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9 2022. 12.
이상한 책방을 소개합니다
김기태(“처음책방” 책방지기,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2022. 12.
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출판사였다.
당시에 책 만드는 일을 선택한 게 사실은 호구지책(糊口之策) 때문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과 나는 천생연분임을 깨닫고 편집자로서 최선을 다했던 기억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 무렵 서울올림픽 이후 더욱 달아오른 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출판 산업 또한 호황기를 맞아 무슨 책이든 내기만 하면 제법 팔렸는데, 무슨 연유인지 내가 편집을 맡았던 책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걱정도 병이라고 했던가. 혹시나 내가 만든 책이 벌써 헌책방에 나오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며 청계천을 비롯한 헌책방 거리를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때 거기서 이른바 ‘초판본’과 ‘창간호’ 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수많은 지식인 대중들을 독자로 두었지만,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던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호를 발견하고 설렜던 순간이야말로 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편집자로서 활자 및 이미지와 씨름하면서 첫 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공감하면서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에 나도 모르게 애정이 갔다.
내가 편집자로서 느꼈던 심정 또한 첫 책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열심히 책을 만들어도 절망처럼 다가오는 편집자로서의 한계를 느끼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정말 꼼꼼히 원고 및 교정쇄 교정과 교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인쇄되어 나오고 나면 오·탈자라든가 제작상의 결함이 나타나곤 했던 경험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그때 느끼는 일종의 실망감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소하거나 중대한 오류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초판본이나 창간호야말로 순수한 매체라고 스스로 의미 부여를 했다고나 할까. 그런 오류도 ‘하나의 역사이자 추억’이 아닐까 싶었다. 예컨대, 작가 최인훈 선생은 대표작 『광장』에 녹아 있는 역사적 오류 등을 고치려고 열 번 넘게 작품을 개정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고 그 시작은 초판본이었다. 그래서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처음책방” 외부 전경 ⓒ 김준영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라는 믿음을 실천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도 책을 모아야겠다는 집념을 충동질했다. 나와 같은 50대 후반 또는 6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모두 동의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책 말고는 마땅히 즐길 만한 매체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조차 마땅치 않아 교과서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당시 경기도에 속해 있던 강화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인천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책을 끼고 살았다. 강화도 마리산(강화도 지역주민들이 마니산을 부르는 명칭) 아랫동네에 살던 작은아버지께서 고물상을 운영했는데, 틈날 때마다 작은집에 가서 마당이나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책 더미 속을 헤집으며 책을 골라 읽곤 했었다. 그때 생긴 믿음이 바로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책방”과 책방지기 김기태 교수 ⓒ 김준영
대학 졸업 후에 이곳저곳 출판사를 옮겨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출판사와 저작자(著作者)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저작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석·박사 과정 공부를 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하면서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는 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모았다. 강의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배낭을 둘러메고 학교 주변 헌책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책을 모으는 일 못지않게 책을 보관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점차 모인 책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학회 사무실, 출판사 창고, 친구 사무실까지 여러 곳을 빌려 책을 보관했는데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책을 모으는 일에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존재는 세명대학교였다. 2001년 3월, 세명대학교에 신설된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출판학 전공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수도권 대학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드넓은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세월이 흐른 2022년 3월, 청풍명월의 고장 충북 제천의 세명대학교 인근에 건물을 임대하여 ‘국내 유일의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을 표방한 “처음책방”을 엶으로써 마침내 나는 생애 후반기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라는 신념을 유지할 자신이 생겼다.
귀한 책, 고마운 책, 아끼는 책 그리고 아쉬운 책
“처음책방”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어여쁘다. 내 손길이 미치지 않은 책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모은 초판본과 창간호는 그 장르와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문학도서의 초판본뿐만 아니라, 각종 만화잡지와 성인잡지 및 월간지·주간지 등 잡지류는 물론 수백 종의 일간신문·지역신문 창간호, 전문서 및 사전과 각종 참고서의 초판본도 있다.
가장 오래된 책은 1911년 육당 최남선 선생이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차리고 조선 광문회라는 조직을 꾸려 직접 출판한 『동국통감(東國通鑑)』(1함 6책)과 함께 3년 후에 출판한 『삼국사기』가 있다. 1934년 출판된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개교 25주년 기념 논문집』에는 ‘동양의 파브르’로 불리는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 선생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어서 귀하게 다루고 있다. 또, 1949년에 황기(黃琦) 지음으로 출판된 『화수도교본(花手道敎本)』(조선문화교육출판사)은 우리 태권도와 관련된 교본으로는 최초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김기림 시인의 시집 『바다와 나비』는 1946년 신문화연구소에서 발행된 시집으로, 그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를 표제작으로 삼았다. 다만, 오랜 세월을 견디다 못해 많이 손상된 상태라 못내 아쉽다. 그 대신 1955년 영웅출판사에서 발행한 박목월 시인의 첫 시집 『산도화』를 통해 청록파 시인의 초창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956년 정음사에서 발행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영랑시선』을 만날 수도 있다. 이 시집에는 김영랑 시인의 대표작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처음책방”에는 일반 단행본뿐 아니라 잡지, 사보까지 다양한 책들의 초판본이 있다. ⓒ 김준영
책방을 찾아오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책으로 최인훈 작가의 대표작 『광장』 초판본을 들 수 있는데, 1961년 정향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가장 잘 조명한 문제작으로 우리 현대 문학사에서 여전히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인훈 선생이 생전에 열 번 이상 개정을 거듭하는 바람에 개정판이 계속 발행된 터라 초판본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 또 하나, 박완서 작가의 등단작이자 최초의 장편소설 『나목』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당시 박완서 선생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여성동아〉 복간기념 제3회 50만 원 고료 여류장편소설 당선작’이라는 표제 아래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별책 부록’으로 발행된 것이라 매우 귀한 책이다.
그 밖에 잡지 〈뿌리 깊은 나무〉는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모아 놓았으며, 우리나라 최장수 문예지 월간 〈현대문학〉도 1955년 1월 창간호부터 125호까지 약 10년 치 분량을 모아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문학동네〉·〈문학과 사회〉, 월간 〈문학사상〉·〈현대시학〉·〈심상〉 등 문예지 수백 종은 수많은 문학작품을 품에 안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교양잡지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월간 〈샘터〉 창간호를 비롯해서 시사 주간지, 스포츠 전문지, 주간·월간 대중지, 예술지 그리고 각급 학교에서 펴낸 교지(校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기간행물 창간호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백 개 회사에서 발행했던 사내보와 사외보 등 사보(社報)들도 그때 그 시절을 간직한 채 누군가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수많은 학술지 창간호들도 연구자들의 집념 어린 결실을 담은 채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게다가 〈한겨레신문〉, 〈문화일보〉,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의 일간지와 스포츠신문 등의 창간호와 함께 월간 〈보물섬〉, 〈만화광장〉을 비롯한 수십 종의 만화잡지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꾸준함을 이길 수는 없다
지난해 9월부터 본격적으로 책방을 준비하면서 건물을 물색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책들을 한 곳으로 모은 다음 분류하고 정리하며 지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다만, 초판본과 창간호만을 골라 책을 모으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다 보니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던 책들이 포장을 뜯어낼 때마다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정말 컸다. “아, 이런 책도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단행본이 5만여 종, 정기간행물이 1만여 종에 이르다 보니 이걸 모두 진열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동안 모은 책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보존하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라는 현실이 난감했다. 그래서 겨우내 책들과 씨름한 끝에 올해 3월이 돼서야 겨우 컨테이너를 창고 삼아 책방에 둘 것과 따로 보관할 것을 분리하고 드디어 손님들을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찾아오는 분들이 책방에 들어서면서 이구동성으로 “책 향이 매우 좋다!”라거나 “정말 멋지다!”라고 하시는 걸 보면 일단 “처음책방”의 첫인상은 합격인 모양이다. 그만큼 책방 가득 다양한 책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장관 그 자체와 함께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나 신문 창간호가 즐비한 모습이 아마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옛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묘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우리 책방에는, 관심 분야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잡지나 책을 찾으러 오시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옛 추억을 되살리려고 찾아오는 편집자나 독자도 있어, 새로운 사연들이 켜켜이 쌓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책방에서는 내년 1월 말까지 대학 시절 은사님이었던 박이도(朴利道) 시인의 ‘문단교우록전’을 열고 있다. 박이도 선생님께서 평생 문우(文友)들과 교류하면서 받은 육필 편지글과 서명본, 소장 고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책방” 외부 전경과 내부 모습 ⓒ 김준영
앞으로 “처음책방”은 특별한 전시회 또는 강연회를 열거나 원하는 사람에게 책을 팔기도 하고, 책을 사지 않아도 박물관처럼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또 훗날 연구자들이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책방에 있는 책들의 표지와 간기면(刊記面) 등을 디지털화해 데이터베이스로 모으는 작업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모은 책들이 구경거리로만 그치지 않고 책의 역사를 후세에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며, 책방이라는 자그마한 공간이 단 한 명이라도 새로운 독자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하여 흐뭇하게 미소 짓는 곳으로 가꾸고 싶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요즘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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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책방: 충북 제천시 세명로 8길 23
김기태 “처음책방” 책방지기,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세명대학교 인문예술대학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및 롯데출판문화대상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와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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