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 2019. 11.
[에세이]
김남시(이화여자대학교 교수)
2019. 11.
직업상 매일 책을 접한다. 책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접한다’고 말한 이유가 있다. 접하거나 만나는 모든 책을 다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접하거나 만난다는 것’은 어떤 건가? 관심이 생긴 주제와 관련해 책 제목과 저자를 알게 되면 가장 먼저 도서관에 그 책이 있는지 확인한다. 예전에는 책 제목이나 저자 제목을 가지고 알파벳으로 정리된 도서관 색인카드를 뒤적여 책을 찾아야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컴퓨터 검색을 이용한다. E-book 형태로 온라인상에서 대출받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검색을 통해 찾아낸 청구번호를 갖고 그 책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 서가에 직접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부터 책을 ‘접하거나 만나는’일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도서관에는 책들이 주제에 따라 정리되어 있기에, 내가 찾던 책 주변에는 그와 관련된 주제들의 책들이 꽂혀있기 마련이다. 먼저 내가 목표로 정한 책을 서가에서 뽑아 든 후 그 주변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살핀다. 나의 관심을 불러내는 책이라면 뽑아 목차를 살펴본다. 목차만 보아도 책의 흐름에 대해서, 그 책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목차를 훑어보는 것이니 정식으로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과정은 사실상 정식 독서보다 훨씬 더 많은 지적 자극을 준다. 제목과 목차는 미끼처럼 내 관심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그로부터 책의 내용을 상상하게 한다. 제목이 준 힌트가 나의 기존 지식과 연상에 가미되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구성된다. 마치 상대의 이름만 알고 있는 소개팅 전날 밤 같다.
물론 그런 흥분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정작 책의 내용은 나를 실망시킨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생겨난 아이디어는 내게 새로운 연구 주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것이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책을 ‘접하거나 만나는’ 것이 주는 기쁨이다. 스스로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한 아비 바르부르크라는 독일 학자는 이를 “좋은 이웃의 법칙”이라 불렀다. 한 책과 다른 책들의 사이, 곧 책들의 이웃이 특정한 책 한 권보다 더 큰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접하는’ 혹은 책과 ‘만나는’ 이 과정과 비교해보면 책을 본격적으로 ‘읽는’ 일은 오히려 흥미롭지 못할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책들은 애초 제목과 목차가 안겨준 흥분을 무참히 작살내버리기도 한다. 저자의 내용과 주장, 논거를 따라가려면 상당한 집중과 노력을 요구하는 책들도 있다. 이런 책을 읽는 과정이 즐거운 것이라고 감히 말하기는 힘들다. 저자의 논지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지식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그의 압축된 문장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사유가 요구되기도 한다. 이렇게 책의 생각과 논지를 정리하고 거기서 간과되거나 빠져있는 생각의 고리들을 보충하는 과정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일은 정신은 물론 상당한 육체적 에너지도 소모되는 노동에 가깝다. 이런 과정을 거쳐 힘겹게 ‘읽은’ 좋은 책의 효과는 서서히 나타난다. 그 책의 생각들에 나의 생각이 화학적, 전기적으로 반응하며 일으켜 낸 통찰이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하면서부터다. 마치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도 신기하게 다가온다. 좋은 책이 주는 약효는 사후적이면서도 꽤 오래간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E-book을 제공한다. 이제는 온라인 데이터로 접할 수 있는 책들의 종류와 수도 꽤 늘어났다. 이-북은 내가 원하는 책을, 도서관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아도 쉽게, 그 자리에서 금방 읽어볼 수 있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내가 찾던 것이 그 책에 나오는 어떤 구절이나 문장이고 그를 급히 인용해야 할 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북은 도서관에서 내가 찾는 책 주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만나고 접하면서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을 생략시킨다. 내가 특정하는 바로 그 책을 곧바로 내 컴퓨터에서 읽을 수 있게 하면서 그 책과 이웃이 될 수 있는 다른 많은 책들로의 접근은 차단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경우 뿐 아니라 전자기기를 통한 ‘검색’의 논리 전반에 적용된다. 우리가 찾고 있는 걸 순식간에 곧바로 특정해주는 검색의 가능성은 우리가 찾는 것의 주변과 이웃들을 접하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가 허락된다면, 서로의 스펙을 분석, 곧바로 적정 결혼 상대자를 찾아주는 서비스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는 삶의 경험을 배제하는 경향을 갖는 것과도 유사하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이 우리가 ‘접하고 만나는’ 기회 자체를 제약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인터넷 환경은 책 말고도 우리가 ‘접하고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유튜브만 클릭해보아도 수없는 콘텐츠들이 넘쳐난다. 유튜브를 통해 악기와 외국어, 요리, 공예나 프로그래밍 등을 배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콘텐츠를 찾기 위해 유튜브에 간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특정 목적을 벗어나는 관련 콘텐츠를 접하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넘쳐난다. 자신이 본 영상이 끝나면 자동으로 추천영상이 다음 동영상으로 뜨고, 내가 보고 있는 영상 아래에는 관련영상들의 리스트가 주르륵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포스트가 내 타임라인에 게시되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SNS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SNS라는 매체적 특성의 핵심인 링크는 나의 타임라인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과 사람, 사건과 이미지들을 접하고 만날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바르부르크가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과 책들 사이에 대해 말했던 ‘좋은 이웃의 법칙’이 전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과 사진, 영상, 음악 등으로 이루어진 인터넷 콘텐츠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독일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사진, 축음기, 영화와 같은 기술 장치가 개발되기 전 모든 감각정보를 기록하고 유통시키던 유일한 매체가 문자였던 시기를 문자독점시대라 부른다. 문자가 감각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은 카메라와 녹음기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을 언어라는 기호로 전환시켜 기록한다. 소리는 음표나 의성어, 메타포로 바뀌고 시각적 경험 또한 형용사, 부사 등을 동원한 문장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감각정보는 필터링된다. 키틀러의 말을 빌면 문자는 ‘감각적 데이터 흐름을 상징적 격자로 걸러내어’ 저장한다. 이렇게 저장된 감각정보는 텍스트를 읽으며 마음속에서 그 감각들을 상상하고 떠올리는 독서를 통해서만 재생된다.
이 독서능력은 꽤 오랜 기간의 훈련과 연습을 통해 획득되기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문자가 저장한 감각정보를 되살릴 수 없다. 사진, 영상, 녹음기 같은 기술적 매체는 이와 다르다. 여기서 감각정보는 문자라는 상징적 기호로 걸러지지 않은 채 저장된다. 그렇게 저장된 감각정보를 재생하기 위해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능력도 없다. 평상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듯 영상을 듣고 보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기술적 매체는 그 성격상 ‘읽기’보다는 ‘접하고 만나는’ 매체라는 것이다.
책을 접하고 만나는 것과 이런 ‘전자화된 감각정보’를 접하고 만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책과 책 사이와 유튜브 영상과 영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접하고 만나는 것’의 귀결이 두 매체에서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책의 제목과 목차를 보며 책의 내용을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 곧 책을 ‘접하거나 만나는’ 일은 책을 읽거나 쓰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반면, 흘러가는 영상들을 접하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먹방 영상은 날 불현 듯 허기지게 하지만 그로부터 어떤 먹방 영상을 만들까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요리 영상이 주는 자극은 요리를 시도하게 하지 요리 영상을 찍도록 만들지 않는다.
이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반응과 유사하다. 대개의 경우 감동적인 소설은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북돋울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멋진 여행 책은 우리에게 여행을 떠나도록 부추기지 여행 책을 쓰도록 자극하지 않는다. 물론 여행 책의 영향으로 여행을 좋아하게 된 사람이 이후 여행책의 저자가 될 수도 있다. 요리 영상에 자극받아 요리를 즐기게 된 사람이 이후 스스로 요리영상 제작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접하고 만나는’ 일이 결국 다시 책으로 귀결된다면, 유튜브 영상을 접하는 일은 그 바깥, 곧 삶의 영역으로 뻗어 나간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책을 ‘읽는 것’, 독서가 오래전부터 지향해왔던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