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0 2023. 02.
[편집자의 길 -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수상자 연재 ①]
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2023. 02.
편집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자각하다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게는 대학 졸업 당시의 최우선적인 취업 방침이었다. 그런 내게,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첫 출판사로 한길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자 운명이었다. 무엇보다 학창 시절 책으로 접했던 저자들을 직접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행운’이 편집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운명’임을 절감하면서 그 즐거움을 탐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한길사의 저자군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 핵심 저자들의 총본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그들은 철학과 역사학, 사회학을 중심으로 한 나의 개인적인 지적, 학문적 관심사를 풍부하게 채워주고 새로운 어젠다(agenda)를 던져주곤 했다.
하지만 신출내기 편집자에게 한길사는 거대 조직이었고 저자도 수백 명에 달했다. 자연스레 많은 책의 저자들을 알게 되고 책을 기획하면서 책의 세계에 한 발짝 더 들어갈 수 있었지만, 깊이 있는 학문 세계로의 진입은 좀처럼 힘들었다. 베테랑 편집자였으면 요령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이겠지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과정에 있던 나로서는 해가 갈수록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쨌든 8년을 그렇게 초심을 잃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바탕으로 첫 출판사에서 책의 세계를 기획과 편집 중심으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습득한 것은 이후의 편집자 생활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출판사가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니, 총 30여 년을 편집자로 일해오고 있다. 이전 출판사에 비해 규모는 매우 작지만 책 만들기의 즐거움은 지금 출판사에서 더 만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 역자들과의 대면 접촉의 기회와 그 소중함 그리고 지속성 측면에서 나는 언제나 흥분되어 있다. 2년여 전쯤에 새롭게 알게 된 신진 학자와의 2시간 동안의 만남은 지금껏 맛보지 못한 흥분을 주었고, 그와 헤어진 후 약속 장소였던 강남 교보문고 주위를 1시간여 동안 배회하기도 했다. 지금껏 알지 못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즐거움 그리고 지금껏 우리 학계에서 비어 있던 부분을 ‘책’으로 채워 넣게 되었다는 안도감 등이 그 흥분의 발원지였다.
김상봉, 김덕영, 안재원 선생과의 만남: 편집자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역할
그런 만남 가운데 김상봉 교수(전남대학교, 철학)와의 25년여의 관계는 내가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책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가 지금 연구하는 주제 그리고 그의 관심 분야를 좇아 지금의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가 머물던 제주 우거(寓居)에서의 밤샘 토론을 비롯해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와의 40시간 대담을 묶어 펴낸 책(『만남의 철학』, 2015)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책을 둘러싼 ‘책담(冊談)’을 만들어왔다. 서양 고전 중에서도 중세사상과 중세사 그리고 그 범위를 넓혀 이슬람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까지 관심 분야가 넓어진 것도 그와의 숱한 만남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그가 지난 4년여 전부터 연구해온 결실이 200자 원고지 10,000매 분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 곧 최종 원고를 넘기겠다고 연락이 왔다. 김 교수의 학문 여정의 중간 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번 책(『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2권 주해』)은 우리 철학계는 물론 출판계에도 의미 있는 준거점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론사회학자 김덕영 교수(카셀대학교, 사회학)와의 만남 역시 그러하다. 매달 한 번씩은 꼭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번역의 어려움과 한국 근대성 문제에 대한 저술 계획 등을 두서없이 주고받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게오르그 짐멜 선집(전 10권)』과 『막스 베버 선집(전 10권)』 등을 기획하고 묵직한 번역서 『돈의 철학』(게오르그 짐멜, 2013)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2010)을 비롯해 사회학 입문자에게는 필독서 역할을 하는 『막스 베버: 통합과학적 인식의 패러다임을 찾아서』(2012)와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2007) 등이 세상에 나왔다.
아울러 편집자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각별한 만남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전문헌학자 안재원 교수(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와의 인연이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학문 분야일 수도 있지만, 서양의 문헌학(philology)은 서양 학문의 모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즈음 방식의 분과학문 체계에서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바탕은 무엇보다 텍스트의 중요성과 그 엄밀함을 학문의 토대로 둔다는 데 있는데, 이것을 나는 출판 편집자에게도 반드시 요구되는, 아니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이러한 인식은 서양 문헌학의 언어적 토대인 라틴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나는 라틴어-우리말 대역본 번역(『수사학』(키케로, 안재원 옮김, 2006),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크리스티안 볼프, 이동희 옮김, 2019), 『6일간의 세계 창조에 대한 강연』(보나벤투라, 박주영 옮김, 2019), 『존재자와 본질』(토마스 아퀴나스, 박승찬 옮김, 2021) 등)과 이탈리아어-우리말 대역본 번역(『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곽차섭 옮김, 2015)으로 고전 번역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25년 넘게 연구실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했던 이화여자대학교 최성만 교수(독문학)와의 『발터 벤야민 선집(전 15권)』과 부산 출장의 즐거움을 르네상스 담론과 마키아벨리 정치사상 강의(!)로 지적 충격을 주는 부산대학교 곽차섭 교수(서양사) 그리고 일군의 저자가 몰려 있는 군산대학교 선생들과의 만남 등 나는 책에 관해서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지적 여행의 발걸음을 언제든 마다하지 않고 즐겨왔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저자와 역자의 연구실 서가에서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책을 영접하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게 될 때에는 서울로 올라오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궁벽한 연구실 한쪽에 처박혀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 생소한 연구 주제로 책과 씨름하고 있는 저자를 발굴해 내는 즐거움에 나는 항상 촉수를 쫑긋 세워두고 있다. 서울이나 지방, 주제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면 그것을 ‘책’의 공적(公的) 영역으로 불러내는 것, 그것을 나는 인문/사회과학 학술 편집자의 중요한 자세이자 기능이라고 스스로 인식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젊은 신진 연구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 학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사실상 대학의 기능이 지금처럼 위기에 빠진 적이 없고 학문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대학원 기능 역시 유명무실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그래도 악전고투를 통해 조금씩 자신의 역량을 튼실하게 결실 맺어온 그들이 있기에 향후 초토화될 수도 있을 우리 학문의 미래를 견인할 학문적 단초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투키디데스(Thucydides), 리비우스(Titus Livius),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Boethiu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요하네스 페캄(John Peckam), 파라켈수스(Paracelsus),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등 우리 학문 분야에서 속히 채워져야 할 부분들을 묵묵히 연구, 번역해 오고 있다.
요즘과 같이, 통신 매체가 발달한 시대에 일일이 저자와 역자를 만나러 발품을 파는 것이 시간을 비롯해 체력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 그들의 공부방과 연구실을 ‘굳이’ 찾아가 그 속에서 책 이야기와 연구 주제에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서너 시간,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지적 미로를 같이 탐색하는 과정 속에 책에 대한 아이디어는 물론 다음 책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자연스레 쌓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책에 대한 착상이 떠오르는 순간, 전공자가 누구인지를 수소문하거나 조사해 표적(!)을 발견하는 순간 수화기를 든다. 그 아이디어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간에, 책과 관련한 생각과 이야기, 자료는 반드시 언젠가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
근대 출판 역사 속에서의 편집자 정체성 문제
이상과 같이, 나는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난 30여 년 가까이 실무적 경험을 통해 나름 축적해 왔다. 하지만 내가 항상 궁금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편집자’라는 위상이 정립되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인류가 언어와 문자를 만든 이래, ‘편집’이라는 기능은 같이 결부되었을 것이다. 책의 형태를 상고시대로까지 끌어 올려보면 그것은 동굴의 벽화에서부터 점토판 그리고 파피루스, 양피지까지 무수한 시간적 퇴적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형태로서의 책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것은 결국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이후라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 구텐베르크 이후부터 16세기까지 책과 관련된 역사서를 집중적으로 섭렵하고 있다. 즉 (근대적 의미에서의) 책의 시원 속에서 ‘편집자 상(像)이 어떻게 정립되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안재원 교수와의 만남 속에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16세기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에 대한 책(『알두스 마누티우스: 세계를 편집한 최초의 출판인』, 마틴 로리, 심정훈 옮김, 2020)은 직접 내 손으로 펴낸 바 있고, 올해 초에 필사본 시대의 중심인물로 피렌체에서 활동한 베스파시아노(Vespasiano)를 다룬 『피렌체 서점 이야기』(로스 킹, 최파일 옮김, 책과함께, 2023)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시대 종교개혁 과정 속에서 출판이 어떻게 역사와 맞물려 독일 출판 600년 전통을 만들었는지를 다룬 『루터, 브랜드가 되다』(앤드루 페트그리, 김선영 옮김, 이른비, 2022) 등을 숙독했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명쾌한 답을 스스로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0여 년 전쯤에 내 스스로 책을 만드는 행위에 대해 ‘3A(Aufklärung, Aura, Agenda)’로 규정해 왔는데, 어느 정도 이들 책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에 부합하는 답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자문해 본다. ‘계몽’의 구체적 사례는 마누티우스의 출판 행위를 통해, ‘아우라’는 베스파시아노의 필사본 작업을 통해, ‘어젠다’는 루터의 시대적 소명을 출판 매체를 통해 구현해 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이것들을 확인받았다.
편집자가 평생 가져가야 할 숙명적 질문
경험적으로나 이론적, 역사적으로 나는 아직도 스스로 편집자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아니, 내가 책을 마지막으로 만드는 순간까지도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자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편집자라는 인이 몸속 깊숙이 박힌 내게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편집자로 살아가는 내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라고 스스로 단정을 짓고는 한다. 특히나 내 몸도 기계가 아닌 이상, 나 역시 책 만드는 일이 힘들거나 의기소침해지는 때가 있고, 그럴 때일수록 정체성 문제는 어김없이 머릿속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중간 점검일 수도 있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일 수도 있는데, 결국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내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경험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것과 스스로의 공부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 본다. 즉 언제나 편집자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공부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196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유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길사에 입사해 기획과 편집, 홍보 업무를 주로 담당했으며, 2003년부터 현재의 도서출판 길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해 오고 있다. 한길사에서 ‘한길그레이트북스’와 ‘한길신인문총서’, ‘한길로로로’, ‘한길크세주’ 등을, 도서출판 길에서는 ‘코기토총서: 세계사상의 고전’을 비롯해 ‘인문정신의 탐구’, ‘프런티어 21’, ‘역사도서관’ 시리즈 등을 기획했다. 2008년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선정한 ‘올해의 출판인’ 편집 부문, 2022년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7~2022년까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로도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