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향

Vol.35  202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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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출판 동향]
고(高)물가 시대, 스페인 출판 시장의 위기

 

 

 

이민재(KPIPA 스페인 수출코디네이터)

 

2022. 8.


 

벌써 6달째 계속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식료품 공급 위기가 이어지는 등 유럽 경제의 악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스페인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다. 지난 3월, 스페인 국립통계연구소(INE)가 잠정 집계한 물가 상승률은 무려 9.8%로 1985년 5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객관적 수치가 이러하니 체감으로 느끼는 물가 수치는 더욱 높게만 느껴진다. 식료품, 의약품과 같은 생활필수품은 물론이거니와 외식비, 여가생활비, 각종 공산품 등 모든 품목의 가격이 올라 시쳇말로 ‘월급 빼고 다 올랐다’라는 말이 실감된다.

 

그렇다면 이런 고(高)물가 시대가 스페인 출판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가격이 눈에 띄게 오른 시장의 다른 품목과 달리 의외로 도서의 가격 상승폭은 매우 미미하다. 스페인 국립통계연구소가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 도서의 가격 상승폭은 문학 도서 1.4%, 비문학 도서 0.7% 상승으로 전체 물가 상승률에 훨씬 못 미쳤다. 또한 소장용이 아닌 실용성을 강조한 포켓 도서의 경우 가격 상승이 거의 없었다.

 

도서가 다른 품목들보다 현재 경제 악재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처럼 스페인 역시 제지의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공급 부족으로 최근 몇 개월간 종이책 출판 위기가 여러 번 대두된 바 있다. 현지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출판용 제지 가격은 최근 약 15~30% 상승한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장 많이 오른 품목 중 하나인 자동차 연료 가격 및 유통 비용 역시 출판 시장에 직격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판된 도서를 서점에 보급하기 위해선 유통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황이 안 좋은데도 스페인 출판사들이 소비자 가격을 최대한 유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도서를 구매하는 소비자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깨지 않기 위해서이다. 스페인 독립출판사 씨셀리(Cicely)의 발행인 디아나 씨는 이 심리적 마지노선을 20유로(한화 약 2만 7천 원)라고 설명한다. 도서 가격이 20유로를 넘기는 순간 소비자가 구매를 망설이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스페인 출판인 조합연맹(FGEE)이 공개한 스페인 도서 평균 가격은 20유로 미만으로 최근 5년간 상승률도 매우 적은 편이다.

 

 

최근 5개년(2015-2019) 스페인 도서 평균가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도서 평균가 €14.52 €14.74 €14.66 €13.96 €14.15
전년비 상승률 +1.6% +1.5% -0.5% -4.8% +1.4%

* 자료원: 스페인 출판인 조합연맹(FGEE) 보고서

 

 

이런 소비자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깨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은 서점가도 마찬가지이다. 소비자들이 도서의 높은 가격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는 순간, 당연히 서점의 매출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어서, 아직까지 스페인 출판 시장의 가격 상승률이 높지 않은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로 스페인이 시행하는 도서 정가제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2007년에 발효된 스페인 도서 출판에 관한 법률(Ley 10/2007, de 22 de junio)에 의거, 모든 도서는 소비자 판매가를 정하여 그 가격을 책의 겉표지에 인쇄 표기하여야 하며 책의 판매는 표기된 정가의 95%에서 100% 내에서만 해야 한다. 즉, 최대 할인 폭을 5%로 제한한 것이다. 책의 정가를 표지에 인쇄 표기해야 하다 보니 이미 인쇄된 책의 가격을 최근 시장 상황이 급변하였다 하여 쉽사리 바꾸기도 어렵다.

 

한편, 각 출판사별 사정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특정 주제나 마이너한 시장을 공략하는 도서를 주로 다루는 독립출판사나 소규모 출판사들의 경우 물가가 올랐다고 도서 가격 상승을 감행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정적인 소비자를 타깃으로 하기에 자칫 섣부른 가격 상승이 이 한정적인 소비자들의 지갑마저 닫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주제의 도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 도스 비고떼스(Dos Bigotes)의 관계자 알베르또 로드리게스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독자 확보를 위해 우선은 현재의 물가 상승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최대한 출판사 마진을 줄이는 쪽으로 버티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출판사에서 가격을 고수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인쇄 비용을 최대한 아끼는 수밖에 없다. 더 저렴한 가격의 종이를 찾고 표지 두께를 줄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자구책을 시행하기에 중소 출판사의 고충은 대형 출판사보다 더욱 크다. 출판사 까비딴 스윙(Capitan Swing)의 발행인 다니엘 모레노 씨는 종이의 절대적인 수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더 유리한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원자재 납품 회사들이 가격을 담합하거나 판매량을 제한하고 있으며 구매를 많이 하는 대형 출판사에는 좋은 가격으로 납품하면서 오히려 중소 출판사에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쇄 비용을 줄이는 단기적 자구책을 뛰어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친환경적인 소재로 자체 인쇄소를 운영하는 중소 출판사 에라따 나뚜라에(Errata Naturae)와 같은 곳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유럽의 여러 경제 악재들로 당분간 고(高)물가 상황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늦어도 올 하반기부터는 스페인 서점가의 도서 가격도 결국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도서 가격 상승이 직접적으로 독자의 구매욕을 줄어들게 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 물가 상승이 도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거의 시장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 일어나고 있는 점이라는 데서 더 큰 위기론이 대두된다.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모두 오르는 상황에서 여가 생활을 위한 도서는 구매자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중소 독립서점과 출판사들의 줄폐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스페인 출판 시장의 우려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상황이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디지털 출판물 비율을 높이면 어떨까?

 

현재 도서 가격 상승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종이 원자재 가격 상승과 유통 비용 상승을 모두 만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은 바로 전자책, 오디오북과 같은 디지털 출판물의 비율을 높이고 독자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스페인은 디지털 콘텐츠의 불법 공유 비율이 매우 높은 국가로 특히 이 중에서도 도서의 불법 무료 다운로드 비율이 가장 높다는 데 있다.

 

스페인 출판인 조합연맹(FGEE)이 지난해 조사하여 발표한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 습관 및 불법 다운로드 현황〉 자료에 따르면 가장 많이 불법 무료 다운로드한 콘텐츠는 ‘도서’로 약 33%의 소비자가 불법으로 디지털 출판물을 접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6%인 영화나 25%를 기록한 음악보다도 더 높은 수치이다.

 

 

스페인 개인 소비자의 2020년 디지털 콘텐츠별 불법 다운로드 현황

도서 영화 음악 신문 축구 중계 드라마 비디오게임 잡지 악보
33% 26% 25% 25% 23% 21% 20% 18% 5%

- 표 안의 비율은 해당 콘텐츠를 불법(무료)으로 접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한 개인의 비율임
* 자료원: 스페인 출판인 조합연맹(FGEE) 보고서

 

 

현실이 이러하니 디지털 출판물로 콘텐츠를 선회한다고 해도 출판사의 이익이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며 현재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 독립출판사의 경우, 오디오북 등 초기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콘텐츠로 판매 방향을 전환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지만 본격적인 엔데믹 분위기와 더불어 지난 4월 세계 책의 날을 기점으로 도서 관련 오프라인 행사가 성대히 개최되며 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올 5월 27일 스페인 왕비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던 스페인 최대 도서 축제, 마드리드 도서 박람회는 21세기 들어 가장 큰 규모로 개최되었다. 축구장 약 120개가 들어설 수 있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마드리드 시내 대형 공원 레띠로(Retiro)에서 야외 행사로 열렸던 이번 도서 박람회에는 총 378개의 스탠드가 세워지고 400개의 회사와 기관이 전시자로 참가했다. 개최에 따른 총 예산은 138만 유로(한화 약 18.5억 원) 수준이다.

 

과연 출판사들의 마진을 줄이고 인쇄 비용을 낮추는 자구책을 통한 도서 가격 상승 억제와, 기관과 국가가 주도하는 대형 도서 행사들이 고(高)물가로 지친 시민들의 발길을 계속해서 서점가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지는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출처: 스페인 출판인 조합연맹(FGEE) 보고서 및 현지 언론 종합

 

 

〈글로벌 출판 동향〉 출처

https://www.kpipa.or.kr/export/businessView.do?board_id=140&article_id=130643&pageInfo.page=&type_id=&search_cond=&search_text=%EC%8A%A4%ED%8E%98%EC%9D%B8&list_no=14

 

 

 

 

 

미국·유럽·아시아·중남미 등 13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KPIPA 수출 코디네이터'의 [글로벌 출판 동향] 보고서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바로가기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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