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38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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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이) 우리의 손이다
이름, 몫, 자리에 관하여

 

 

 

지다율(출판공동체 편않 에디터)

 

2022. 11.


 

이름 잃은 이들의 이름, 무명 혹은 익명

 

궁금했다. 짧은 기간 출판사에 다니면서, 그리 많지 않은 책을 만들면서, 부조리한 게 너무도 많은데, 유독 하나가 궁금했다. 내가 만든 책엔 왜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을까? 판권면엔 당연히 저자의 이름이 있고, 발행인의 이름도 있다. 역서라면 역자의 이름도 있다. 심지어(?) 인쇄인의 이름도 있다. 그런데, 담당 편집자인 내 이름이 없다. 디자이너의 이름도 없고, 마케터의 이름도 없다. 책에 간여한 사람이, 정녕 저자와 발행인과 (역자와) 인쇄인뿐이란 말인가?

 

이름을 기입하려는 건, 분명히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이 분명 망가뜨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릇된 명예욕에 휩싸여 자신을 망치고 주변을 망가뜨린 사례들이 분명 많을 것인데, 당장 떠오르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는 방증일까? 아무튼, 고작 종이 한쪽에 이름 하나 넣는 데 어떤 해악이 따른다면, 발행인의 이름으로 인한 그것이 클까, 편집자인 나의 이름으로 인한 그것이 클까. 나는 그냥, 욕망의 파워게임에서 진 것이다.

 

물론 지면상의 문제로 ‘모든’ 이름을 다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얼마나’ 적을 것인가, ‘누구를’ 적을 것인가의 문제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많을 것이고, 어쩌면 단순히 타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후원자들의 이름을 십여 쪽에 걸쳐 일일이 적은 책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의 이름은 중요하고 우리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은가?

 

이것저것 불만이 많았던 나는, 역시나 불만이 많았던 동료들과 자주 신세 한탄을 했다. 그리고 불평만 하기 싫었던 우리는 뭐라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고민 끝에 잡지가 떠올랐다. 적혔던 이름들이 아닌 적히지 않았던 이름들을 위해 우리만의 판권면을 만드는 일. 일단 그것이 하고 싶었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7호 판권면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7호 판권면

 

 

우리부터 선택해야 했다. 어떤 이름을 사용할지. 누구는 실명을 그대로 썼다. 아무런 탈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소속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가명을 만들었다. 포털에서 ‘랜덤 이름 생성기’를 돌렸다. 성별도, 연령도 가늠할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이 밋밋하고 평평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름들로 인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나는 조금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5년이 흘러, 무명을 피하기 위한 익명이었던 ‘지다율’이란 이름이 이제는 나의 소중한 이명(異名)이 되었다.

 

출판공동체 편않은, 그렇게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몫 없는 이들의 몫, 목소리

 

그래서 출판공동체 편않은 5년간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시도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가. 성공한 적은 없는 것 같고 다만 더 낫게 실패하기만을 바랐는데, 이건 어느 정도 달성했을까? 우리에게 절실했던 것은 ‘결과로서의 좋은 책’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좋은 출판’이었는데, 과연 우리는 잘 해온 것일까?

 

일단,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이하 〈편않〉)라는 제호의 이 잡지는 반년간지다. 가격은 없다. 이 정도 분량, 이 정도 품질에 무료라니? 그것도 5년 넘게 계속 만들고 있다니? 의아하다는 반응과 아주 약간의 걱정 섞인 조언들이 있었다. 아주 당연하고 바라던 바였다. 모든 게 상품이 되어 버린 이 낡아 빠진 구세계에서 무가지(無價紙)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 라는 심정. 잡지를 계속 만드는 한, 앞으로도 가격은 없을 것이다.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0~7호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0~7호

 

 

0호는 창간 준비호였고, 1호부터 7호까지 호수별 주제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디자이너/비평/출판 노동 3부작(예비 출판인-출판 노동-탈출판)/서점. 그리고 최근 1년 남짓 만에 8호를 온라인판으로 발행했다. 주제는 ‘∞(무한대, 우리의 팔자)’. 이처럼 여러 주제로 ‘편않’을 발행했으나 여기서는 4호부터 6호까지 이어졌던 출판 노동 3부작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고 싶다(참고로 잡지의 거의 모든 콘텐츠는 홈페이지에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방문해 주시기를 바란다.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은 콘텐츠는 모두 게재하였다.).

 

이 기획은 무려 1년 반이 걸린 (모두가 생업이 있으니 여기에만 매달린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틈틈이 만든 반년간지를 세 개 호나 할애했다는 의미에서) 나름 장기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계속 고민했던 노동에도 당연히 전사(前史)는 있을 것이고, 언젠가 벗어나는 순간도 있을 터였다. 그 순간들을 담고 싶었다. 기획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고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4호를 준비할 때 진행했던 ‘예비 출판인의 밤’이라는 행사에서 만난 당시 편집자 지망생이 이제 3년차 편집자가 되어 〈편않〉에 기고한 순간 앞에서는. 5호에 실린 「1년 후, 1374089」이라는 글이 여전히 출판계 관련 단톡방에서 종종 언급되는 순간 앞에서는. 누군가 다른 출판 관련 잡지에 비해 〈편않〉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많이 실어서 너무 좋다고 말해 준 순간 앞에서는. 그저 과분할 뿐이고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을 따름이다.

 

민주주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했다던가? 그 말을 따라, 그리고 조금 바꾸어 나는 몫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찾고 싶다고 감히 말한다. 그걸 ‘몫소리’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저 담아 두고만 있는 말들, 마음들. 거기에 소리를 입히고 활자에 실어 나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몫이 아닐까? 여기서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을 호명하고 싶지는 않은데 자꾸만 그가 떠오른다…… 서발턴(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듣고 말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다시, 책은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하며 또 무엇일 수 있을까. 요사이 자주 되뇌는 하나의 명제이다. “책은 개체가 아니라 공동체다.” 철학자 고병권 선생이 쓴 『북클럽 자본』이 작년에 한국출판문화상 편집 부문을 수상했는데 그때 고 선생이 개인 SNS에서 한 말이다. 오랫동안 공동체 활동도 많이 했고 코뮤니즘 관련한 책도 많이 썼지만 저 책들을 쓰면서 특히 더 기획자,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봤다고 한다. 책은 저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이라는 깨달음, 하나의 책은 n개의 작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전적으로 공감하고 나 역시 언제부턴가 생각해 왔던 사실이다. 그런데 저 말을 저자 아닌 사람이, 가령 나 같은 사람이 한다면? 많은 작가들은 콧방귀를 뀌거나 분개할 것이고 대부분은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책이 네 거라고? 어디 감히.” “아니요, 선생님. 우리 거라고요.” “뭐라는 거야, 참 나.” “…….”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음 직한 대화. 하지만 점점 사라지기를 바라는. 어쨌든 나는 이렇게 믿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책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믿고 말할 수 있는.

 

자리 없는 이들의 자리, 우리

 

그리하여 책은 그리고 출판은 우리의 자리다. 우리가 머물다 만나고 또 헤어져 흐를 수 있는. ‘편않’을 수식하면서 ‘편않’이 지향하는 ‘출판공동체’라는 표현은 이런 함의를 담고 있다. 출판을 통해 만났고 출판하며 만남을 유지하지만, 출판이 전부는 아니며 전부여서도 안 된다고 동지들 역시 믿고 있을 거라 나는 믿는다. 어쩌면 출판은 구실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과정이 중요하므로 목표와 결과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느 때고 방점은 ‘출판’이 아니라 ‘공동체’에 찍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 자리를 마련했다. 대담, 세미나 등등도 준비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펺파’가 제일 ‘놀자판’이 아니었을까 싶다. ‘편않 파티’의 준말인 ‘펺파’는 일종의 출판기념회인데, 편않 편집진과 필자 그리고 독자(읽지 않은 비독자도 환영!)가 모여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술을 마시며 노고를 치하했고 또 술을 마시며 새로운 기획을 도모하기도 하였다(어쨌든 술은 참 많이도 마셨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꽤 오래 중단되었는데, 이제 슬슬 다시 추진해 볼 참이다.

 

최근에 런칭한 언론·출판인 에세이 시리즈 “우리의 자리”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싶다. 나는 이 시리즈를 ‘기레기’라는 오명이 자연스러워진 언론인들, 늘 불황이라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는 출판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기획했다. 욕먹어 싸더라도 그들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니까. 구조적인 문제로만 탓을 돌리기엔 개개인이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이들을 비난하고 조롱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빠르게 망가질 것이다. 소명할 건 소명하고 반성할 건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래서, 그럼에도, 이제는 다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시리즈 중 한 권인 『박정환의 현장: 다시, 주사위를 던지며』의 ‘펺집자 코멘터리’에 적었다(다른 두 권의 제목은 『손정빈의 환영: 영화관을 나서며』와 『고기자의 정체: 쓰며 그리며 달리며』이다. 앞으로 언론인뿐 아니라 출판인들도 망라하여 시리즈를 이어 갈 생각이다.).

 

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 몫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위한다고 해놓고 언론인과 출판인들의 이야기를 듣겠다? 그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름이 없는가? 아니면 목소리가 없는가? 이러한 비판이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우려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고작 이 정도 와 놓고 자리 없는 이들의 자리를 자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감히 그리고 용감히, 그렇게 되고 싶다고 다짐한다. 앞으로 더 고민해 보겠다.

 

누군가는 물었다. 왜 계속하느냐고, 어떻게 계속할 수 있느냐고. 나는 답했다. 계속해보기 위해서 계속한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미처 적히지 못한 이름들을, 발화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그리고 자리 잡지 못한 자리들을 우리는 끝내 모를 것이다. 그 끝내 모름이 우리를 계속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해 볼 수밖에는 없다.

 

+ 이것은(이) 우리의 손이다

 

얼마 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데, 특히 얼굴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기서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또 따로 말할 기회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 작가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 전시’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의 얼굴에는 이름이 자리할까? 빈자,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그럴 리가. 지난해 어쩌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우리의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쩌면 우리의 얼굴은 우리의 책이었을까? 그나마 돌아볼 만한, 귀 기울일 만한.

 

이번에는 우리의 손을 찍었다. (이 글이 나왔을 때는 이미 끝났겠지만) 제14회 언리미티드 에디션 참가를 위해 우리는 ‘인물 사진’을 제출해야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얼굴 아닌 초상(肖像)을 찾았다. 바로 우리의 손, 노동하는, 교섭하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의 손. 이것이야말로 처음이자 끝,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책이 결과라면, 손은 과정이겠지. 그리고 우리의 책을 보고서야 누군가는 겨우 우리 손을 볼 짬이 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제야 우리의 책이 궁금한가?

 

우리의 손

우리의 손

 

 

 

 

*
서발턴(Subaltern)이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출처: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70776.html)

 

지다율

지다율 출판공동체 편않 에디터

오랫동안 ‘시 쓰는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시도 기사도 쓰지 못했다. 지금은 출판공동체 편않에서 책을 만들며 저널리즘스쿨 & 공부공동체 오도카니를 운영하고 있다.
editors.dont.ed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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