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6  2019.09.

게시물 상세

 

[빅데이터로 읽는 우리 시대 언어]
자발적 가난의 선택 ‘푸어’의 의미

 

 

 

김정구(다음소프트)

 

2019. 09.


 

미디어에서건 일상생활에서건 ‘OO 푸어(Poor)’라고 언급되는 상황이 많아졌다. 짐작 가능하겠지만 ‘푸어’라는 표현은 집을 무리해서 사려다 가난해진 사람들을 뜻하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에서 시작됐고, 어느새 이 언어에서 파생된 신조어의 개수가 23개 정도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언급하는 ‘푸어’ 중의 1등은 어떤 ‘푸어’일까?

 

‘푸어’의 시작을 알렸던 ‘하우스 푸어’가 여전히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지만 현재 압도적 1등은 본인의 능력보다 다소 무리해서 좋은 차(수입차)를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카 푸어(car poor)’다.

 


그림 1. OO 푸어 클라우드 맵


그림 1. OO 푸어 클라우드 맵

 

‘카 푸어’는 수입차 점유율이 처음으로 15%를 넘기기 시작한 2015년 이후, 약 1년 정도 지난 시점인 2016년부터 사용 빈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2015년 즈음부터 독일 모 社의 엔트리급 수입 모델의 인기에 힘입어 너도 나도 수입차 입문자가 늘기 시작하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수입차 판매 업체의 금융 상품을 통해) 36개월 할부(혹은 48개월 할부)로 차를 지르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람들은 ‘카 푸어’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카 푸어’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등장한 신조어는 아니다. 무려 6년 전인 2013년에도 ‘카 푸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단지 그 수가 미미했을 뿐이다. 소셜 미디어 분석을 업으로 삼으면서 사람들(고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요즘은 어떤 게 뜨나요?”, “요즘은 트렌드가 무엇인가요?”라는 식의 질문이다. 나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신조어가 갑자기 등장해 언급량이 순간적으로 급증한다고 그것이 트렌드라고 단순히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꼭 얘기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쉽게 끓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언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요새는 이것이 트렌드에요”라고 얘기한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달에도 수십, 수백 개의 트렌드가 등장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두고서 언어의 사용 증가세와 지속성의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거나, 혹은 특정 언어가 유사한 타 언어의 언급(사용)을 역전했을 때 비로소 트렌드가 되었다고 말한다.

 

‘푸어’의 대명사 격이었던 ‘하우스 푸어’를 ‘카 푸어’가 역전했다는 점, 그리고 2013년 이후로 꾸준히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약 6배 이상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측면에서 ‘카 푸어’의 성장세는 단연 주목할 만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조어가 탄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 수준의 성장세와 꾸준함을 보이는 언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표 1. ‘카 푸어’ vs. ‘하우스 푸어’ 언급 추이


표 1. ‘카 푸어’ vs. ‘하우스 푸어’ 언급 추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OO 푸어의 길

 

‘푸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분명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하우스 푸어’에서 ‘카 푸어’로 OO 푸어의 대세가 역전된 이후, 서서히 ‘OO 푸어’의 의미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더 이상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기 시작한 단어인 ‘하우스 푸어’는 여전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하우스 푸어’의 감성 연관어를 통해 긍정적 의미를 담은 감성 표현보다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감성 표현이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그리고 월등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카 푸어’의 의미는 조금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표 2. ‘카 푸어’ vs. ‘하우스 푸어’ 연관 키워드 / 연관 감성 순위


표 2. ‘카 푸어’ vs. ‘하우스 푸어’ 연관 키워드 / 연관 감성 순위

 

‘카 푸어’의 연관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능력에 맞지 않지만) 중고로라도 할부 수입차를 구입하는 ‘카 푸어’의 사전적(?) 의미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감성 키워드를 살펴보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하우스 푸어’보다 ‘카 푸어’의 감성 표현에서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이 상위권에 많이 랭크되어 있다. 그들은 ‘집은 포기했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무리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비싼 (중고) 수입차를 질러서 좋다’고 이야기하고, ‘젊기 때문에 현재를 즐기기 위해 사고 싶어서 샀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의 핵심은 ‘카 푸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카 푸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카 푸어’의 삶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실속보다는 열망, 혹은 로망템을 선택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보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내일 드디어 차가 출고됩니다!!! 평소 타고 싶었던 차를 좀 무리해서 사서… 카 푸어가 됐지만…후회 안 합니다!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겠어요!”
“카 푸어 입문하러갑니다… BPS(BMW사의 공식 인증 중고차 판매 서비스)에서 입양이지만, 그래도 신차 계약하고 기분이 같네요. 카 푸어에 입문하겠습니다. 차는 용기로 타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덧붙여 ‘카 푸어’나 ‘하우스 푸어’ 외에도 앞서 살펴본 〈그림1〉을 통해서도 본인이 자발적으로 ‘OO 푸어’의 길을 택했음을 말하는 씬(Scene)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우스 푸어’, ‘타임 푸어’, ‘에듀 푸어’ 등의 수동적 푸어뿐 아니라 ‘펜 푸어’를 비롯한 ‘옷 푸어’, ‘캣 푸어’, ‘워치 푸어’ 등 자발적 푸어라 지칭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라블랙 에너겔 하이클래스 연필 4자루, 연필깎이, 영웅 616 3자루, 698 1자루, 이로시주쿠 야무부도 파우치 바이알별 3003 5자루.. 매번 허벌나게 고민하면서 주문했는데 이렇게 결산하고 보니 많네요… 이제부터 식비 2천원, 자동차 히터/에어컨 금지, 시속 50~60킬로로 운전…ㅠㅠ 펜 푸어란 이런 건가요, 데이빗 블루 잉크도 사고 싶네요.
“2018년 4월 청콤을 시작으로 9월에 청텐포 3월에 스드 이번 달에 위블로 클래식퓨전까지 첫 시계부터 지금까지 일 년 만에... 워치 푸어의 삶이지만 행복합니다. 다음 기추는 혹시 뭘 하면 좋을까요?

 

이제 ‘푸어’는 사전적 의미와 달리 사용자들의 자발성에 기반하여 긍정적 내연을 지니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신의 상품, 당신의 브랜드, 당신의 서비스를 그들이 소비하면서 스스로 ‘푸어’가 되어도 괜찮다고 할 만큼의 매력을 갖추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발적으로 ‘푸어’ 선언을 기꺼이 외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자.

人사이드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