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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8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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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을 맞은 책생태계 사람들 ②]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항상 첫 출발이었던 시

 

 

 

박수연(문학평론가)

 

2021. 12.


 

김수영은 서울 종로2가에서 태어났다. 1921년 11월 27일의 일이었다. 다음해에 그는 동대문 앞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그의 집은 그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야 했지만, 동대문 앞 골목길 안에는 여전히 그의 고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을 때도, 해방공간의 소음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김수영의 공간은 바로 그 동대문 앞의 골목길에 있는 거처였다. 그의 집은 애초에 유복했으나 권리 없는 나라의 유력가문이 대부분 그랬듯 그의 집안도 근대와 식민의 압력에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사람들은 밀려오는 근대 문명의 파도 속에서 개인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이 개인은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의 총체일 것이지만, 근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개인에게 요구하는 중이었다. 식민지 조선이 그렇게 구성되었고, 지식인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김수영은 장남이었지만 쓰러져가는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식민 현실의 모순 앞에 똑바로 서서 견디며 삶을 지탱하는 개인이라는 과제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은행 같은 데 취직해 집안을 건사해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을 뒤로하고 일본에 건너가 연극에 심취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시기였고 식민 본국의 자유는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일본 공격을 피해 귀국했고 잠시 연극계에서 연출 보조 같은 일을 하다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하였다. 길림극예술연구회가 그를 맞이했고, 1945년 6월에는 길림공회당에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길림공회당의 길 건너편에는 만주지역 최대라는 공자사당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어서 일본이 패망했고 그의 가족들은 귀국하여 서울 충무로에 자리 잡았다.

 

선린상업학교 강당(현 영상교육관), 구 길림공회당 출입문(사진 촬영: 2018년)


선린상업학교 강당(현 영상교육관), 구 길림공회당 출입문(사진 촬영: 2018년)

 

김수영은 연극을 버리고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묘정(廟廷)의 노래」가 등단작이다. 고전적 정서와 언어를 가진 이 시가 그의 등단작이라는 사실은 작품의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의 정신세계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의 삶과 사유의 바탕에 동양적 전통의 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곧 전통적 서정의 언어 대신 현대적 혁신의 언어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모더니스트들이 그의 동료였고 동지였다. 그러나 해방공간은 오직 문학과 예술의 심미성으로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강제로 인민군에서 훈련받았던 김수영은 민간인 억류자 신분이 되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았던 그는 통역자로 또 수용소 병원 조무로 끔찍한 시간을 견뎠다. 그 끔찍함에 질린 김수영은 그의 미메시스(mimesis)적 시 언어 속에서도 포로생활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등단 작품, 「묘정의 노래(1945)」


김수영의 등단 작품, 「묘정의 노래(1945)」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전개된 1950년대의 그의 문학은 후진적 한국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했다. 1950년대 내내 김수영의 시를 사로잡은 주제는 현대를 향한 고통이 참담할지라도 그것을 건너 새로운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시는 뒤떨어진 한국 현실의 설움에 대한 것이었고, 현대적 창조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를 위해 거듭나야 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근대를 아는 사람만이 근대를 차버릴 수 있다고 시에 쓰기도 했다. 이 자기 혁명의 정신이야말로 그의 1950년대 모더니즘의 근간이었다. 김수영은 그것을 초현실주의의 정신이라고,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의 시가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언어 미학적 경향과 달리 사회적 발언으로 확장된 것은 그 때문이다.

 

1960년의 4·19는 김수영의 정신을 혁명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시의 혁명가였고 정치의 비판자였다. 허정 과도내각을 향해 혁명을 팔아먹은 집단이라고 외쳤고, 2공화국을 자신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혁명은 절대적 변화의 지평까지 진척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4·19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을 때 그의 시는 소시민성의 비겁을 폭로하는 쪽으로 언어의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자신의 비겁을 폭로하여 사회 전체를 성찰하고 그로써 다시 생성될 세계를 예감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1960)」 육필 원고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1960)」 육필 원고

 

역시 세계는 변화할 것이었다.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했던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한일협정과 경제개발에 집중했고, 국민들은 그 협정과 발전을 굴욕 외교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버렸다’고 썼던 김수영은 바로 그 혁명의 방으로 다시 시를 쓰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인에게 당시의 정치적 국면은 이제 식민주의의 온전한 청산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동학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내기 시작했고, 김수영은 학생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김수영이 민중의 역사를 되살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삼기 시작한 것도 한일협정을 거치는 1960년대 중반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집 바로 앞에서 갑자기 달려든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문학심포지엄에서 마지막으로 내놓은 글은 「시여, 침을 뱉어라」이다. 시의 언어를 통해 세계의 진실을 열어 보여주는 모험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 글에서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명제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썼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 「시여, 침을 뱉어라」

 

요컨대 김수영은 자신의 시를 그치지 않을 새로운 시작의 선상에 두어야 했던 시인이다. 그것이 그의 모든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삶은 그의 시의 주제와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를 유심히 읽은 독자들은 그의 삶의 요소에 유교적 정신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모더니즘 시가 단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초현실주의의 정신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의 정신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유교정신은 그의 금욕주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해명해주는 요인이기도 하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전통의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 초현실주의 연극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래디컬 모더니즘은 이후 그의 시에서 자신의 전통마저 거부하는 모더니즘적 자기부정 정신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이 자기부정이야말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결합된 형태로서의 김수영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핵심을 전제로 하여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찾아낼 수 있다.

 

김수영의 시적 출발기로 분류된 1940년대 시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 전통, 주체, 초현실주의가 그것이다. 전통을 대표하는 시는 「묘정의 노래」이다. 김수영의 시들은 전통을 역사적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역사는 그의 초기 시에서는 경배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이다. 그가 1950년대 내내 과거를 부정하는 작업에 집중했던 이유가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주체중심주의의 근대철학의 내용이 ‘책’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다. 이때 책의 내용은 독자가 그 내용을 상상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그는 미국에서 건너온 책을 문제 삼고 있었는데, 미국은 조선 사람들이 가진 이해의 지평 너머에 있는 나라였다. 그 책을 주체와 연관시키는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주체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주체 스스로 구성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요소는 미적 근대성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시작 방법이다. 초현실주의는 자기부정과 현실부정의 태도를 주요 동인으로 삼는다. 김수영의 시적 자기 변혁은 바로 초현실주의의 정신을 하나의 기본 요인으로 하는 것이다.

 

전쟁 이후 김수영은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속도주의로서의 근대의 완성을 추구한다. 이 시기의 초반에, 정확히 말해 1956년까지는 그의 정서적 지향점이 전근대적인 것에 있었다. 근대에 의해 파괴되는 전근대의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이 전쟁이었고 그것이 고통스러운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근대는 김수영에게 거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근대의 체험을 통해 김수영은 근대를 거부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 후 그는 근대 자체를 완성함으로써 그 근대를 벗어나는 일을 삶의 방식으로 택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자신 및 현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대인이 되어야 했고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의 속도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나 김수영의 이러한 시적 행동은 근대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는 출발에서 죽는 것을 영예로 안다(「비」)”는 진술이나 “문명을 아는 자는 그 문명을 차버린다(「미스터 리에게」)”는 진술은 전쟁으로 현상한 폭력의 경험이었던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 그 근대를 완성하는 것에 있음을 자각한 후의 발언이다. 이를 실행한 김수영의 시가 과거를 부정하는 망각으로서의 모더니즘이다. 근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근대를 부정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했던 근대 완성의 주체는 철저한 개인이었다.

 

개인주의적 시 세계를 넘어서는 계기를 김수영에게 준 것은 4·19의 경험이었다. 김수영은 4·19를 겪으며 공동체의 힘으로 근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의 시적 주체는 ‘우리’이다. 이를테면 시적 자아가 1950년대의 개인적 자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에게는 일종의 행복의 경험이었는데, 그는 곧 4·19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다시 ‘나’라는 개인의 시적 주체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혁명의 정신을 완전히 불신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혁명에는 좌절했지만 그에 대비되는 존재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일차적 목표가 정치에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1960년 6월 16일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고독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혁명은 시적 혁명이 된다. 이로부터 김수영이 지향하는 두 가지 세계가 나타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시를 통한 존재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세계이다. 이것을 주체와 대상이 명확해진 상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둘을 합해서 말한다면 정치적 변화는 고독한 주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개인의 고독한 혁명이 개인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이 시기 김수영 시 세계의 큰 변모가 있다.

 

5·16 쿠데타는 김수영에게는 다시 한번 현실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가 1950년대 내내 추구했던 속도주의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가를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역설의 경험이었다. 그는 5·16 직후 「신귀거래」 연작을 통해 ‘풍자와 해탈’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 인식을 보여주는데, 풍자는 삶에의 몸담음을, 해탈은 삶으로부터의 초월을 가리키지만, 그 해탈은 풍자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그의 시는 말하고 있다. 풍자가 삶에의 몸담음이고 그 삶이 일상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가 들어간 영역은 일상이었다. 그가 일상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말을 빌리면,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의미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일상에 집중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근대의 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삶을 철저하게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일상이 단선적이고 발전적인 역사관에 의해 선택되고 배제되는 현실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뒤엉켜 시간을 구성하는 현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이 공존의 역사관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일상은 어떤 단일한 목표로 수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를 크게 맴돌면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초상(1955)


김수영 초상(1955)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죽음’과 ‘사랑’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이다. 그는 죽음과 사랑의 상호성을 누누이 강조하는데, 사랑은 삶의 소음을, 죽음은 그 삶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 새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일상에 주목하는 행위는 곧 무수하고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 찬 현실을 사랑으로 되살려내는 행위이고, 그를 통해 단선적 근대 담론에 대항한 행위는 억압적 근대를 소멸시킴으로써 새 현실을 생성하는 근대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행위이다. 사랑과 죽음의 동시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김수영이 일상에 집중하는 행위는 그 일상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고, 그를 통해 일상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보기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풍자를 통해 해탈로 나아가려 한 행위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주제는 역사이다. 1940년대에 그의 시에서 나타난 역사가 ‘廟廷(묘정)’이나 ‘孔子(공자)’로 상징되는 전통으로서의 유교적 역사라면 이 시기에 그가 복원하는 역사는 못나고 혼란스러운 민중의 역사이다. 「거대한 뿌리」가 잘 알려진 시라면, 그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시는 「현대식교량」이다. 이 시에서 시간은 젊음과 늙음이 분간 없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때의 시간은 모든 존재들이 공존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시간인 셈이다. 이것은 역사의 복원을 가능케 한 정치적 무의식의 공간적 시간이기도 하다. 무의식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김수영에게 역사는 과거와 전통을 실현하는 미래가 된다. 이 미래는 물론 낡아버린 개인의 영역을 현실에 대한 사랑을 통해 떼어버리고, 말하자면 죽음으로 건너뛰어서, 근대 이후의 새 삶을 만들어내는 미래이다.

 

이것을 내용과 형식으로 보여주는 시는 「풀」이다. 풀의 쓰러짐과 일어남은 김수영이 그토록 강조하는 바의 죽음과 생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시의 본질이 죽음과 사랑의 대극’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독자들은 「풀」에서 그 말이 미적으로 실현된 것을 보게 된다.

박수연

 

박수연(문학평론가)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는 『문학들』, 『국민, 미, 전체주의』 외 다수가 있다. 현재는 충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pinepond1@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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