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 2020. 08.
[에세이]
박훌륭(아직 독립 못 한 책방 대표, 약사)
2020. 08.
해가 잘 들지 않는 서향에 위치한 약국. 9년째 이 작은 약국을 운영 중인 약사가 있다. 글쎄, 평소에는 책을 엄청 많이 읽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책방을 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편해 보이는 약국을 굳이 뒤로 제쳐두고 한 약사가 책방에 더 신경을 쓰는 이유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푸른약국의 외부 모습
오후 4시경 책방에 햇빛이 비치는 모습
약국과 책방의 조합은 어떻게 탄생했나
누구나 본인만이 알고 있는 weak point가 있다. 한글로 ‘약점’이라고 쓸 수 있겠지만 weak point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약한 부분이라는 의미라기보다 지나치게 나를 감성적이고 예민하게 만드는 그런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나에게는 책에 관한 일종의 향수가 있는 것 같다. 엄청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책에 관한 추억이 넘쳐나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도 온갖 위인전과 문학 전집이 있었다. 어릴 적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렇게 전집을 사거나 책을 사서 책장에다 꽂아놓곤 했으니까. 우리 집에 다른 점 하나가 있었다면 그런 책들이 있었음에도 아버지가 나에게 만화책을 사다 주셨다는 것이다. ‘보물섬’이라는 제목으로 두툼하면서 다양한 만화가 들어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게 알고 보면 상당히 의아한 상황인데, 책을 읽히고 싶어하면서 만화책을 때마다 사다준다니?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나는 만화책을 그리 즐겨보진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 만화책을 즐겨보면 책을 안 읽는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그건 정말 아이의 성향 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더 깊게 들어가면 부모 유전자의 영향이 오히려 더 클 지도 모른다. 만화와 전집 사이에서 살아남은 나는 중학교 때 이우혁의 『퇴마록』 시리즈와 민음사에서 나온 『삼국지』, 『수호지』에 빠져서 시험기간에도 몰래몰래 참고서 보듯 봤다. 그로 인해 수호지 108명의 호를 외우는 지경에 이르는 입선(立仙)의 문턱에 다다랐다.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본 책은 『수학의 정석』이었고 대학교에서는 전공 서적을 가장 많이 봤다.
어떤가? 약국을 하며 책방을 시작한 사람의 특이할 만한 점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의 전형적인 ‘코스’에 따라 자랐다. 책방을 하는 것은 이 코스의 종점 근처에 있는 휴게소와 같은 행위이다. 사람들은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하는데 내 경우에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그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 같다(물론 이것만 한 건 아닐 것이다).
느려도 천천히 해나가는 것이 목표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약칭 아독방)’은 처음에 책방의 정체성보다 독자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책방을 차리긴 했지만 나는 ‘읽는 사람’이었다. ‘파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적었다. 책방을 오픈하면서 동시에 인스타그램을 개설했는데 거기에도 내가 읽은 책 리뷰를 주로 올렸다. 정말 독자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우리 책방이 SNS상에서 차츰 알려지기 시작하며 책방으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북토크를 한다든지 외부에서 약국 안의 책방이라고 알고 찾아 오신다든지… 거북이처럼 여유를 가지고 (그런데 진짜 거북이는 여유가 있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느린 것인가?) 차근히 해나가는 것이 내 목표라면 목표라서 남들 다 하는 북토크도 1년이 지나서야 시작했고 책방에서 운영하는 독서 모임은 아직도 없다. 독서 모임은 내가 진짜 꾸려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시작하려 한다.
그럼 우리는 무얼 했느냐? 정말 독자로서 소임을 다했다. 자체 서평단을 꾸린 것이다. 내가 읽고 좋았던 책을 추천하며 다 같이 읽는 식으로 서평을 진행한다. 처음엔 일주일에 1회 정도 진행했으나 많이 진행할 때는 일주일에 세 개씩 할 때도 있다. 책 관련 이벤트가 너무 많아서 이벤트 계정을 따로 꾸리기도 했다. 내게 정말 안 맞는 책은 서평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바쁘더라도 서평하려는 책은 꼭 읽어보고 진행하겠다는 원칙을 정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서평을 한다는 것은 굳이 아독방에서 할 이유가 없는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평을 진행하는 출판사는 대부분 작은 규모의 출판사여서 이런 출판사와의 콜라보는 너무 즐거운 일이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모자란 측면을 채워주는 콜라보는 항상 대환영이다. 우리 서평단에 참여하는 분들은 소위 책 좀 읽고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리뷰를 읽는 재미도 있다. 이거야 말로 즐기면서 일하는 것 아닐까.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책방을 운영하다 보니 이런 소소한 즐길 거리들이 있었다.
독립? 아직 못 한 게 아닌, 영원히 안 할 것
그러면 책방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떨까? 각종 이벤트로 채워진 나날들을 지나 어느덧 1년. 1주년 행사를 마치고 나서 아독방만의 북토크인 ‘아편책(아주 편한 책이야기)’을 시작했다. 대망의 1회 행사에 김연수 작가님이 오셨다. 『시절 일기』가 나온 시점이었는데 북토크를 진행하는 책방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공간이어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흔쾌히 와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북토크에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따로 진행자가 있는 북토크였기 때문에 우리 책방의 북토크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었다. 행사 진행은 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다행히 김연수 작가님은 내가 굳이 진행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준비를 해오셨다. PPT 자료를 보여주시고 책 한 꼭지를 낭독까지 해주셨다. 첫 발을 내딛는 내 입장에서 어찌나 고마웠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뒤 염승숙 작가님, 윤고은 작가님, 김혜진 작가님, 황현진 작가님, 이병률 시인님, 요조 작가님, 임경선 작가님, 문보영 시인님 등을 모시고 아편책을 진행했다. 많이 모자란 여건과 진행에도 흔쾌히 오셔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가신 작가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어떤가? 책방으로의 정체성에 특이한 점이 있을까?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여느 서점이나 하는 북토크이고 다른 활동은 거의 안 하기 때문이다.
아주 편한 책이야기. 일명 아편책 1회 현장. 김연수 작가님 『시절일기』 북토크
아편책 3회 현장. 윤고은 작가님의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북토크
독자와 책방으로서 정체성을 갖추어 나가며 운영을 하고 있는 아독방에는 따로 보았을 때 특별한 점이 없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보면 어떨까? 독자와 책방 사이를 지속적으로 넘나들며 정체성이 섞이는 곳. 내 추측인데 독자로서의 특징을 가진 책방이라는 점이 우리 책방 단골 손님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 것 같다. 책이라는 물건은 공산품이라 모두 똑같다. 작건 크건 어떤 책방에도 같은 책이 들어간다. 결국 책방만의 특징이 있어야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 사이에서 단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 책방의 특징은 내가 ‘찐독자’라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런 찐독자인 서점 대표들이 많이 있다. 본인이 읽은 책만 들여놓고 판매하는 곳들. 그런 곳이 책방이 독자인 곳이다. 그런 점이 작은 책방에 좋은 특징으로 작용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책방이 많이 생기고 많이 없어지는 때라고들 한다. 뭔가가 생기고 없어지는 건 유행을 타서 그러기도 하지만 원래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요식업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약국과 병원도 그러한데 책방이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타 업종에 비해 이윤이 극히 적고 주인장의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이젠 막연히 ‘언젠가 책방을 여는 게 내 꿈이에요.’라고 할 만한 시대는 지난 것인지도 모른다. 꿈은 꿈으로 남겨두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아독방은 2주년을 앞두고 있다(솔직히 20년은 운영한 것 같은 기시감은 든다). 8월 1일이 만으로 2년이 되는 때인데 사실 갈 길이 멀고도 멀다. 많은 조상님 책방들이 있고 우리도 열심히 따라가야 한다. 단순히 따라가는 것으로는 가랑이 찢어질 것이 자명한 시대에 난 무얼 더 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아직 독립 못 한 채로 영원히’이다. 그 말은 더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는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고 하고(『말하기를 말하기』, 김하나) 누군가는 준최선을 생활화하라고 한다(『준최선의 롱런』, 문보영).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말들과 비슷한 의미다. 『더 해빙』에 보면 이런 문장도 나온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아독방의 모토와도 비슷하고 아독방 주인장인 내 좌우명과도 비슷한 말인데, 내 감정과 행동을 먼저 컨트롤 하라는 의미로 쓴다. 앞만 보고 노력만 줄곧 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이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이 정도 결과가 안 나오면 어쩌지?’ 등등 사람이라면 ‘부정이’의 공격을 수시로 받을 것이다. 아예 마음을 놓자. 좀 내려놓으면 된다. 그럼 오히려 결과가 더 잘 나오고 과정도 재미있다. 내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긴장도 스트레스도 좀 내려놓으면 된다. 매출이나 결과는 생각보다 내 준최선과 최선의 차이를 많이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간에 넘어져서 낭비하는 시간을 생각하자. 넘어지지 않고 오래 뛰는 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떤 상점에서도 아독방을 만나게 되길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weak point를 ‘약점‘으로 정의해보면 아독방의 약점은 어이없게도 약국이다. 태생 자체가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이라서 약국이 없다면 책방도 없다는 것이 약점이 된다. 내가 이 약점을 없애지 못하지만, 이걸 독자와 손님들이 커버 해주도록 당당히! 빌어야 한다. “도와주세요”라고. 동네서점이 대부분 그렇지만 아독방은 유난히 유대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SNS상에서 수많은 이벤트에 친구들을 소환하면서 놀았던 초창기부터,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같이 즐기며 도와주었고 지금도 도와주고 있다. 그런 우연한 인연들이 책방의 필연적인 요소가 되어 함께 이곳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책방에서 낸 책인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시리즈도 그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독자들이 참여하여 쓰고, 읽은 책이니까.
푸른약국과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의 공존
푸른약국 내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의 모습
우리 책방은 유명한 다른 책방들에 비해서 손님층이 얇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예쁜 책방에 비해 구경하는 맛도 ‘전혀’ 없다. 단지 우연한 인연에서 필연적인 관계로 발전할 확률이 조금 높은 정도? 그리고 필연적인 관계가 된다면 작가든 독자든 내가 놓지 않는다는 정도? 어느 책방보다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사이사이에 우연과 필연이 섞여 에너지를 공급하는 책방. 그곳이 아독방이다. 나는 독자들에게서 영원히 독립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전국 각지에 여러 종류의 ‘아직 독립 못 한 책방’들이 생기면 더욱 좋겠다. 미용실에도 네일숍에도 키즈카페에도 레스토랑에도 슈퍼에도 빵집에도. 그곳들에서 책을 들고 읽어보고 한 권씩 사서 나오는 풍경을 그려본다. 박훌륭(아직 독립 못 한 책방 대표, 약사) 재밌는 것만 꾸준히 합니다. 360일 이벤트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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