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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  202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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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한국 소설 경향

 

 

 

최재봉(〈한겨레〉 선임기자)

 

2022. 12.


 

2010년대 중반 ‘미투’ 물결 이후 뚜렷해진 현상 중 하나는 남성 작가들의 위축이다. 말과 행위만이 아니라 작품 속 묘사에 대해서도 여성 혐오나 성인지 감수성 미비, 더 나아가 성폭력 혐의까지 제기되면서 남성 작가들이 신작을 발표하거나 책을 출간하는 데에 소극적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어서, 미국에서도 가령 ‘남성 작가는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섹스를 묘사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진지하게 토론 주제에 오를 정도였다. 박금산의 소설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2020)는 오늘날 작가 자신과 같은 남성 작가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곤경과 그 극복 노력을 아프고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정아은의 연작 소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2021)와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2021)은 여성 작가가 남성과 여성의 관점을 오가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파고든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2022년 한국 소설 트렌드를 살펴보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 까닭이 있다. 올해 출간된 주요 소설들을 일별해 보니, 글 앞머리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남성 작가들의 위축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성 작가들이 시대 변화에 적응해 가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페이스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가능해 보인다. 특히 장년층이라 할 60, 70대 남성 작가들의 선전이 돋보였다.

 

올해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작가라면 아무래도 김훈을 들어야 하겠다. 김훈은 6월 초에 『강산무진』 이후 16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내처 8월 초에는 신작 장편 소설 『하얼빈』을 선보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기자 출신 작가인 김훈은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잡지에 연재하며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 온 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른바 ‘문단 문학’과 거리를 두고 독자와 직접 만나는 방식을 택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문단이라는 게 실체가 희미하고 모호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춘문예라는 등단 절차라든가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주어지는 주요 문학상에서 장편보다 중단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등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문단이 단편 쪽이라면 독자는 장편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훈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에는 그가 처음 쓴 단편 소설로서 권위 있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화장」과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언니의 폐경」 그리고 표제작을 비롯해 빼어난 단편 작가로서 김훈의 역량을 보여주는 여덟 단편이 실렸더랬다. 다시 그렇지만, 김훈은 역시 단편보다는 장편에 열심이어서 『강산무진』 이후 여러 장편을 내는 한편 드문드문 단편을 발표해 오다가 2022년이 되어서야 두 번째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를 묶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표제작인 「저만치 혼자서」와 「저녁 내기 장기」, 「대장 내시경 검사」 같은 작품들은 대체로 작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주인공들을 내세워 저물녘에 바라보는 삶의 풍경을 관조하고, 내남없이 죽음이라는 고독한 운명을 마주해야 하는 동료 인간들을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하얼빈』은 작가가 오래도록 준비하고 고민해 온 작품인데, 최근에 겪은 건강 문제 때문에 서둘러서 완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김훈의 일산 작업실에는 안중근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 액자가 오래전부터 걸려 있었다. 김훈의 출세작이라 할 『칼의 노래』가 대학 시절에 읽은 『난중일기』에서 왔다면, 『하얼빈』 역시 그가 대학 시절에 접한 안중근의 신문조서가 씨앗 구실을 했다. 죽음을 앞둔 청년 안중근의 당당한 태도와 동양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무려 반 세기가량 작가의 머릿속에서 발아와 성장을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소설이 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작가는 특히 두 청년 안중근과 우덕순이 한껏 가볍고 단순하게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것을 그리는 데에 주력했노라고 밝혔다.

 

김훈 작가의 『저만치 혼자서』와 『하얼빈』

김훈 작가의 『저만치 혼자서』와 『하얼빈』(출처: 문학동네)

 

 

정찬의 장편 『발 없는 새』에서 베이징 특파원인 ‘나’는 영화배우 장궈룽(장국영)의 자살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가 영화감독 첸카이거를 만난다. 그에 앞서 그는 가상의 인물인 중국 재야 사학자 워이커씽을 만나는데, 그는 난징 학살을 다룬 연구서를 출간한 뒤 일본 우익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역사학자 아이리스 장, 무용가 최승희 등을 주인공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난 소설들에서 5·18 광주 학살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사의 폭력과 그 극복 가능성을 탐구해 왔던 정찬은 이번 작품에서도 난징 학살과 문화 혁명의 비극이 노정한 역사의 비극적 폭력성을 줄기차게 문제 삼는다.

 

대하 소설 『빙벽』과 정치 가상 소설 『최후의 계엄령』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년의 인기 작가 고원정이 15년 만에 신작 장편 『샛별클럽연대기』와 시집 『조용한 나의 인생』을 들고 복귀를 신고했다. 『샛별클럽연대기』는 1960년대 시골의 한 국민학교(초등학교) 동창들의 반세기에 걸친 이야기를 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반장선거 장면에서 시작한 소설은 주인공들의 중·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거쳐 장년기까지 유장하게 이어지며, 2019년 11월 현재의 상황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앞뒤를 감싸는 형식이다. 여러 인물의 오랜 시간을 담느라 소설은 과감하게 시간과 상황을 건너뛰며 서술되는데, 그것이 형식적으로 느슨하면서도 묘한 압축과 긴장미를 유발한다.

 

이순원의 장편 『박제사의 사랑』은 작가가 30년 전에 발표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에 이어지는 작품이다. 『은비령』과 『수색, 그 물빛 무늬』 같은 작품들에서 단아한 서정의 세계를 그려 왔던 작가가 드물게 시도해 본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박제사의 사랑』은 동물 박제 일을 하는 주인공이 아내의 자살 이후 그 까닭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 추적은 주인공이 죽은 경주마를 박제하는 작업과 나란히 진행되는데, 죽음에 맞서 생전의 가장 아름다웠던 형태 및 순간을 되살리려 한다는 점에서 두 행위는 닮았다. 조용호의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이 80년대 시국 사건 조작과 의문사 같은 역사의 아픔을 그리움의 정조 위에 녹였다면, 고광률의 장편 『성자의 전성시대』는 당대 한국 사회의 문제로 대두된 교회의 타락과 정치화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문단의 허리급에 해당하는 40·50대 남성 작가들도 모처럼 신작을 내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김영하는 전자책으로 먼저 발표했다가 대폭 개작을 거친 SF 장편 『작별인사』에서 인간과 인공 지능, 죽음과 불멸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장강명은 두 권짜리 장편 『재수사』에서 20년 전 살인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기자 출신 작가다운 꼼꼼한 취재가 돋보였다. 김연수는 9년 만에 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비관과 비극을 넘어서는 이야기의 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김연수의 고향 친구인 김중혁은 소설집 『스마일』과 장편 『딜리터』를 잇따라 내놓으며 꾸준한 필력을 과시했다. 단편들에서 그는 죽음과 비극에도 웃음으로 대응하는 힘을 그렸고, 장편은 김중혁다운 초능력의 세계를 소재로 삼아 평행 우주에 관한 발랄한 상상력을 펼쳐 보였다. 이기호는 연작 짧은 소설집 『눈감지 마라』에서 지방 사립대 출신 두 청년이 생활인으로 홀로 서고자 분투하는 모습을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어 그렸다. 김경욱은 소설집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에서 자신이 쓴 소설을 소재로 삼아 글쓰기의 본질을 문제 삼는 메타 소설적 시도를 선보였다.

 

『발 없는 새』, 『샛별클럽연대기』, 『박제사의 사랑』, 『작별인사』

『발 없는 새』, 『샛별클럽연대기』, 『박제사의 사랑』, 『작별인사』(출처: 창비, 파람북, 시공사, 복복서가)

 

 

어쩌다 보니 남성 작가들 이야기를 앞세우게 됐지만, 2022년 소설 분야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꾸준히 이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추천하는 등 문단 바깥에서도 화제를 낳은 정지아의 장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최고의 한국 소설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자전적 소설로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그동안도 빨치산 출신 부모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설로 발표해 왔다. 이번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보고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삼았는데, 이념과 목적 너머에 그것들보다 한층 본질적이며 숭고한 가치가 있으니 그 이름이 곧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설득력 있게 그려 보인다.

 

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와 전경린의 『굿바이 R』, 조경란의 『가정 사정』은 어느덧 현역 여성 작가 최고참 급에 이른 세 작가 각각의 개성과 장점을 가감 없이 보여준 소설집들이었다. 조남주와 손원평은 일본 등 해외에서 한국 소설의 인기를 이끌고 있는 작가들이다. 조남주의 연작 소설 『서영동 이야기』는 서울의 부도심으로 설정된 서영동의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당대 보통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다시피 하는 부동산 투기 열풍과 그 그늘을 극사실적으로 그린다. 손원평의 『튜브』는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낙담했던 인물이 새로운 태도와 각오로 삶에 임하면서 벌어지는 변화를 추적한다.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과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 김혜진의 『경청』이 돌봄과 경청이라는 여성적 가치로 현실의 난국을 타개하려는 이들을 등장시킨다면, 서수진의 『유진과 데이브』는 한국 여성과 호주 남성의 연애 과정에서 불거지는 문화적 차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한정현의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작가 특유의 문화사적 접근법으로 소수자의 잊힌 삶을 복원하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한은형의 『레이디 맥도날드』는 방송으로도 소개되었던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은 소설로, 인텔리 출신 노숙인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한편 품위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장미의 이름은 장미』, 『서영동 이야기』

『아버지의 해방일지』, 『장미의 이름은 장미』, 『서영동 이야기』(출처: 창비, 문학동네, 한겨레출판)

 

 

지금까지는 편의상 성별 및 연령대별 구획을 통해 2022년 한국 소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그런 생물학적 구분과는 별개로 장르적 구분을 통해 올해의 소설계를 들여다보자.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SF 소설들은 이 장르가 짧은 시간에 한국 소설의 핵심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김영하의 『작별인사』는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1955년에 창간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지이자 이른바 ‘정통·순수’를 대표한다고 할 수도 있을 월간 〈현대문학〉이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가 대표로 있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와 손을 잡고 잡지 게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낸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작가 20명이 참여한 SF 앤솔로지다. 이 책에도 참여한 황모과의 장편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SF와 판타지를 오가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 풍조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천선란의 소설집 『노랜드』와 중편 단행본 『랑과 나의 사막』 그리고 박문영 장편 소설 『세 개의 밤』도 한국 SF의 저력을 이어갔다.

 

판타지 역시 SF에 못지않게 최근 한국 소설의 지배적 장르 내지는 경향으로 부상했다. 세계적 권위를 지닌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는 신작 소설집 『여자들의 왕』에서 기존 텍스트들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틀고 뒤집어,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의 적극적·주체적 면모를 그려 보인다. 이밖에도 앞서 소개한 김중혁의 『딜리터』를 비롯해 박서련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와 조예은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 등이 판타지의 장르적 특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성과로 꼽힌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여자들의 왕』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여자들의 왕』(출처: 현대문학, 아작)

 

 

청탁 취지에 맞추어 특정 트렌드로 분류하기에 적합한 작품들을 꼽다 보니 딱히 그런 분류에 해당하지 않아 누락된 작품들이 몇 보인다. 『저주토끼』와 함께 부커상 인터내셔널 1차 후보에 올랐던 『대도시의 사랑법』의 작가 박상영은 신작 소설집 『믿음에 대하여』에서 이제 30대가 되어 사회에 편입한 인물들의 직장 생활과 부동산 광풍, 코로나 사태 등 한결 일상적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금희의 연작 소설집 『크리스마스 타일』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삼은 따뜻한 그리움의 이야기들을 담았고, 조우리의 연작 소설집 『이어달리기』는 중년 레즈비언 성희와 일곱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손보미의 장편 『사라진 숲의 아이들』은 살인 사건을 뒤쫓는 방송 피디와 경찰관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조명한 작품이다. 임솔아가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서 한결 깊고 넓어진 시선을 보여주었다면, 신예 작가 이미상은 첫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에서 과감한 형식적 시도와 전복적 시선으로 젊은 패기를 과시했다. 이렇게 2022년 한국 소설은 지난 성과를 바탕 삼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고 하겠다.

 

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

1992년부터 〈한겨레〉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쓴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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