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2019. 07.
[출판기자의 시선]
이유진(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2019. 07.
‘맨스플레이닝’(mansplaining, man+explaining)은 2010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의 단어’였다.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실릴 만큼 유명세를 탔다. 이 신조어는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2003년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의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최근 접한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 거들먹거리면서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사실은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솔닛이었다. 남자는 책을 읽지도 않았고 단지 책 리뷰를 읽었을 뿐이었지만 작가 앞에서 잘난 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솔닛은 이 어처구니 없는 경험에 대한 에세이를 썼고 그로부터 6년 뒤인 2014년, 해당 아티클을 포함한 여러 편의 글들을 모아 『Men Explain Things to Me』라는 책을 냈다. 미국에서 이 책은 발간 2년 만에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을 합해 10만부가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다. 2015년 5월에 나온 한국어판(『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초판이 나온 뒤 불과 10개월 만에 1만 5000권 넘게 팔려나가며 한국 사회 ‘페미니즘 출판붐’의 서막을 올렸던 것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출판붐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이 소개된 2015년이었다. 그해 말,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시민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의 책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기획한 출판사 현실문화는 크라우드 북펀딩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목표액 500만원을 채웠다.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성과였다.
20년 전에 나온 『이갈리아의 딸들』(1996년 초판 발행, 황금가지) 역시 그해 말 크게 인기를 얻어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에만 4000권이 팔려나갔다. 이 책은 남녀 젠더가 바뀐 가상 세계인 ‘이갈리아’를 다룬 내용의 노르웨이 소설로, 당시 ‘메갈리아’라는 여초사이트가 이 책에서 이름을 따와 유명해졌다. 2019년 6월 현재까지 『이갈리아의 딸들』은 28만부 가량 판매되었다.
세계적 페미니즘 출판붐
지난 몇 년 동안 ‘페미니즘’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었고, 사회 운동이자 문화 현상이기도 했다. ‘프랑스 패션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럭셔리 브랜드 디오르(Dior)는 2017년 봄-여름 컬렉션 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글귀를 프린트한 티셔츠를 선보였다. 이 슬로건은 나이지리아 출신의 페미니스트 작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가 2012년에 한 테드(TED) 강연을 2014년 책으로 낸 에세이 제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은 가수 비욘세 노래에도 피처링되었고 스웨덴에서는 전국 모든 16살 고등학생의 성평등 책자로도 이용될 만큼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2016년 1월 출간된 한국어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는 두 달 만에 1만권 이상 팔렸고 2019년 6월 현재까지 6만부가 나갔다.
미국 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인 록산 게이(Roxan Gay) 퍼듀대학 교수가 쓴 『나쁜 페미니스트』 또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책이다. 이 책은 2014년 아마존 ‘올해의 책’,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뉴스위크〉 〈피플〉 〈워싱턴 포스트〉 〈베니티 페어〉 등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2016년 3월 나온 한국어판은 지금까지 종이책 7만부, 전자책 8000부 가량 판매되었다. 게이 교수는 핑크색을 좋아하는 사람도,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자신만의 소신과 인식만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며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190센티미터의 키에 한때 261킬로그램이나 나갔을 정도로 거구였는데, 어린 시절 겪은 끔찍한 성폭력과 그 뒤로도 회복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상처가 문제였다. 몸집이 커지면 남성의 폭력에서 안전해질 것이라 믿었던 게이는 먹고 또 먹으며 몸집을 불려나간다. 그런 자신의 신체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은 내용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용기와 저항, 해방을 향한 열망을 담아내 평단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다양해지는 페미니즘 책
최근의 현상은 세계적인 페미니즘 붐을 타고 대중을 겨냥한 페미니즘 서적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이론서나 학술서에 머물던 페미니즘 서적들이 문학, 청소년, 페미니즘 SF, 여성인물 평전과 자서전, 에세이, 의학,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된 것이다.
국내만 해도 〈우먼카인드〉 같은 페미니즘 대중 여성잡지가 생겼고 절판되었던 『성의 변증법』(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70) 같은 페미니즘 고전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재발간되었으며 크고 작은 출판사에서 페미니즘 관련 단행본이나 시리즈를 기획해 펴내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을 다룬 『백래시』(수전 팔루디, 1991)가 2017년 뒤늦게 나왔고 수전 브라운 밀러가 강간 문화를 비판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1975)도 지난해 번역되었다.
출판사 교양인은 정희진·권김현영·한채윤·루인 등 유명 페미니스트 저자들이 참여한 ‘도란스 기획 총서’를 내놓았고 꿈꾼문고는 최근 ‘ff(fine books×feminism)’라는 페미니즘 이론서 시리즈를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들녘 출판사는 청년 백과전서 ‘룰디스’ 시리즈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발간했다. 또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 봄알람, 퀴어 전문 출판사 움직씨, 래디컬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인 열다북스와 1990년대 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후신인 이프북스 출판사 등이 창립해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펴내고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여성평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비평서들이 눈에 띈다. 최근 나온 책들을 보면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문학은 위험하다』(민음사),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월의 봄), 『움직이는 별자리들』(갈무리) 등이 눈길을 끈다. 여성평론가들의 비평집은 특히 문단 내 성폭력 사건과 문단권력 논란을 겪으면서 더욱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 현상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여성 독자가 많은 소설 분야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주요 구매자인 여성 독자들은 “교양으로서 독서를 훈련받은 데다 책 읽을 시간과 자원이 있는 독자들”(허윤, 『문학은 위험하다』 중)로 분석된다. 올 상반기 눈에 띄는 한국소설 신작이 없었던 가운데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집계 결과 조남주 작가가 쓴 『82년생 김지영』이 재작년, 작년에 이어 이번 상반기에도 한국소설 1위를 지켰다.
대한민국 30대 기혼 여성들의 평균적인 삶을 다뤘다고 평가받는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10월 발간된 뒤 2년 만에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했다. 2018년 말에는 일본어판이 나와 한 달 만에 5쇄 5만부를 찍으며 일본 사회에 ‘케이 페미니즘’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82년생 김지영』의 인기는 사회적 계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2010년대 들어 격화된 소수자, 여성 등을 향한 전방위적 혐오와 광풍에 대한 조금 늦게 온 반발, 저항”(김미정, 『문학은 위험하다』 중)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이처럼 페미니즘 출판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10년부터 시작한 여성혐오 논란에 바탕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치녀’, ‘된장녀’, ‘무뇌아’ 등 여성혐오 발언에 대한 혐오, 곧 ‘여혐혐’이라는 사회적 움직임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도 요인이다.
그밖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해시태그 페미니즘 운동(#나는페미니스트다), 혐오발언 되받아치기(미러링), 남성 개그맨의 여성 비하 발언, 소라넷 논란, 인터넷 여성사이트 ‘메갈리아’ 논란, 강남역 10번출구 살인사건, 미투 운동, oo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 등이 줄줄이 터져 나오며 관련 출판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책을 구매하는 여성 독자가 꾸준하다는 것도 눈여겨 살필 일이다. 2019년 상반기 교보문고의 자료를 보면 도서구매자 60% 이상이 여성이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40대 여성 독자의 구매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가는 추세로 전체 도서 구매자의 21.5%를 차지해 출판계의 메인 타깃 독자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자녀학습서, 문학, 실용, 전문서 등 다양한 도서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
2009년 27종에 머물렀던 국내 페미니즘 도서 발간은 2016년 55종, 2017년 95종, 2018년 105종으로 뛰었다. 2019년 다섯 달 동안에만 페미니즘&젠더 관련 책들이 벌써 41종이나 서점에 깔렸다. 교보문고에서만 2013년 8000여 권 남짓 팔리던 페미니즘 분야의 책은 2014년 1만여 권을 돌파해 2018년 6만2000권 가까이 팔려 나갔다. 이런 추세라면 페미니즘 출간 붐과 여성독자들의 도서 구입 열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