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7 2021. 11.
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①
이용남(한성대학교 명예교수)
2021. 11.
치열했던 엄대섭의 꿈
엄대섭은 한마디로 가슴에 옹골진 꿈을 품고서, 이를 위해 한평생을 불사르며 달려온 인물이다. 청소년 시절 돈벌이의 꿈을 실현하고서는 새로운 인생 사업으로 ‘독서 및 도서관’ 운동의 거대한 꿈을 좇아 평생 치열하게 살아왔다. 20대까지는 돈벌이의 신동으로, 30대부터는 사립 공공도서관 설립 운영, 한국도서관협회 재건(초대 사무국장), 40대부터는 전국 단위의 마을문고 보급 운동, 회갑 무렵인 60대부터는 공공도서관 개혁 운동에 온몸을 바친 책 생태계 선구자이다.
엄대섭 이야기의 출발은 가난한 가정에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구현하는 과정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고향인 울주군의 소작농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소작이 떨어지고 생계가 막연하여 고향을 등지는 부모와 함께 여덟 살 때 일본 규슈(九州) 땅으로 가게 되었다. 공사장의 인부로 이 지방 저 고을로 전전하는 부모를 따라다니다가 부친의 사고 이후 그는 14살에 다섯 동생을 양육해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논 한 두락의 크기조차 모르던 그는 “논 열 두락만 있으면 고향에 돌아가서 잘 살 수 있다”는 부모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당시에 갖고 있던 최고의 꿈이었다. 그는 두부 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의 직공 등 닥치는 대로 온갖 잡역을 해가면서 온 가족을 부양하며 연명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틈만 나면 헌책을 구해 읽는 일을 유일한 취미로 삼았다. 공사장 인부로 전전하는 부모를 따라다니느라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기면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갈증을 메워주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어머니의 날품팔이 수입을 합쳐야 겨우 연명하는 실정인지라,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로 돈을 벌려고 폐품 모으기 행상을 하던 때였다. 좋은 돈벌이 꿈만 항상 생각하던 때에, 어떤 교양전서에서 “남의 흉내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안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정신이 확 들었다. 며칠 동안 ‘남이 안 하는 기발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일도 안 나가고 방안에서 뒹굴었다. 그는 마침내 희한한 광고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동아 전쟁을 앞두고 일용품 공급을 통제하는 바람에 의류가 아주 귀해서 서민들은 내복이나 노동복, 겉옷 등을 구하지 못해서 애를 쓰고 있지만, 부유한 집에서는 낡지도 않은 헌옷을 다락에 쌓아둔 채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비상시국 하에 부유하다 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헌옷을 사장해서 좀먹혀 버리는 것은 비국민이다… …이러한 고의류를 매입하기 위해서 x월 x일 x시에 귀댁에 들르고자 하니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광고문을 써서 부유층 집집마다 돌렸다. 과연 성과는 좋았다. 이들이 입지 않으나 헐지도 않은 옷들을 모조리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옷을 사들이고 팔면서 돈을 모으게 되었으며, 이것이 기반이 되어 장사에 크게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책을 단순한 교양으로서가 아닌 ‘생존경쟁의 무기’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돈 버는 솜씨가 남다르다고 해서 일찍이 주변에서는 그를 ‘돈벌이의 신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후, 해방 즉시 귀국해서는 경주 지방에 100여 두락의 농토를 매입하고, 훌륭한 기와집도 사들이고, 울주군 강동면에 멸치잡이 어장과 대형 목선도 사들여 처음으로 부자가 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서관 운동으로의 방향 전환도 책 한 권으로
해방 직후 귀국한 엄대섭은 사회적 갈등과 한국전쟁 혼란을 거치며, 더 이상의 돈벌이는 중단한 채 동아대학에 늦은 나이로 적을 두고 두서없이 헌책을 사들이며 책읽기에 몰두하고 시국을 관망하면서 지냈다. 청소년 시절부터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고서점을 돌아다니던 중 1951년 어느 여름날 부산 시청 앞 고서점에서 처음 보는 책 한 권을 입수했다. 『圖書館の 實際的 經營』이라는 오래된 일본책이었다.1) 읽어 보니 그가 평생 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사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한 권의 책이 그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
乙部泉三郞, 1939, 『圖書館の 實際的 經營』, 東京: 東洋圖書柱式合資會社.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3천여 권의 책을 모두 가지고 울산으로 가서 사립 무료 도서관을 열었다. 그러나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로 학생이었으며 그 이외에 회사원, 공무원 등의 일부 식자층이 대부분이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책이 없어서 제대로 독서를 하지 못하는 농민에게 골고루 책을 읽히기 위해 당시 전쟁의 부산물인 탄환 상자를 재활용해 ‘순회문고’를 만들기까지 했다. 우선 50개의 순회문고에 책을 넣어 울산 변두리에 일정 기간씩 돌렸다. 그러나 워낙 독서인구가 적고 일일이 지도하기가 어려워 커다란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1951년에 울산에서 사립도서관을 운영하면서
2018년 울산도서관 신축 개관 기념 엄대섭 전시회
뿐만 아니라 개인이 사설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경찰의 뒷조사와 의혹의 눈초리가 심해 어려움이 컸다. 큰 자산가도 아닌데 무료 도서관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사상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이에 엄대섭이 도서관 관련 도서를 더 깊이 살펴보니, 선진국 공공도서관의 대다수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음을 터득하고, 운영하던 사립도서관을 지방정부 소유의 도서관으로 기부채납 하고자 했다. 처음에 울산읍장을 찾아가서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경주읍장을 설득시켜 장서와 시설을 1953년 경주읍에 기부채납한 후 무보수 촉탁 관장으로서 책읽기 운동을 펼쳐나갔다.
전국적인 마을문고 보급 운동 시작
그러나 당시 전국의 공공도서관이 고작 20개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실정에서 단기간에 공공도서관을 늘려 농민들이 책을 읽게 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공공도서관이나 독서 습관이 부족한 후진국의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의 주민을 조직하고 그들 가까운 곳에 작은 규모의 독서시설을 마련하는 독서운동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경주시 변두리 마을에 시험적으로 ‘마을문고’를 설치 운영해보고는 성공을 자신하게 되었다. 엄대섭은 다시 전국적인 마을문고 운동에 인생을 걸기로 하고, 1961년 민간 운동단체를 설립, 본격적인 설치 운동에 들어갔다. 능력 있는 분들을 설득하여 자기 고향에 마을문고를 설치해 주도록 홍보․권장하며, 설립된 문고는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며 육성시킨다는 전략이었다. 문고 보급 운동은 처음에는 신종 책장사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며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엄대섭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으로 중앙 언론계의 공동모금 지원을 받으며 매년 1천 곳 이상의 마을에 급속히 문고를 확산시켜 나갔다.
1960년대 중반 마을문고가 설치되는 날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축하고 있다(전북 완주군).
1970년도 중반부터는 문고지도 전담 지방조직 신설, 문고지도자 교육 강화, 읽기 쉽고 만화로 풀이한 농업기술 도서의 출판 지원 등 질적인 육성에 주력하였다. 문고의 내실을 갖추기는 설치 과정보다 훨씬 어려운 과업이었으며 그는 재정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민간 운동단체의 관리운영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만큼, 초기 몇 년간은 엄대섭 본인의 사재로서 충당하였으나, 60년대 후반부터는 능력 있는 회장단과 임원진을 구성한 후, 그들의 출연금으로 자체 자금을 마련하여 왔다. 그러면서 장차는 항구적인 기금을 바탕으로 한 재단을 구성하여, 안정적인 운동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항구적인 기금의 재단을 구성하고자 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으나 몇 차례 실패하였다. 결국 엄대섭은 1980년 ‘막사이사이 상’ 수상으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시점을 계기로, 재단 구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과정에 새마을조직으로 통합됨으로써,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81년도 막사이사이상 수상식 장면(왼쪽에서 두 번째가 엄대섭)
마을문고는 “밑바닥의 민중을 조직하여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독서하는 권리’를 쟁취하는 하나의 문화혁명”2)이란 신념 아래, 공공도서관이 절대 부족한 실정에서 공공도서관을 보완하는 한시적 운동이었지만, 앞으로 전국 읍, 면 단위에 공공도서관이 설치되면 문고를 공공도서관 시스템에 편입시키겠다는 당초 전략의 결실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2)
엄대섭, 1968, 농어촌에 심는 독서의 씨앗: 마을문고 설치 1만개를 돌파하고, 『신동아』 47 : 252.
공공도서관에 근대성의 뿌리를 내리고자
엄대섭은 마을문고 운동에서 물러나 1년 정도 쉬다가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150여 개 공공도서관 개혁운동의 깃발을 다시 들었다. 구체적인 사업단체가 아닌 목표사업에 불을 붙이는 계몽단체로서 큰 돈을 들이지 않고 막사이사이상 상금으로 우선 시작하겠다며, 1983년 1월에 ‘대한도서관연구회’라는 단체를 발족하였다. 학생들의 공부방으로서만 머물러 있는 도서관은 ‘독서실’이지 ‘공공도서관’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즉 공공도서관의 발전 및 운영개선을 촉진하고, 공공도서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제고하며, 국민 대중의 도서관 이용 의욕을 고취시킨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전국의 모든 공공도서관의 처참한 실정을 직접 확인하겠다며 순방길에 나섰는데, 주변에서는 실제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국적으로 실정은 비슷할 터이니, 지역 단위로 대상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일부 도서관만 조사하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지만, 그는 65세에 자가운전으로 끝까지 마쳤다. 큰 어려움과 싸울 때는 현장 어려움의 ‘반복 실감’을 통해서 인고(忍苦)의 내공을 쌓아 폭발시키는 엄대섭 특유의 전술이었다. 그는 “육체적인 고생보다는 찾아간 도서관마다 새로운 참상에 부딪쳤을 때의 정신적 고통은 마치 전우의 시체를 넘는 병사의 심정이 되곤 하였다.”3)는 소감으로 의지를 다졌다. 이러한 도서관 현실과 문제점 분석은 다행스럽게도 1985년 8월에 KBS 시사고발 프로그램 “추적 60분”에 ‘공공도서관의 현주소’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어 사회에 자극을 주고 많은 관심을 끌었다.
3)
엄대섭, 1985, 전국 공공도서관 순방을 끝내고, 『오늘의 도서관』 6 : 1.
도서관 개가제(開架制) 및 관외대출 운동은 도서관이 공부방 역할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자료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하려는 실천적 노력이었다. 또한 전국의 공공도서관 운영 실태를 평가·등급화하여 민낯을 공개하고, ‘간송도서관문화상’을 제정하여 상금을 수여하는 등 그의 공격적인 개혁 운동은 도서관 현장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도서관 행정 부재에서 비롯된다며 관계부처 설득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는 도서관 소관부처를 문교부에서 신설 예정인 문화부로 옮겨 책의 출판(생산)과 보급(활용)의 연계 효율성을 높여야 하며, 도서관법 개정, 도서관 입관료 폐지 등 정책 제안을 하며 관심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들 활동을 위해 자체 발간한 격월간 기관지 『오늘의 도서관』을 발행하고 전국의 도서관은 물론 교육, 문화, 언론, 국회, 행정기관 등에 배포하며 여론 형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엄대섭은 건강상의 이유로 1987년 모든 활동을 접은 후,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말년을 보내다가 2009년 향년 89세로 타계하였다.
한마디로 엄대섭은 ‘독서와 도서관’에 외곬 인생의 승부를 걸고서, 실망과 좌절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사회 인식의 절벽을 허물고, 책과 도서관의 가치를 이해시키고자 끝없이 도전하며 달려왔다. 전국적인 풀뿌리 도서관 운동의 축적 없이 120여 년 전에 서양으로부터 공공도서관 개념을 수입한 척박한 형편에서, 엄대섭은 건국 후 최초의 전국 단위 도서관 운동 선구자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박경용 외, 1981,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들의 외길 한평생』, 서울: 장학사.
이용남(한성대학교 명예교수) 대학 시절 농촌봉사 활동 인연으로 마을문고 운동, 대한도서관연구회 활동을 20여 년간 엄대섭과 함께하였으며, 1982년 한성대학교(지식정보학부) 교수 생활 시작으로 중앙도서관장·총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2008년 정년퇴직하였다. 한국문헌정보학회장, 한국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 문화관광부 국가도서관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관련 시민단체 활동에도 참여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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