트르담 성당의 건축이 시작된 12세기는 시대구분상 ‘중세’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난 1500년경까지 천년을 말한다. 이 시기는 흔히 ‘암흑시대’라 불리기도 했다. 무지와 미신과 야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유효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암흑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든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12세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 대부분이 이 시기에 확정됐다. ‘7성사’와 ‘마리아 경배’가 대표적이다. 특히 마리아 경배는 문화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12, 13세기에 건립된 대성당들은 대부분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노트르담(Notre Dame)’이란 말 자체가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노트르담 성당은 파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 루앙, 랑 등 프랑스 각지에 수많은 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성당은 기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대거 변모했다. 그 변화의 의미는 켄 폴릿의 장편소설 〈대지의 기둥〉에도 잘 소개돼 있다. 12세기 영국의 주인공이 파리에 건너가 당시 첨단 건축기술이었던 고딕양식을 배워 고향(웨일즈)에 고딕성당을 건립하는 꿈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마리아 경배는 건축에만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문학 장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서사시’가 ‘로망스(소설)’로 바뀐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무훈을 찬양하는 남성적 서사시에서, 애틋한 사랑이 묘사된 여성적 로망스로 문학이 변했다. 문학에서 ‘로망스’가 등장한 시기인 12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출현한 건축 양식이 고딕이었던 것이다. 고딕이 로마네스크에 비해 한층 여성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한 것처럼, ‘로망스’도 ‘서사시’에 비해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건축과 문학에서 일어난 이런 변화는 12세기가 어느 시기 못지않게 실험적이고 역동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된다. 중세를 섣불리 암흑시대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다.

 

 

 

2.

 

마리아 경배, 고딕 성당, 로망스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12세기는 또한 ‘번역의 세기’이기도 했다. 번역을 통해 유럽은 미개하고 낙후된 후발 문명에서 선진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 유럽 수도사들이 아랍어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수도원 사서들에게는 아랍어 해독 능력이 필수였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아랍어 문서를 중세 유럽 공용어인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유럽인이 이슬람으로부터 뭔가 배웠음을 뜻한다. “대체 유럽이 아랍으로부터 뭘 배운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근대 이후 서양문명이 이슬람을 압도한 탓에 우리 뇌리에는 ‘이슬람은 서양보다 뒤떨어진 문명’이라는 부정적 고정관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이 이슬람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은 ‘최근 수백 년’에 한해 맞는 말이다. 서기 7세기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을 소화해냄으로써 유럽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문명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으로 발전시켰고, ‘야만 상태’의 유럽은 12세기 이후 이슬람 학자들이 소화한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도약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대표적 사례다. 유럽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그리스어→라틴어’로 직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아랍어→라틴어’로 중역(重譯)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기독교에 융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도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의 저자 리처드 루빈스타인은 중세 유럽인에게 이슬람의 학문은 마치 ‘스타 게이트’(행성 간의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미개한 유럽이 선진 이슬람 문명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정적으로 배운 결과 새로운 역사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 유럽의 번영을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슬람의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유럽이 이슬람에 얼마나 신세를 졌는지는 아랍어를 어원으로 한 수많은 영어단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교통(traffic), 관세(tariff), 창고(magazine), 알코올(alcohol), 오렌지(orange), 레몬(lemon), 설탕(sugar), 대수학(algebra), 영(zero), 연금술(alchemy), 알칼리(alkali)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어단어들이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한 뒤 5세기 동안 유럽은 문맹률이 99%를 넘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지식을 번역해 소화함으로써 유럽을 압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 후 12세기에 유럽은 이슬람문명이 소화한 그리스 지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수많은 고전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그 노력이 축적된 결과 수백 년 후 근대가 열렸다. 이로써 이슬람과 기독교 진영의 우열은 역전되고 만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셈이다. 번역을 통해 후발 문명이 선진 문명을 추월한 대표 사례다.

 

 

 

3.

 

국내에선 올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주의 열기가 뜨거운 와중에, 일본에서는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채택됐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중국 고전이 아닌 일본의 고전을 전거로 한 연호라고 한다. 기사가 뜨자 ‘고유 문자도 없어서 중국 것이나 모방하는 못난 것들’이라는 댓글이 따라붙었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과 일본 문자에 대한 경멸이 느껴진다. 그러나 생각해볼 점이 있다.

 

한글은 세종 치세인 1446년에 공표되었고, 일본의 가나(假名)는 8, 9세기경 처음 등장했다. 한글은 일본 가나보다는 600년 뒤에, 서양어 알파벳보다는 2,200년 뒤에, 당대 최고 언어학자들이 집현전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든 ‘최신형 문자’다. 컴퓨터로 치면 최신형이다. 구형 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건 진부하다.

 

문자가 뛰어나면 능력도 우수할까? 일본 교토산업대의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70평생 외국에 나가 본 적도 없어서 여권도 없었다. 일본어밖에 할 줄 몰랐던 그가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일본어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음을 뜻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글만으로는 노벨상은커녕 석사 논문도 쓸 수 없다. 한글은 이를테면 ‘반쪽짜리 언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최신형 고급카메라(한글)를 자랑하면서도 제대로 된 사진은 찍을 줄 모르는 풋내기다. 반면 일본은 낡아빠진 필름카메라(가나)로 멋진 작품을 뽑아내는 노련한 프로사진가다. ‘번역 왕국’ 일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들이 자국어만 알고서도 세계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만큼, 선진 해외 문화의 수용과 소화에 힘쓰는 동안, 우리는 한글 문자체계의 우수성 자랑만 했지 콘텐츠를 비옥하게 가꾸는 데는 소홀했다. 모국어를 ‘반쪽짜리 언어’로 방치한 것은 세종의 후예로서 낯 뜨거운 일이다.

 

12세기 유럽과 19세기 일본은 번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로 자국어 콘텐츠를 축적하고 이를 발판 삼아 문명의 도약을 이룩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감이 있다. 한국어만 구사할 수 있어도 노벨상을 탈 수 있게 만들겠노라는 한 차원 높은 긍지와 포부, 그리고 민족이상이 필요하다. ‘반일(反日)’은 쉬우나 ‘극일(克日)’은 어렵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발판이 출판에 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우석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저서로 〈번역청을 설립하라 / 유유〉, 〈나의 서양사편력 / 푸른역사〉, 〈밀턴평전 / 푸른역사〉 등이 있으며,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 인간사랑〉, 〈영웅숭배론 / 한길사〉,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소나무〉 등을 번역했다. 저서 〈번역은 반역인가 / 푸른역사〉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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