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2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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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의 힘을 몸으로 겪는 시간, 책 듣는 밤

 

 

 

박사(‘책 듣는 밤’ 낭독 진행자, 북칼럼니스트)

 

2018. 12.


 

처음, 그러니까 대중들 앞에서 처음 책을 소리 내어 읽었던 건 산울림소극장에서였다. 어두운 극장의 관객석을 마주했지만 내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시공사, 2014)을 읽는데, 지하실의 아이가 외치는 순간 왈칵, 울음이 나왔다. 눈앞이 흐려져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객석 어딘가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제일 많이 울었을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읽었다. 내가 진행하는 ‘책 듣는 밤’에서 읽은 적도 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읽은 적도 있다. 어김없었다. 그 부분에 도달하면 눈물이 왈칵 넘쳤다. 마치 그 아이의 절규가 내 뼈를 울리는 것처럼, 누군가 내 눈물샘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것처럼 울음이 나왔다. 몸이 기억하는 듯했다. 몸이 그 감정을, 울음을, 각성을 기억하는 듯했다.

 

소리 내어 읽으면 몸이 함께 읽는다. 내 몸뿐 아니라 남의 몸도 함께 읽는다. 60회가 넘게 ‘책 듣는 밤’을 진행하면서, 나는 내 숨이 글자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만지는 느낌에 중독되었다. 나와 청자들은 같은 배를 탄 것처럼 천천히 흔들려가며 끝을 향해 나간다. 낭독을 끝내고 눈을 들면, 사람들의 표정이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맑다. 그때야 비로소 부스럭부스럭 각자의 현실로 돌아온다.

 


사진 1 _ 낭독회 진행 모습(필자 제공)


사진 1 _ 낭독회 진행 모습(필자 제공)

 

낭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2013년만 해도 이 일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낭독의 의미, 다른 사람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것의 의미, 함께 같은 리듬으로 읽는 느낌, 나의 상상력과 타인의 상상력이 함께 내달려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에 대해서, 나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같은 부분에서 웃음이 터질 때의 안도감에 대해서, 동지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서 정렬되는 내 세포의 감각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5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낭독의 즐거움에 길들여졌다.

 

예전에도 종종 그렇게 읽었다.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세 개의 모노로그』(청하, 1990)를 아무 데나 펼쳐 집히는 대로 소리 내어 읽곤 했다. 장 콕토(Jean Cocteau)의 짧은 시를 다급하게 읽어 삐삐 인사말을 녹음해놓기도 했다.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아아,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어!’ 하며 휴대전화 목록을 뒤지기도 했다. 그때 느낀 즐거움들이 모여서 결국은 나만의 낭독 행사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가늘고 길게 가는, 마니아 없이는 불가능한 ‘책 듣는 밤’이라는 행사.

 


사진 2 _ 책 듣는 밤(필자 제공)


사진 2 _ 책 듣는 밤(필자 제공)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얼마 후 ‘책 듣는 밤’을 하면서 나는 두 시간에 걸쳐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미야자와 겐지(宮瑞悟)의 『은하철도의 밤』(소와다리, 2015). 죽은 아이들이 타고 가는 기차의 풍경을 읽다가, 젖은 아이들의 발에 어느 순간 신겨 있는 하얗고 뽀송뽀송한 양말에 대해 읽다가 나는 몇 번이나 울었다. 끝나고 난 뒤 말없이 듣고 돌아간 지인이 메시지를 남겼다. “울어줘서 고맙다”고. 그때 나의 낭독은 일종의 애도였다고, 우리 모두의 울음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사실 많은 책이 그렇다. 그 목소리를 꺼내는 것, 그 감정을 꺼내는 것이 낭독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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