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향

Vol.44  2023. 06.

게시물 상세

 

‘2023 아시아 어린이 콘텐츠 축제’,
사자의 도시 싱가포르에서 열리다

 

 

 

김태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케이북콘텐츠팀)

 

2023. 06.


 

서울 정도의 크기에 인구 5백만 명을 조금 웃도는, 적도 근처의 더운 섬나라 싱가포르. 공용 언어가 무려 4개로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가 대중교통과 공공장소마다 사이좋게 쓰여 있다.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고, 중국인이 많으며,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된 데다, 같은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출신도 많이 거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서로 다른 언어만큼 종교 또한 다양해 십자가와 불상, 히잡과 터번이 섞여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나라가 바로 싱가포르다.

 

2023년 런던도서전 개막일 전시장 입구 모습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의 화합을 다룬 싱가포르 홍보 영상(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라운지)

 

 

하지만 각기 다른 언어와 종교 때문에 다툼이 발생하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인종, 종교, 전통이 섞인 가운데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하나 되기를 선택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머라이언(Merlion, 사자 머리에 물고기 몸을 가진 조형물)’ 역시 서로 다른 문화권 속에서 다툼 없이 상징으로 삼을 만한 것으로 협의하여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마실 물도 확보하지 못해 이웃 나라에서 사야 할 정도로 가진 자원은 없지만, 국민 소득은 아시아 최고인 나라도 싱가포르. 그 배경에는 교육과 사람에 대한 투자가 뒷받침되었다고 하겠다.

 

올해 방문한 아시아 어린이 콘텐츠 축제(Asia Festival of Children’s Contents, 이하 AFCC)에서 싱가포르의 책에 대한 자세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AFCC는 싱가포르 도서 위원회(Singapore Book Council, 이하 SBC)가 주관하고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 Board)이 개최하는 행사로, 한국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방문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6층 규모의 거대한 국립도서관 건물은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시내에 분관도 여러 곳 있다고 했다. AFCC 메인 행사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열람실로 보이는 곳의 넓은 책상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새롭게 배치된 올림피아 전시장 내부(좌),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전시장 내부(우) 모습

(좌) AFCC 메인 행사장, (우) PLAZA 전시 및 행사 부스

 

 

SBC는 본래 독립 자선 단체로, 1968년 싱가포르 국립도서개발협의회(National Book Development Council of Singapore, NBDCS)를 통해 설립되었다. SBC는 창의성, 상상력, 독창적 사고, 공감 능력을 개발하여 ‘상상-국가(Imagine-Nation)’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SBC의 프로그램들은 창의적인 글쓰기, 읽기, 일러스트레이션, 번역 및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SBC가 2000년 아시아 아동 작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콘퍼런스(Asian Children’s Writers & Illustrators Conference, ACWIC)로 시작한 행사를 2010년 본격적으로 AFCC로 탈바꿈하여, 올해로 14회째를 맞이했다. AFCC는 싱가포르 국립 번역 위원회뿐만 아니라, 영국의 아트 펀드, 한국, 미국, 프랑스의 대사관, 독일, 대만, 중국의 문화/어학 기관 등 해외 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이제는 운영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는지 행사장마다 관계자들, 자원봉사자들까지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출판 비즈니스를 위한 비용 증가’ 세미나

(좌) 프로그램 북, 2023년 주제 ‘PLAY!’, (우) 프로그램 직후, QR 코드로 관객의 피드백 의견을 받고 있다.

 

 

올해 AFCC의 주제는 ‘Play!(놀이/재생/연주)’였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주제 선정이었다고 생각한다. ‘Lit up!(불 붙여!, 2022년)’, ‘Reimagine, Rebuild, Reignite(다시 상상해, 다시 만들자, 다시 붙여, 2021년)’, ‘Voyages(여행, 2020년)’. 최근 AFCC가 선정한 주제이다. 팬데믹 상황으로 침체에 빠져 다소 의기소침했던 어린이 콘텐츠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AFCC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양질의 아시아 이야기 창작, 개발 및 감상을 장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매년 5월 마지막 주 목요일~일요일 개최를 기본으로 진행된다. 콘퍼런스 프레젠테이션, 패널 토론, 마스터 클래스, 워크숍, 강의 및 무료 공개 프로그램 라인업으로 4일간 프로그램이 꽉 차 있다. 일반 참관객 외에도 300~400여 명의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전문가와 마니아가 모여 이루는 분위기는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연사로는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외에도 번역가, 편집자, 출판사 담당자, 학자, 교사, 사서, 학부모들이 참여한다. 이처럼 AFCC는 다양한 실무자들이 만나 배우고 기술을 연마하며 문화 간 협력 개발 기회를 주고받는 아시아의 독특한 행사이다. 올해는 110여 명의 연사가 AFCC에 참여해서 다양한 이력을 바탕으로 각 분야의 활동 내용을 공유했다.

 

‘출판 비즈니스를 위한 비용 증가’ 세미나

2023 AFCC에 참여한 한국의 이억배 작가(좌), 이지원 작가(우)의 프로그램 모습

 

 

한국에서는 올해 작가 2명이 연사로 참여했다.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사계절, 2016), 『봄이의 여행』(이야기꽃, 2019), 『솔이의 추석 이야기』(길벗어린이, 2017) 등의 그림책으로 유명한 이억배 작가와, 폴란드어 전문 번역가 겸 큐레이터 이지원 작가가 각각 3개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억배 작가는 전통과 추억, 목적 있는 글쓰기, 형식과 스타일 실험에 관한 대화를, 이지원 작가는 이미지의 언어, 번역가의 역할, 세계 문학 독서의 이유에 대해 참가자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질문과 관심이 끊이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올해 AFCC의 ‘초점 국가(Country Of Focus)’는 베트남이었다. 지난 14회 행사 동안 필리핀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태국, 올해 베트남까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초점 국가로 AFCC를 찾았다. 대한민국은 2025년 싱가포르와의 수교 50주년을 맞이하여 초점 국가로의 참여를 제안받고 현재 논의 중에 있다.

 

‘출판 비즈니스를 위한 비용 증가’ 세미나

2023 AFCC의 초점 국가였던 베트남의 부스(좌), 베트남의 아동 도서 시장 소개 모습(우)

 

 

초점 국가는 해당 국가의 어린이 콘텐츠 및 시장 현황 등에 관해 소개할 기회를 갖는다.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자국 콘텐츠를 전시할 수 있는 작은 부스도 꾸밀 수 있다. 또한 주제나 상황에 따라 여러 활동을 할 수도 있으며, AFCC 기간 중 하루는 ‘초점 국가의 밤’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올해 토요일 저녁에 진행된 행사에는 싱가포르의 문화공동체청소년부(Ministry Of Culture, Community And Youth) 장관도 방문했는데, 이 자리에서 베트남은 번역된 아동도서 출시회를 가졌다. 베트남 역시 올해가 싱가포르와의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초점 국가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내년에는 초점 국가를 따로 정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SBC 측은 밝혔다.

 

싱가포르 서점에서도 다중 언어 국가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곳은 일본의 대형 글로벌 서점인 ‘키노쿠니야(Books Kinokuniya Worldwide)’의 싱가포르 Bugis Junction 지점이었다. 키노쿠니야는 ‘준쿠도(Junkudo)’와 마찬가지로 해외 진출에 열을 올린 일본의 대표 서점 브랜드이다. 서가의 도서 분류는 크게 3개 언어(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의 콘텐츠가 다양한 이유도 있겠지만 일본 브랜드의 서점이기 때문에 서가에 일본어 서비스가 제공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여러 언어가 공용어이기에, 일반적으로 장르, 연령뿐만 아니라 언어까지도 기본적인 분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시장이 싱가포르 도서 시장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연간 600권 이상의 도서를 발간한다는 한 출판사 대표는, 싱가포르에서는 보통 같은 도서의 영문판과 중문판을 함께 내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책에 따라 대상 독자를 나누어 생각한다는 취지였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영어판 표지가 게시된 블룸스버리 월페이퍼

(좌) 영문과 중문으로 구분된 싱가포르 서점, (우) 싱가포르 관련 어린이 도서

 

 

자국의 고유 문자가 있으면 책의 범위가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같은 언어라도 유럽 프랑스와 캐나다 퀘벡에서의 프랑스어처럼 지역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용 범위가 더 큰 언어권의 문자를 받아들인다면 더 큰 문화의 유입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언어에 따른 문화의 고유한 정서는 아무래도 자국의 고유 문자를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어린이 도서 코너에서는 캐릭터 관련 도서들이 주를 이뤘는데, 싱가포르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책이 영문판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출판 콘텐츠를 해외에 판매하기 위해 출판 저작권 설정 계약을 할 때, 보통 발간 언어뿐만 아니라 발간 지역도 함께 정한다. 같은 도서라 할지라도 지역을 한정하면 같은 언어판으로도 여러 시장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번역된 언어라면 새로운 시장에 도서를 발간할 때 그 지역에 맞게 약간의 감수 정도만 거치면 되기 때문에 부가적인 번역료가 발생하는 새로운 언어권 발간보다는 진출이 쉬울 것이다.

 

아시아 국가이기에 한자도 익숙하지만, 영어를 기반으로 하고, 중국과 이슬람 문화가 이질적이지 않게 섞인 낯선 나라 싱가포르. 단, 비싼 물가와 다양한 규제들(경고판에 적혀 있던 지하철 내 음식물 취식 시의 벌금 안내는 더운 날씨에도 서늘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시사철 더운 날씨는 익숙해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카야 잼 토스트와 우리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은 이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다양한 문화가 낯설지 않은 싱가포르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무역과 금융 못지않게 수많은 도서와 교육 콘텐츠들이 서점과 도서관, 대학들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영어판 표지가 게시된 블룸스버리 월페이퍼

싱가포르 서점 내 아시아 문학 코너, 언제나 반가운 한국 도서도 눈에 띈다.

 

 

김태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케이북콘텐츠팀

 

해외동향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