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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4  202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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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글들

 

 

 

임인택(〈한겨레〉 기자)

 

2023. 06.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2015년 오에 겐자부로 방한 당시 모습(출처: 문학동네)

 

 

지난 3월 13일 오후 국내 미디어가 일제히 3월 3일 노환으로 별세한 일본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1935~2023)의 궂긴 소식(부음 소식)을 전하면서 어느 매체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에 두 번째 노벨문학상을 안겨줬던 작가이자 아시아의 실천적 지성인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대번에 가장 적확히 설명해주는바,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자장(磁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짚어야 할 장면이라 하겠다.

 

한 세대 전 오에 겐자부로가 표명한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현대인이 처한 곤경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현실과 신화의 응축으로 형성되는 상상의 세계를, 시적 힘과 함께 창조하는 작가”라는 스웨덴 학술원의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은 때는 1994년이다. 당시 그는 일본에 최초의 노벨문학상(1968)을 안겨준 『설국』(1948)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수상 소감을 비판하며 자신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 수상 소감은 오에 겐자부로의 일관된 생의 응축이자 여생의 예고이기도 하다.

 

“(…)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26년 전에 이 자리에 섰던 같은 나라 사람보다 71년 전에 저와 거의 같은 나이로 이 상을 받았던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에게 더욱 정신적 친근감을 느낍니다. (…) 만일 가능하다면, 저는 예이츠의 역할을 배우고 싶습니다. 현재 문학이나 철학으로가 아니라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 기술에 의존해 그 힘을 세계에 알리는 우리나라의 문명을 위해서. 또한 가까운 과거에 그 파괴를 향한 광신이 국내와 주변국 사람들의 이성을 짓밟은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이와 같은 현재를 살고 있고, 이와 같은 과거에 새겨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닌 자로서 저는 가와바타와 한목소리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 개국 이후 120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의 일본은 근본적으로 애매모호함의 양극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애매모호함에 의한 깊은 상흔을 지닌 소설가로서 저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 애매모호한 진행은 아시아에서 침략자의 역할을 하도록 그들을 내몰았습니다. (…) 더욱이 아시아에서 일본은 정치적 측면은 물론이고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고립되었습니다.” - 『아버지의 여행가방: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中

 

전문가들의 설명대로 오에 겐자부로의 수상 소감 제목조차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 소감 제목인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패러디한 ‘애매모호한 일본의 나’였다. 일본의 자폐성을 신비로 포장하는 인식을 비판하며 그 양가성을 정확히 인지할 때 일본의 실상이 이해된다는 비판적 논리는 일본인 작가로서 고스란히 자신을 향하는 칼날이기도 하다. 이 자기비판의 염결성을 오에 겐자부로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반하지 않는다, 아니 자국이 표변하고 극우화할수록 더 벼렸다 해야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일왕이 주려던 문화훈장을 거부했다는 일화는 어찌 보면 그로선 지극히 당연한 것이나, 일본 내에서 그가 감수했을 곤경과 위험은 가늠도 쉽지 않다. ‘살해 위협도 당했다’라고 한 줄 쓰고 말 일이 아닌 거다.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1월 일본 시코쿠 에이메현 산간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가 이 지역에 위치한 오세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에 항복했고,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전후 민주주의 헌법이 시행됐다. 윤상인 전 서울대학교 교수(아시아언어문명학부)는 오에 겐자부로가 “태평양전쟁 시절에는 남 못지않은 ‘군국 소년’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때나마 일본인의 전형성을 내면화하며 자랐단 얘기다. 이때의 감각과 이후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그의 초기 단편에서 엿볼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문예활동을 거쳐 1954년 도쿄대학에 진학하며 오에 겐자부로의 정체성은 본격적으로 확립되고 발현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두 가지를 빼놓을 순 없겠다. 자신의 대학 불문과 은사인 와타나베 이치오(1901~1975)가 첫 번째다. “나는 인생과 문학에서 와타나베의 제자”라고까지 말했던 오에 겐자부로는 소설가로서 변경(邊境)에서의 보편화 방식과 가치를, 지성인으로서 위마니즘(humanisme, 인간중심주의)을 그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와타나베 가즈오(渡辺一夫)로도 불린 그의 은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정세 분석과 함께 군부를 비판한 일기를 남기되 적발되지 않기 위해 프랑스어로 썼고,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불문과 재학 중인 1958년 단편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까지 최연소 수상 기록이었고, 이는 1999년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가 장편 『일식』으로 수개월 더 젊은 23살 수상자로 분류되기까지 깨지지 않았다.

 

두 번째는 지적장애를 가진 첫째 아이(1963년생)와의 만남이다. 빛을 뜻하는 ‘히카리(ひかり, 光)’로 이름 지은 사내아이가 작곡가가 되어 순수의 음악을 지향하게 되었으나 아버지인 자신은 “히카리의 음악에서 울부짖는 어두운 영혼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노벨문학상 수상 때 술회한 바 있다. 슬픔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예술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면서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30편가량의 장편소설, 10편이 넘는 중단편집, 40편가량의 논픽션·에세이, 그밖에 평론, 극본 등 장르를 아우른 전방위적인 작가로 활동해왔다. 전후 평화 재건, 원폭 피해 고발, 천황제 및 헌법 9조 수정 반대와 같은 국내외 정치 이슈는 물론, 첫째 아들을 통해 더욱 깊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던 장애, 공생, 환경, 종교와 구원 등 첨예한 현대 시사를 문학과 삶의 주제로 끌어안았다.

 

최연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으로, 안보투쟁에 나섰던 남성을 주인공 삼아 국가의 폭력을 비판한 장편 『만엔 원년의 풋볼』(1967), 장애아의 부모로서 감당하게 되는 삶을 성찰해낸, 결과적으로 26년 만에 일본에 가져다준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개인적인 체험』(1964) 등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은 그의 초기 작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한 책으로 일본 극우들이 2005년 소송을 제기한 논픽션 『오키나와 노트』(1970), 국제 반핵 회의와 원폭 생존자를 취재한 『히로시마 노트』(1965) 등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 작품들은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2014년 말이다.

 

“일본의 (모순적인) 현실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오키나와 문제입니다. 현재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때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제외하고, 오키나와의 기지를 미국에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조약에 의해 오키나와는 버림받은 것입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일본이 왜 오키나와를 잘라버렸는지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당시는 소설을 쓰려는 때였기 때문에 (이후) 출판사(이와나미 서점)에서 돈을 받아서 오키나와에 여행을 가 책(『오키나와 노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공부를 해 히로시마에 대해서도(『히로시마 노트』) 썼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제 일의 출발점입니다.”

 

『히로시마 노트』 취재 내용은 그가 “부끄럽”게도 “도망”치려고 했던 아이 히카리의 문제를 다시금 직면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가 “나는 많은 문학을 읽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의 바닥에는 히카리와 히로시마가 있다”고 고백했던 이유다. 1970년대 들어 활발해진 해외 작가들과의 교류 때도,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작가들과 만날 때도 히카리의 이야기는 늘, 중요한 꼭지였다.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건 1960년대 후반부터다. 소설가 황석영은 2005년 8월 일본에서 이뤄진 그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전후 일본 근현대 문학을 처음 접한 세대”라며 “일본 작품은 자유당 정권 때는 전혀 소개되지 않다가 4·19 이후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한꺼번에 고전부터 현대까지 번역돼 소개됐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당시 접한 “전후 일본 문학의 신선한 충격”을 곱씹곤 했다. 황석영이 10대 후반 읽었다던 단편 「사육」, 장편 『짓밟히는 싹들』(근래 번역서는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사회에서 배제된 감화원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오에 겐자부로의 첫 장편, 1958) 등을 쓴 오에 겐자부로는 이후 1970년대 김지하 시인 구명을 위해 단식 투쟁에 나서고, 한국의 민주화, 일본의 반우경화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며 국내 지식인들과 깊이 교우한다.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

2023년 3월 3일 노환으로 별세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좌)와 한국 작가 황석영(우).
2005년 7월 〈한겨레〉가 주최한 광복 60주년 기념 대담을 일본 도쿄 세타가야구 오에 겐자부로의 자택에서 나누고 있다.(출처: 〈한겨레〉 자료 사진)

 

 

그가 한국과 주고받은 영향을 소설에 국한하는 건 거인의 발만 붙잡고 거인을 보았네 마네 떠드는 격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2000년대 들어 당시 일본 정부의 평화헌법 개정 시도를 저지하고자 결성한 지식인 그룹 ‘9조의 모임’으로 활동하고, 원전, 역사 교과서 개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소유권 등의 거의 모든 이슈에 단호히 개입했다. 2014년 ‘9조의 모임’ 활동 당시 김영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나눈 대담에서 그가 전한 메시지는 명료하다.

 

“아베는 지금의 평화헌법 체제를 미국의 강요에 의한 ‘나쁜 레짐(체제)’이라고 보고 전쟁 전의 ‘아름다운 레짐’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베가 전전 체제를 아름답다고 본다면 반성이나 사죄는 없는 거지요.”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한국의 땅과 사람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은 평생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의 근본입니다. 그 정신이 평화헌법 9조에 표현된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 종종 이뤄진 강연, 대담 등을 통해서도 보다 적실하게 대중에게 공유되어 왔다. 그러던 2015년, 오에 겐자부로는 절필 선언을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팔순으로 소설을 한 권 쓰기 위해 5년 정도는 몰두해야 하는데, 그보다 ‘9조의 모임’ 활동, 즉 여생을 반전 평화 운동에 전념하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 보자.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현대문학의 흐름을 셋으로 나눈 바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세계로부터 고립된 문학, 아베 고보(安部公房),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등 세계문학에서 배워 세계로 되돌려주고자 한 문학,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요시모토 바나나(본명은 요시모토 마호코(吉本真秀子)) 같은 대중문화의 감수성으로 무장한 문학”(윤상인 전 교수). 오에 겐자부로는 물론 두 번째에 속한다. 말하자면 3세대가 도래한 지점에서 그는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출판 저널리즘(광고나 서점 판매방식 등)이 대량으로 팔리는 책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라며 “젊은 작가들이 이런 흐름에 저항해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을 쓰는 결의를 할 것인가에 일본 문학의 앞으로의 가능성이 달려 있다”(2005년 황석영과의 대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0년대, 2020년대 일본의 문학세계는 어떠한가. 오에 겐자부로의 부고는 일본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에 의해 열흘이나 지나 알려졌다. 겸손한 삶의 양식 탓이겠으나, 역사적 퇴행을 거듭하는 근래의 일본 사회에서 그가 느꼈을 무력함, 불가항력적 침잠을 은유하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부고 뒤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대학 초청 강연에서 본 오에 겐자부로의 인상을 소개하며 “완벽한 인간, 참 지식인에 가장 근접한 분”이라고 이야기했으며,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는 “전후 일본의 양심이라 칭할 수 있을 작가”로 “아베 2기 정권의 등장 이후 저항의 뜻에서 글쓰기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바도 있었는데, 삼가 명복을 빌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권 모두에서 불고 있는 동조 우경화의 현실을 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첫 여성 회장을 역임했던 정연순 변호사는 “소설보다 평화주의자, 독재와 폭력에 반대했던 양심적 지식인, 선천적 뇌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을 돌보면서 그조차도 계기로 삼아 인간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동시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사람’으로 오래오래 존경의 대상으로 남는 분”이라며 추모했다. 이 외에 페이스북만 보더라도 오에 겐자부로와의 접점을 회고하거나 추모하는 한국인들의 세계는 넓고 다종하다. 그가 국내에 남긴 자취일 것이다. 하물며 한국뿐이겠는가. 미국 신문 〈뉴욕 타임스〉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전후 일본을 비평한 자(Nobel Laureate and Critic of Postwar Japan)”라는 제목으로 국내의 어지간한 부고 기사보다 긴 오에 겐자부로의 ‘오비추어리(Obituary)’를 발행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상징이기도 했던 둥근 안경테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경 너머 그가 한평생 집요하게 바라보던 세상을 이제는 세상 건너편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됐다.

 

임인택

임인택 〈한겨레〉 기자

〈한겨레〉에 2003년 입사했으며, 현재 문학을 담당하고 있다.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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