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4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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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라벨스타인〉의 번역을 권하며

 

 

 

박홍규(영남대 명예 교수)

 

2019. 05.


 

‘영어권 최고 작가’라는 찬양을 듣는 솔 벨로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상당수 소개되었다. 〈허공에 매달린 사나이〉(1944), 〈희생자〉(1947), 〈오기 마치의 모험〉(1953), 〈오늘을 잡아라〉(1956), 〈비의 왕 헨더슨〉(1959), 〈허조그〉(1964) 등인데, 그 후 2005년에 죽기 전까지 40여 년간 쓴 작품은 거의 우리말로 소개되지 못해 그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일한 예외가 1976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에 나온 수상작품 〈훔볼트의 선물〉인데,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 작품도 번역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동안 그에 대한 단행본 연구서도 4권이나 나오고 학위논문도 9편이나 나왔는데, 번역은 초기 20년 작품이 중심이고 후반 40년의 작품은 거의 소개되지 못한 것을 기이하다고 보는 내가 도리어 기이한 걸까? 후기 작품들의 문학적 가치가 낮다는 일부의 평가도 있지만, 적어도 만년 작품인 〈라벨스타인〉을 비롯한 몇 작품은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꼭 번역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다. 영문학자를 비롯하여 영어소설을 자유자재로 읽는 사람들에게야 번역이 있건 없건 문제가 없겠지만, 나처럼 외국문학을 주로 번역에 의존하여 읽는 일반 독자에게는,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제 때 소개되지 못하는 점에 대해 불만이 크기 마련이다. 특히 서양사상사 전체를 총괄하는 엄청나게 넓고 깊은 시야로 현대 사회를 철저히 비판하는 지성과 양극을 오가는 생기발랄한 문체로 움베르토 에코, 살만 루시디 등을 포함한 무수한 추종자를 낳아 현대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벨로의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점에 대해 나는 영문학과 출판에 관련된 분들에게 깊은 유감을 갖는다. 그런 유감 때문에 나같이 외국어를 제대로 모르는 일반인이 번역을 수년씩 기다리다가 결국 지쳐서 ‘함부로’ 번역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가령 〈오리엔탈리즘〉은 원저가 나오고 13년을 기다린 뒤에까지 번역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내가 번역한 것이다), 그런 아마추어의 번역을 대단히 엄격한 영어선생처럼 꾸짖지만 말고 제발 제대로 된 번역을 제때에 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솔 벨로 라벨스타인

 

위에서 벨로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은 다른 작가나 화가나 음악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이나 환경에 따라서 기호는 얼마든지 변한다. 나의 경우, 가령 니체나 헤세, 루벤스나 르누아르, 바그너나 비제가 그렇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내 주위에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벨로의 후기 작품 모두에 관심이 있어서 지난 수 십 년간 미국에 갈 때마다 그 원저를 열심히 사서 모았다. 그러나 내 나이 벌써 67세가 되어 그것들을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그동안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외국서적만이 아니라 국내서적도 너무 많다. 지난해 정년퇴직을 했을 때, 이젠 사놓은 책들을 모두 읽겠다고 결심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벨로의 작품들은 그 중 백분의 일도 안 되는 양이지만 나의 독서계획 순서상 최우선이 아니어서 언제 읽어낼지, 아니 과연 읽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어디 여행을 갈 때 들고 가서 조금씩 읽는 책으로 그가 죽기 5년 전에 낸 〈라벨스타인〉(Ravelstein) 팽귄 문고판을 택하여 지난 1년 동안 읽었다. 200쪽이 조금 넘으니 읽기에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그 책에 대해 이처럼 글을 한 편 쓴다는 것이 여간 괴롭지 않다. 그의 영어 문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책이 〈미국 정신의 종말〉을 쓴 앨런 블룸의 삶을 다루었고, 특히 네오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블룸이 평소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비판했음에도 정작 그 자신이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로 죽었으며, 자신이 성해방과 함께 미국 정신의 종말을 초래한 주범으로 비난한 록가수 마이클 잭슨을 보고 환호작약했음이 그 책에서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에 그 책이 나왔을 때 배신자니 노벨상 수상 경력의 오염이니 하는 악평들이 신문에 쏟아져 나왔다. 우리말로도 번역된 〈미국 정신의 종말〉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출판 직후 10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환영받았고, 저자는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대처 수상의 초청까지 받았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 블룸의 제자들은 레이건 정부는 물론 지금까지 미국의 행정부와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도 기라성처럼 많아 여전히 그 책은 중요하게 언급되어 왔다.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나, 지금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인 볼턴도 거기에 속한다. 그래서 영미에서는 〈라벨스타인〉이 엄청난 충격을 던졌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남의 이야기인양 아주 짤막한 관련 기사 하나밖에 볼 수 없었고, 번역도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솔로는 블룸과 막역한 친구로 블룸이 네오콘의 아버지라면 솔로는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동지 관계에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고, 〈라벨스타인〉의 전체 분위기도 블룸에 대한 존경이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의 평가도 대체로 그렇다. 흔히 말하는 현대문명으로 인한 인간소외가 벨로의 평생 주제라고 보는 문학연구자들은 그런 주제의 최고 걸작이 그 소설에서 묘사된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벨로 자신은 그 소설을 쓴 이유가 거물 주인공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 비열한 민주주의의 실체를 까발려 그 위기를 경고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문학연구자들의 일반적인 평가와 작가의 변이 다르다. 그래서 벨로에 대한 연구서를 다시 철저히 읽어보았지만 대체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한 수준이고, 벨로 자신의 변을 분석하기커녕 소개한 글조차 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왜 문학연구자는 어떤 문학작품을 소개할 때 그 줄거리 내용의 요약 정도에 만족하는 것일까? 어떤 학자의 일생이 그 내용이라면 그 일생의 요약만이 아니라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당연한 임무 아닐까? 〈라벨스타인〉에서 작가는 그 주인공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관점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을 순수하게 예술적이거나 개인적인 관점 외에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문학 등의 예술 연구자가 아닌 내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대학에서 〈법과 예술〉이나 〈법문화론〉 등을 연구하고 강의한 나로서는 학생들에게 항상 사회적인 관점을 강조해왔다. 수많은 예술작품이 법과 관련된 사회적 사건을 다루고 있고 모든 예술가가 나름의 정치관이나 사회관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것이 분명하고 당연한데도 그런 사회적 관점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순수예술이나 예술지상주의 또는 인간의 내면성 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사회적 측면을 무시한 탓에 오늘날 문제가 되는 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문학이나 예술은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와 대화할 필요가 있다.

 

〈라벨스타인〉을 비롯한 솔 벨로 작품의 사회성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다룬 인물이 최근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국제정세를 결정하는 미국의 네오콘을 낳은 사람을 비롯하여 이른바 전통적인 서양의 인문학, 특히 철인에 의한 독재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이나 권력에의 의지에 불타는 초인을 주장한 니체의 엘리트주의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라벨스타인〉의 모델인 블룸은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1960년대 미국의 성해방과 록뮤직이 백인남성 중심의 미국 정신을 망쳤고, 대신 흑인 등의 유색인종과 여성이 대학을 점령하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성해방과 록뮤직을 만끽한 모순의 인간이었는데 그것이 모순이어서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이미 미국은 그런 비판자도 흡수할 정도로 성해방과 록뮤직의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성해방과 록뮤직을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흑인과 여성을 포함한 인류 보편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1960년대 미국에서와 같은 심각한 사회적 변화가 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네오콘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라벨스타인〉은 그런 문제의식을 던져준 점에서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만큼 네오콘의 영향을 직접 받는 나라가 또 있을까? 네오콘만큼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세력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네오콘의 어머니인 벨로가 그 아버지인 블룸의 비행을 폭로한 소설은 우리말로 번역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저가 나온 지 19년이 지났다. 내가 조금만 젊다면 지금이라도 만사를 제쳐두고 번역에 뛰어들겠지만, 이제는 불가능하여 영어 실력이 뛰어난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그 번역을 권하고자 이 글을 쓴다. 특히 영문학자들을 위시한 인문학자들은 네오콘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을 직시하고 문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을 배경으로 하는 네오콘을 철저히 연구해주기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와는 무관한 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여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하면서, 마치 남의 일인 양 ‘위기’를 개탄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자 스스로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솔 벨로

박홍규(영남대 명예 교수)

노동법을 전공하고 영남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지금은 그곳 명예교수로 있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과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세상을 꿈꾸며 글을 쓴다. 그런 자유-자치-자연에 어긋나는 학문과 예술, 특히 제국주의나 오리엔탈리즘, 반민주주의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번역하고 집필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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