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향

Vol.28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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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의 숲에 펼쳐진 무라카미 원더랜드,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

 

 

 

강소영(KPIPA 일본 코디네이터)

 

2021. 12.


 

터널 모양의 계단 책장


터널 모양의 계단 책장

 

지난 10월 무라카미 하루키(72)의 작품 세계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 와세다 대학에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 현지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로 통한다. 2019년 무라카미가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 친필 원고, 책, 음반 등 약 1만여 점의 소장품을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와세다 대학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연구와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거점으로 삼고자 조성한 곳이다. 위치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무라카미가 영화 시나리오를 탐독하기 위해 즐겨 찾았던 연극박물관 옆 4호관.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쿠마 켄고가 리모델링을 맡고, 유니클로의 모기업 일본 패스트리테일링의 회장 겸 사장인 야나이 다다시가 130억에 달하는 개축 비용 전액을 쾌척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즌이면 일본 열도가 수상을 염원해 마지않는 작가의 기념관은 어떤 인상일까? 개관과 동시에 하루키스트들의 순례지가 된 이 특별한 라이브러리의 모습을 담아봤다.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
맨 오른쪽부터 건축가 쿠마 켄고,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 겸 사장,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출처. 마이니치 신문, 사사키 준이치 촬영)

 

일상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터널

 

지난 9월에 열린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쿠마 켄고는 2년 전 자신이 평소 경외하던 작가로부터 직접 설계 의뢰를 받았을 때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보통의 건물에 무라카미 문학의 이미지를 입힐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무라카미의 많은 작품이 일상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해 터널 구조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건물 외관


건물 외관

 

실제로 본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첫 인상은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하얀색 상자가 캠퍼스 한 가운데 툭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풍스러운 주변 풍경과는 이질적인 지상 5층의 건물. 그것을 터널 모양의 목제 오브제가 둘러싸고 있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목제 오브제를 지나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지하 1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단 책장과 마주하게 된다. 계단 양쪽에는 2층 높이의 책장이 아치 모양의 천장 구조물과 이어져 있어 마치 터널이나 동굴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가자 평범한 일상에 미묘하게 나 있는 틈새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딛는 무라카미 문학의 감각이 느껴진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책장에 꽂힌 책들도 자연스럽게 시선에 들어온다. 책장에 꽂혀 있는 1,500권의 도서는 기획 전시의 일부로 테마에 맞춰 정기적으로 교체된다. 책의 선정과 진열은 북디렉팅으로 유명한 BACH에서 맡았다. 현재 계단 책장의 전시 테마는 「현재부터 미래로 연결하고 싶은 세계 문학 작품」과 「무라카미 작품과 그 연결 지점」이다. 그 중 「무라카미 작품과 그 연결 지점」展은 무라카미 작품 속 키워드에서 파생된 다양한 의미를 세계 각국의 도서로 보여주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키워드의 난이도가 평이해지도록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계단 책장과 계단 책장에 전시된 책들


계단 책장과 계단 책장에 전시된 책들

 

『1Q84』의 리틀 피플을 연상시키는 피규어들


『1Q84』의 리틀 피플을 연상시키는 피규어들

 

계단 책장 곳곳에는 『1Q84』의 리틀 피플을 연상시키는 피규어들이 이곳이 자신들의 세상인 양 여유롭게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들 틈에 섞여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계단 책장을 지나 어느 새 두 개의 달이 뜨는 무라카미 원더랜드에 들어와 있음을. 문학관 자체가 무라카미 작품 세계를 깊이 체감하도록 설계된 장치였던 것이다.

 

지하 1층,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공간

 

계단에서 ‘먹는다’의 키워드로 분류된 책장을 살펴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커피 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학생들이 운영하는 카페 ‘오렌지 캣’이 있다. ‘오렌지 캣’이라는 이름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전 도쿄에서 아내와 함께 운영했던 커피숍 ‘피터 캣’에서 따왔다고 한다. 카페 라운지에는 ‘피터 캣’에 놓여 있던 그랜드 피아노와 무라카미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연극으로 상연했을 때 사용했던 무대 장치도 있었다.

 

카페 ‘오렌지 캣’


카페 ‘오렌지 캣’

 

‘피터 캣’에서 실제 사용했던 그랜드 피아노, 『해변의 카프카』 연극 상영 때 사용한 무대 장치


‘피터 캣’에서 실제 사용했던 그랜드 피아노, 『해변의 카프카』 연극 상영 때 사용한 무대 장치

 

카페 옆에는 무라카미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레코드 플레이어와 의자는 무라카미가 기증한 것이고 나머지 가구와 소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업실에 있는 것과 최대한 비슷한 모양으로 구했다고 한다. 입실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작업실에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 즐거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재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재

 

1층, 50개 언어로 번역된 3,000권의 무라카미 작품과 개인 기증 자료로 채워진 아카이브

 

1층 갤러리 라운지에는 무라카미가 작가로 데뷔한 1979년부터 2021년까지의 작품이 연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모두 무라카미가 기증한 책으로 대부분 초판본이다.
반대편 책장에는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무라카미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무라카미의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무라카미가 기증한 초판본 전시,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무라카미 작품을 모아놓은 책장


무라카미가 기증한 초판본 전시,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무라카미 작품을 모아놓은 책장

 

갤러리 한 가운데에는 기다란 책상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전시된 책을 꺼내서 읽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갤러리 벽에는 무라카미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양 사나이가 앉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1층 갤러리 전경, 갤러리 벽면의 무라카미가 직접 그린 양 사나이


1층 갤러리 전경, 갤러리 벽면의 무라카미가 직접 그린 양 사나이

 

1층에는 갤러리 라운지 말고도 오디오룸이 있어 무라카미가 평소 즐겨 듣던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오디오 시스템의 선정과 세팅은 오디오 평론가이자 전 《스테레오 사운드》 편집장 오노데라 코지가 담당했다. 재즈 애호가로 알려진 무라카미의 오디오룸답게 색소폰 연주, 소니 롤린스 등 다양한 재즈 레코드가 눈에 띄었다.

 

오디오룸


오디오룸

 

2층, 폭넓은 문화 교류와 발신이 이루어지는 공간

 

스튜디오와 대형 연구실


스튜디오와 대형 연구실

 

1층이 연구를 위한 공간이라면 2층은 교류와 발신의 공간이다. 2층에는 음향 설비를 갖춘 스튜디오가 있는데 무라카미가 2018년부터 DJ를 맡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RADIO’의 스튜디오와 비슷하게 꾸며 놓았다고 한다. 스튜디오 바로 옆에는 대형 연구실도 있어 문학 워크숍이나 세미나도 개최할 수 있다.

 

2층 전시실 「건축 속의 문학, 문학 속의 건축」展


2층 전시실 「건축 속의 문학, 문학 속의 건축」展

 

2층의 전시실에서는 개관을 기념하여 「건축 속의 문학, 문학 속의 건축」展이 열리고 있었다(2022년 2월 4일). 와세다 대학 캠퍼스 구 4호관이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도면과 모형을 통해 들여다보는 전시다. 이곳에서는 앞으로도 무라카미 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내용의 기획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공간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기념관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무라카미가 와세다 대학의 건립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위기의 시대에 어떠한 공동체를 시작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개관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코로나로 미래를 낙관하기는 어렵더라도 이상은 있어야 한다며 그런 것을 보여주는 일이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또한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이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신선하고 독특한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정문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정문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는 엄숙한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찬 공간이다. 전시된 도서는 모두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고 옆에 있는 사람과 무라카미 문학과 문학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배움은 호흡하는 것과 같다는 무라카미의 평소 소신대로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하 1층 외부 전경


지하 1층 외부 전경

 

젊은이들의 방황과 상실감을 섬세한 감성과 리드미컬한 문체로 그려냈던 무라카미도 어느덧 칠순을 넘긴 노작가가 되었다. 목소리가 없는 작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작가라며 한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시대 공감’이 깃들어 있는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 정문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지었다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

 

『物語を拓こう、心を語ろう』
(Explore Your Story, Speak Your Heart)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모토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모토

강소영


강소영(KPIPA 일본 코디네이터)

일본 수출코디네이터. 현지에서는 일본그림책교류회(日韓絵本交流会)의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화 이벤트 기획을 하고 있다.
lunakang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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