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2 2023. 04.
[편집자의 길 - 제1회 한국출판편집자상 수상자 연재 ③]
이경아(도서출판 돌베개, 편집부 부장)
2023. 04.
편집자도 주 종목이 있습니다
편집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던 제가 편집자의 길로 들어선 건 우연이었습니다. 솔출판사의 “나랏말ᄊᆞᆷ” 시리즈를 편집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학비를 벌겠다는 심산으로, 편집이 뭔지도 모르면서, 겁 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석사학위를 받고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을까 아니면 일본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갈림길에서 타진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여놓은 길이 올해로 25년이 되었으니,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나 봅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 믿고 덜컥 입사했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그런 저를 선배님들은 인내심(!)을 갖고 가르쳤습니다. 빨간 펜 선생님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도 제가 낸 책은 실수투성이였고, 늘 참담한 반성과 다짐이 이어졌습니다.
책도 유행을 타고 편집자도 유행을 탑니다. 처음 출판사에 입사한 때는 한국 고전문학 관련 책들이 제법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도 나오고, 우리 고전을 읽는 분위기도 제법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가 엄청나게 팔렸고, 요즘은 과학, 수학, 음악, 영화 등의 다양한 분야들이 ‘인문’이라는 한 단어에 뭉뚱그려진 인문 에세이가 대세입니다. 자연스럽게 한국학 편집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독자에게도, 또 회사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분야를 옮기기도 어렵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그런 걸까요. 분야를 옮기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동안 한국한문학을 중심에 두고 조금씩 주변을 건드려 보고, 범위를 넓혔지만, 결국 제 주 종목은 한국한문학입니다.
‘편집자의 길’을 얘기하는 이 칼럼에서 생뚱맞게 주 종목 이야기를 서두로 꺼낸 이유는, 편집자마다 저마다의 길이 있고 색깔이 있는데, 요즘은 그 길이 옅어지고 얕아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문’으로 억지로 묶인 분야 속에서 흉내를 낼 수 있고 어쩌면 잘될 수도 있지만, 심지가 없는 불은 곧 꺼집니다. 많은 길을 밟아 보고 경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에게는 자신만의 심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 편집자만 잘해서 될 일인가요? 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살아 있는 책을 만들어서 좋습니다
책이 살아 있다니 좀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든 책은 살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그래서 만들 때마다 많이 긴장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명체입니다.
2018년에 출간한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박희병, 돌베개, 2018)은 두 권으로 만든 능호관 이인상의 서화에 대한 비평, 분석집입니다. 돌베개에 입사한 해부터 박희병 교수님이 이 책을 준비 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제 담당이 아니라 흘려들었습니다. 이후 이 책은 자연스럽게 제 담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고는 여전히 집필 중이었습니다. 저자는 능호관의 서화가 발견될 때마다 그곳이 어디든 달려갔고, 그 모든 자료들을 분류하고, 번역하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작업을 계속 해 나갔습니다. 이러다가는 책을 못 내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묵혀 둔 원고가 20년 만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초고 작성에만 3년이 걸렸고, 초고를 고치고 다듬고 보완하는 데 다시 3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최종고를 출판사에 넘긴 지 3년여 만에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니 웬만한 단행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력이 들어간 것입니다. 색인 작업에만 꼬박 한 달을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탄생한 책은 롯데출판문화대상 제1회 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뒤 새로운 능호관의 서화가 발견되었고, 저자는 즉시 2쇄에 그 서화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1쇄 출간 이후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의 면수도 늘었습니다. 한 달을 꼬박 매달린 색인 작업도 다시 해야 할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책은 앞으로도 능호관의 서화가 발견되면 언제든 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
2009년에 김혈조 교수님이 완역한 『열하일기』(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를 출간했습니다. 세 권으로 만들었고, 본문에는 역자가 직접 답사하며 찍어 온 중국의 사진들을 많이 수록했습니다. 정확한 번역과 생생한 도판에 힘입어 이 책은 초판 9쇄까지 찍고 2017년에 개정판을 내고도 쭉 스테디셀러로 잘 팔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매쇄마다 발생했습니다. 역자는 매쇄마다 사진 교체를 요구했고, 심지어 새로운 〈열하일기〉 판본이 발견되면서 번역의 수정도 매쇄 요구했습니다. 이전의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판본들과의 대조 결과 새로운 번역이 더 정본에 가깝다는 역자의 판단이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장 수정보다 더 큰 문제는 사진 교체였습니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는 압니다. 이미 출간된 책의 도판을 매쇄 교체하면서 판면의 레이아웃을 흔드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판면이 흔들리면 색인 페이지도 흔들립니다. 하지만 역자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스러웠습니다. 역자는 책을 출간한 이후로도 계속 중국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 찍은 사진을 가져오셨습니다. 코로나19가 역자의 발을 묶지 않았다면 어쩌면 개정판인 지금도 이 책은 계속 도판 교체를 할지도 모릅니다. 책을 한 번만 사 보는 독자는 모르지만 편집자는 압니다. 이 책이 매쇄 어떻게 변했는지. 그래도 틀린 책을 파는 건 아니니 안심해도 됩니다.
『열하일기(1~3)』
2022년 1월 10일 김명호 교수의 『열하일기 연구』(김명호, 돌베개, 2022)를 출간했습니다. 정확히는 수정증보판입니다. 이 책의 초판본을 처음 접한 건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입니다. 중·고등학교처럼 참고서가 딱히 없는 터라,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몰라 이것저것 진학하려는 대학 교수님의 논문과 저서들을 섭렵하던 중 이 책을 읽었습니다. 무슨 전공서가 그리도 술술 읽히는지요. 읽는 데 아마 3일도 안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던 대학원에 입학해서 김명호 교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까다로운 분이라 논문 지도교수 기피 대상 1호였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덜컥 선생님께 배우겠노라 했습니다. 논문 원고는 가져가는 즉시 빨간 줄이 죽죽 그어졌습니다. 교정·교열까지 마친 제 글들을 보면서 ‘와! 정말 함부로 글을 쓰는 게 아니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
편집자가 되고 나서 선생님 책이 절판된 걸 알았습니다. 왜 더 이상 안 내시냐고 여쭈었더니 구식 활판 인쇄본이라 원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선배 한 분이 스승의 날 선물로 이 책을 입력해서 드리자고 제안했습니다. 특별한 날이라고 챙기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는 교수님에게 맞춤 선물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한 부분을 맡아 입력했습니다. 그러고서도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원고가 제게로 왔습니다. 원고를 보내시며 “이걸로 내 〈열하일기〉 연구는 끝입니다”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선생님은 ‘30대의 신진학자였던 당신과 시공을 초월하여 학문적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책을 만들면서 좌충우돌 방황하던 저의 20대를 돌아보았습니다. 이 책은 초판의 논리가 더욱 보강되었습니다. 특히 32년간의 연구 성과가 본문 곳곳에 녹아 있고, 이 책을 집필하며 〈열하일기〉의 새 판본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앞으로 재쇄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열하일기 연구』
세 분 저자의 책을 예로 들었지만, 이외에도 제가 만드는 책의 많은 저자들이 매쇄마다 최선을 다해 수정하고 또 수정합니다. 새로운 자료를 찾았다고, 이 문장이 앞의 문장보다 더 낫다고 수정하자는데 어떻게 마다할까요. 이미 출간한 책이라고 관심을 끄지 않고, 계속 애정을 갖고 수정하고 또 수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지만 기쁘게 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는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저의 저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엉덩이 무게로 주는 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한국출판편집자상 금상 수상은 뜻밖의 영예이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과분하다는 생각에 내가 받아도 되는 상인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상 소감으로 가장 먼저 저의 편집자 선배님들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몇 분의 선배님들이 앞서서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편집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약 이 상이 그 전부터 있었다면, 그분들이 받았어야 합니다. 제가 이 상을 받은 건 순전히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제 엉덩이 무게 때문입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의 출판문화 또한 ‘계승’의 고리가 약합니다. 뛰어난 분이 많지만, 대부분 끝까지 현역 편집자로 뛰지 못하고 외주자로 지내거나 자기 회사를 차립니다. 그만큼 오래 자리를 지키며 책을 만들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전 행운입니다. 우리의 출판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20대부터 60대까지 촘촘하게 현업에서 뛰는 편집자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내내 기댈 선배가 없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저 또한 그런 선배가 못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백발을 휘날리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일본의 편집자가 부러웠습니다. 현역으로 근무하고 은퇴했다는 그분들을 보며, 우리나라도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우리는 그 대신에 역량 있는 편집자가 자기 회사를 차립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색깔로 뛰어난 책들을 만들어 냅니다. 고여 있지 않고 개척해 나가는 실력 있는 많은 편집자들이 그만큼 경영의 전선까지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출판편집자상 2회부터는 이런 편집자 사장님들, 그리고 실력 있는 외주자 분들이 이 상을 받을 후보로 추천되면 좋겠습니다. 이 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편집자만을 위해 제정된 의미 있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자리를 지켰다고 해서 받기에는 과분한 큰 상입니다. 우리 출판계에는 실력 있는 편집자가 정말 많습니다. 이건 자랑입니다.
평생 질문하고 배우지만 여전히 실수투성이입니다
한문 원문을 일일이 번역문과 대조하던 어느 날, 제 모습이 독 짓는 늙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하면 본전이요, 못하면 독박인 이 일을 목과 어깨를 망가뜨려가며 왜 이러고 있나 싶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책을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지만, 사실 그건 욕심입니다. 그저 ‘기술자’로 남지 않겠다는 소망을 담은 말입니다. 끝없는 원전 대조, 방대한 주석과의 씨름, 줄지 않는 색인어 찾기 등 절대적인 시간이 들어가는 업무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책을 꾸준히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편집자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성껏 만든 책은 독자가 외면하지 않습니다. ‘넓지만 얕지 않은, 깊지만 치우치지 않은’ 책을 만들자! 이게 제 목표입니다.
하지만 목표는 높고 현실은 초라합니다. 책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배울 것들이 넘쳐납니다. 아마도 이래서 저는 저자가 못 되고 편집자가 되었나 봅니다. 제대로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려면, 저자만큼은 아니라도 그 언저리라도 닿도록 관련 지식을 공부해야 합니다. 중국어 공부는 몇 년째 하고 있지만, 실력이 도통 늘지 않습니다. 지식의 바다는 넓고 깊습니다. 늘 공부하지만, 그래도 실수합니다. 완벽하게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애써 저자 핑계를 대보지만, 결국 최종 책임은 편집자가 집니다. 이런 마음의 짐을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에 기대어 위로받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처음처럼』(신영복, 돌베개, 2016) 중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저의 저자이기도 하고, 또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고,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편집자로 책만 만들어 내는 기술자가 아니라, 이 시대에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리하고, 또 제대로 만들기 위해 늘 배우는 것이 편집자로 살아가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을 때 ‘고독한 편집자’를 쓰라고 들었지만, 딱히 고독하지 않습니다. 편집자만 고독한 건 아닐 겁니다. 고독한 미식가도 있습니다.
이경아 도서출판 돌베개, 편집부 부장 1998년 2월 출판계에 들어와 솔출판사에서 편집을 배웠으며, 일빛출판사에서 편집과 제작을 겸하는 팀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2003년 9월, 돌베개 출판사에 입사해 재직 중이다. 대표 작업 도서로 『열하일기(1~3)』(김혈조 옮김), 『연암집(상·중·하)』(신호열·김명호 옮김), 『연암을 읽는다』(박희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박희병), 『열녀의 탄생』(강명관),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김명호),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신영복),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신영복), 『노무현 전집(전7권)』(노무현), 『자본론 공부』(김수행), 『정본 백범일지』(도진순 교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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