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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5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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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읽기의 즐거움

 

 

 

장지연(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

 

2021. 9.


 

희곡 읽기의 즐거움

 

간간이 올라오는 기사에, 코로나19 사태로 바깥 활동이 제한되면서 사람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재발견하고 덕분에 책 판매량이 증가했다는 소식들이 꽤 보인다. 그중 희곡 분야도 포함되어 있다. 시나 소설에 비해 희곡의 독자가 한정적이라는 건 누구나 수긍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공연을 볼 수도 없는 이런 시기에 오히려 희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건 참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혹시 희곡의 매력을 익히 아는 독자들이 현재 공연장으로 갈 수 없는 만큼 희곡 읽기로 그 갈증을 대신 달래기라도 하는 걸까! 희곡 읽기에 재미가 들린 독자는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색다른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다. 하나는 여느 작품들처럼 내용이 주는 기본적인 감동에다, 희곡이라는 형식적 특징이 주는 느낌을 즐기면서 장면들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장의 관객이 되어 자신이 상상했던 내용과 비교해보는 즐거움이다. 또 그 사이에는 작품의 경우에 따라 독자가 창작자의 즐거움과 고통을 같이 공유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희곡이 무대 위 상연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 대본이니만큼 희곡 읽기의 즐거움은 무대 위 공연 관람의 즐거움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소설은 시공간에 있어서 상상의 범위가 무한대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희곡은 무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하니 여러 제약이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나 사건의 전개가 모두 ‘묘사나 서술’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연기할 배우의 육체적 움직임)과 대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 행동과 대사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공연 시 관객이 이야기나 사건을 현장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는 장면 전환의 한계가 있는 만큼 행동이 진척되기 어렵고 아예 장면을 만들기 곤란할 수도 있다. 등장인물의 수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군중 장면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수많은 배우를 다 무대에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시청각적 방법을 통해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무대 지시문이 설정되곤 한다. 또 공연 시간을 고려해야 하니 작품의 길이도 제한적이다. 이렇게 희곡은 반드시 무대화할 수 있는 조건으로 쓰여야 하기 때문에 여러 제약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은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강점이 된다. 사건과 이야기들이 행동과 대사로 표현되니 현장감과 생동감은 기본이고, 인간과 삶에 대한 보편적 주제들이 길지 않은 내용에 압축되어 표현되다 보니 긴장감과 몰입도가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몇 작품만 보아도 바로 느낄 수가 있다. 그의 극작술은 중세 연극의 영향인 삽화극 구조의 사용, 극의 전개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자주 이동, 짧은 장면과 긴 장면의 뒤섞임, 앞 장면과 뒷 장면의 상호 보충 역할, 서브플롯의 사용, 주연 외에 조연급 인물들도 매우 부각,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등장, 단어들의 인상적인 이미지와 리듬감, 언어의 음악성, 빼어난 은유 등이 돋보이기로 유명하다. 여기에다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모순,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을 고도로 예리하고 묵직하게 녹여 내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때와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한 명작이자 스테디셀러로 평가받는다. 그의 4대 비극의 경우만 보아도, 비록 내용은 비극이지만 독자는 희곡만이 가진 읽기의 즐거움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리어왕』은 정치적·사회적 해석을 뒤로 미뤄두더라도, 가족이나 집단의 파멸뿐만 아니라 자신도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만드는 흔한 인간사의 모습이 배어 있다. 그는 한때 막강한 권력을 지녔으나 나이가 들자 편안한 노후를 추구하며 세 딸에게 권력과 부를 나눠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냉철한 판단력, 현명함과 공정함을 유지하는 왕의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도 아니다. 권위적이고, 어리석고, 고집불통에다 성질은 불같다. 진실한 딸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도리를 저버린 채 아부와 배신을 일삼는 다른 자식들의 겉치레와 현혹적인 말에 속아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에 독자는 폭풍우 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리어왕의 절규에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여과 없이 경험할 수 있다.

 

『햄릿』은 왕이 되겠다는 욕망으로 형인 선왕을 독살하고 형수와 결혼까지 한 클로디어스와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실행해야 하는 왕자 햄릿의 갈등이 기본축이다. 이를 중심으로 정의와 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뇌, 젊은이들의 신의와 전쟁에 대한 시각, 기성세대의 관습에 대한 불만, 거짓과 위선,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과 이성에 대한 조명, 왕족에 대한 불신과 경계, 셰익스피어의 연극관 등이 드러나 있다. 사건과 이야기의 본질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대입해도 리얼리티에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를 읊조리고 내적·외적 갈등으로 멈춰 설 때마다 독자 역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의 사색과 고뇌에 동참하게 된다.

 

『맥베스』 역시 살인과 폭력의 부정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다가 파멸을 맞는 이야기다. 황야에서 만난 세 마녀의 예언을 듣고 숨어 있던 야망이 꿈틀대는 맥베스와 이런 남편의 욕망을 부추기는 아내, 이 둘은 결국 거침없이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살인 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부인은 몽유병에 걸리고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는 시늉을 반복한다. 부인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독자도 불안과 두려움의 분위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오셀로』는 원하는 지위를 내려주지 않자 앙심을 품은 이아고의 간악한 계략에 속아 오셀로가 사랑하는 아내를 의심하고 질투해 살해하는 이야기다. 이아고의 간계가 밝혀지고 아내의 진실도 확인하게 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독자들이 이아고의 간계에 분노하고 오셀로의 어리석음에 유독 안타까워하는 건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이렇게 불같거나, 어리석거나, 야비하거나, 잔인하거나, 나약하기도 한 인간의 속성과 성격적 결함, 본능과 이성, 권력을 향한 야심, 참회, 용서, 비극으로 치달으면서도 정의와 질서를 찾아 가려는 모습 등 우리의 세상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희곡은 삶에 대한 보편적이고 심오한 이야기들을 마치 옆에서 말하고 보여주듯 행동과 대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니 희곡을 읽는 독자는 다른 장르를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무대 상상의 즐거움

 

그런데 희곡은 공연 대본이니만큼 희곡 읽기의 즐거움은 공연의 상상과 함께 배가 된다. 희곡이 지닌 형식적 제약들은 오히려 또 다른 종류의 무한한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독자는 희곡을 읽으며 공연 시 무대 위에서 벌어질 모든 과정을 상상해간다. 배우의 외형부터 대사 처리, 분위기, 강조점, 무대 세트, 조명, 의상, 음향, 음악 등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의 범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이미 독자의 상상 속에 그려져 자리를 잡은 장면들을 배우들은 과연 어떻게 표현해 낼까. 디자이너들은 무대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 총지휘자인 연출가는 모든 것을 조합해 어떤 기발한 무대를 총체적으로 창조해 낼 것인가. 혹시 내 예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보여줄까.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작품의 주제를 그들도 같이 표현해 낼까. 내 관점과 통할까, 아니면 다른 관점의 해석을 펼칠까. 옛 작품의 경우 구태의연하게 그대로 반복할까, 아니면 현대적 시의성을 새롭게 담아내어 관객의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 낼 것인가. 즐거움의 범위는 독자의 상상력 역량에 따라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이 과정은 무대를 창조하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경험하는 부분이다.

 

창작자의 즐거움과 고통의 공유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무대를 만들어 내는 창작자도 제한된 조건 내에서 어떻게든 가장 완성도가 높고 기존 공연과도 차별화된 무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극대화되고 같은 작품이라도 천차만별의 공연이 탄생한다.

 

상상을 눈앞의 작품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 예술가에게 상상과 창작은 삶의 원동력이자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겠지만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독자가 느끼는 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예술가는 창작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직접 구현한 작품들을 읽거나 접할 때, 독자는 그들과 창작 과정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공유하게 되고 이때 또 다른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희곡 창작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고뇌 자체를 주제의 일부로 다룬 희곡으로 피란델로1)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2)이 있다. 이 극은 시작 부분의 설정부터 매우 독특하다. 보통의 희곡 첫머리 등장인물 소개 부분과 달리 이 극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혀 있다. 하나는 ‘만들려는 연극의 등장인물들’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의 배우들’이다. 등장인물들이란 대본 속에나 나와 있는 것인데, 이 희곡에서는 실물로 살아 나와 공연 연습 중인 어느 극장의 연출가와 배우들 눈앞에 와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쓰던 작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다 말아서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 줄 작가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일반적으로 창작 단계에서 부딪히는 상상력의 한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쓰기를 포기했다는 내용이지만 실은 역으로 새롭고 독특한 이야기 쓰기를 완성해 낸 것으로, 피란델로의 상상력이 극대화되어 빛나는 장면이다. 장면을 따라가던 독자는 그의 기발한 발상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1)
루이지 피란델로(1867년-193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생. 소설가,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 193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입센, 체호프, 쇼와 같은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19세기 유럽 작가들의 연극적 전통을 거부하고 20세기 새로운 연극사의 획을 그은 작가이다. 브레히트, 베케트, 뒤렌마트, 이오네스코, 오닐 등의 20세기 대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받는다.
2)
이 희곡은 ‘차이와 가변성의 몰이해로 인한 소통 불능, 그리고 작가·배우·연출가가 희곡 창작과 공연 제작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다루며 ‘인생’과 ‘예술’을 동시에 주제로 담아 낸 메타테아트로 극이다.

 

또한 독자는 무대 위에서 능숙하게 공연할 배우들의 모습을 맘껏 상상한다. 그런데 배우들이 희곡을 읽고 기대치를 갖고 극장을 찾은 관객을 만족시키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피란델로는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배우가 등장인물을 표현해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다룬다. 극단의 연출가와 배우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올리려 연습을 하는데, 사사건건 그들 앞에서 직접 지켜보는 등장인물들과 충돌한다. 등장인물들은 도무지 배우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부분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표현해 내지 못하는 배우에 대한 지적을,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 표현하는 장면이다.

 

배우의 표현에 대한 어려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매개로 한 타비아니 형제 감독의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3)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마약, 살인, 강간 등의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교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줄리어스 시저』 공연의 연습을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감옥의 죄수들이 이 영화의 배우로 등장하고 이들은 정말 진지하게 연습에 임한다. 그중 브루터스 역할을 맡은 재소자 살바토레는 고민에 빠진다. 시저를 묘사하는 대사 중 “진정 그를 사랑했지만 만일 황제가 되면 그는 더 이상 시저가 아닌 바로… 바로… 독을 품은 뱀이 된다… 안 돼. 이 대사는 틀리면 안 되는데, 셰익스피어의 의도는 알겠는데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하지?”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중범죄인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빠져들어 이 대사를 읊조릴 때, 어느 전문 배우의 토로보다도 연기에 대한 배우의 고민과 어려움이 절박하게 전달된다.

 

 

3)
한때 네오레알리스모(neorealismo)의 거장들이었던 타비아니 형제(비토리오 타비아니(1929년-2018년), 파올로 타비아니(1931년-현재)) 감독의 작품으로 2012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자유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 민중의 속성에 대한 비판, 예술의 가치에 대한 확인과 함께 예술 작품의 창작 과정’을 동시에 다루는데, 그 과정에서 배우가 희곡의 내용을 표현해 내는 데 겪는 고민이 드러난다.

 

공연 관람의 즐거움

 

이제 다음 단계가 또 기다리고 있다. 희곡 읽기에서 경험한 상상력의 단계를 지나, 제작된 공연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즐거움과 설렘의 시간이다. 희곡을 읽은 독자는 이제 관객이 되어 공연이 그의 감각과 의식을 만족시키거나 혹은 그의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어주길 바라며, 때론 관객들의 연대감까지 자극해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기대도 가끔은 해보며 공연장에 들어선다. 그리고 희곡을 읽을 때는 경험할 수 없었던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충돌들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때로는 감동의 경험을 연장하고 싶어 다시 예약하고 재차 관람하는 경우들도 종종 생긴다.

장지연(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

문학 박사, 서경대학교 인성교양대학 조교수. 역서로 골도니의 『여관집 여주인』,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엔리코 4세』, 『산의 거인족』, 다리오 포의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등이 있다. 공저로 『장면 구성과 인물 창조를 위한 희곡 읽기 1, 2』, 『동시대 연출가론』 등이 있다.
cultura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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