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2019. 07.
안중근의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왜 지금 고쳐냈나
전병근(정책연구통계센터 센터장)
2019. 07.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의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아베 정부가 수출 우대국 명단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돌연 제외하면서 촉발됐지만 뿌리는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부터 해방 이후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체결된 한일협정, 한일 위안부 합의,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문제로 얽혀 있다. 거슬러 올라가 문제의 화근인 일본 제국의 주요 설계자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였다면 그에 맞서 일제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리려 했던 인물이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였다.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를 사살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옥중에서 글을 써서 남겼는데, 자서전격인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에 이어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도중 형장으로 향했다. 논문 형식의 「동양평화론」의 경우 '서문'과 '전감'을 제외한 나머지 '현상', '복선',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상태였다.
안 의사의 거사는 두고두고 기억돼 왔지만 그가 죽기 직전까지 옥중에서 써내려간 「동양평화론」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비록 사형이 앞당겨 집행되면서 원고는 미완에 그쳤고 그마저 일본 간수의 필사본만 전해오지만,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를 논박하고 아시아의 미래 평화상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지금 더욱 빛을 발한다. 마침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문헌학적으로 전면 재검토한 비판정본이 출간됐다. 이 작업에 참여하고 해제를 맡은 안재원 서울대 인문연구원 교수를 만나 저간의 사정과 안 의사의 현재적 의미를 들어봤다. / 편집자 주
- 이번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비판정본』을 내셨습니다. 원래 서양고전학을 하셨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 거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비판정본』
“이 책은 분류하자면 동양학이고 한국학에 속한 거니까 서양고전학자인 저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방법론 측면에서 관여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은 문헌학의 기초가 없는 나라에요. 옛날 문헌을 어떻게 다루어서 현대화하고, 표준은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관한 경험이 없는 나라에요.
전통적으로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문헌학은 선본(善本) 개념이지요. 많이들 익히고 나라에서 인정하면 그게 제일 믿을 만한 판본이라고 해서 그걸 중심으로 책을 내는데, 서양의 경우는 달라요. 기본 원칙이 필사본이든 뭐든 우선 최대한 관련 있는 것은 죄다 모으는 작업부터 해요.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걸 다 집대성하지요.
반면에 우리는 선본들만 가지고 책을 만들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선본은 대개 국가가 정해 놓은 독법 혹은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해석의 범위에서 결정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지요. 이번에 독도 도서관 친구들 이사장인 여희숙 선생의 의뢰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비판정본』을 내게 되면서 서양 문헌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봤지요. 시간을 두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 동양에는 문헌학 기초가 없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그동안 한문학이나 국문학계에서도 교감 정본 같은 것을 내온 것으로 아는데요?
“중국에도 고증학이 있었지만 접근하는 시각이 서양과 달라요. 관점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중요한 것만 뽑아서 정본을 만들어요. 가령 최근에 나온 『택리지』도 그런 방식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예컨대 동네마다 이름이 다를 수도 있고 글자가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럴 경우엔 그것들도 다 살려줘야 해요. 가장 좋은 걸로 선별해 놓으면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사건들이 다 없어져 버리는 거죠. 요즘은 사람들이 이 메인 스토리보다도 그 사건들에 달라붙어 있는 곁가지들에 더 큰 관심을 갖거든요. 어떤 동네 이름은 달리 부를 수가 있어요.”
- ‘독도도서관친구들’ 의뢰로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이 단체에 대해 모르는 분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간략히 소개해주시죠.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사진촬영: 김원)
“독도도서관친구들은 처음엔 동아리 형식으로 하다가 올해 6월 15일 정식으로 사단법인 등록을 한 단체입니다. 원래 독도에 도서관을 세워주려고 돈을 모았어요. 2천원씩. 그런데 독도가 주민이 사는 데가 아니잖아요. 도서관을 지을 만한 공간도 없고요. 그래서 디지털 도서관으로 바뀌게 된 거죠. 그게 독도디지털도서관 사업이에요. 처음엔 독도를 지키는 운동으로 시작했다가가, 독도를 지키는 게 뭐겠느냐, 책 읽는 마음이 독도를 지키는 거라고, 교양이 쌓이고 내면의 정신적 힘이 쌓이면 그걸로 지키는 거다, 아무리 미사일 같은 것 갖다 놓는다고 지켜지는 것 아니라고 해서 책읽기 운동으로 간 거죠.
여기서 이제 좀 더 욕심을 내보자, 그래서 시작된 게 ‘독도글두레’입니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문헌의 비판정본을 만드는 공부 모임입니다. 구한말 갑오경장 이후 한일병합 1910년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은 일이 벌어졌어요. 특히 언어 측면에서 근대화는 사실 그때 이미 시작됐다고 보면 돼요. 안중근 의사의 저술이 그 시기 마지막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것부터 한번 해보면 좋겠다 해서 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고사했는데 여희숙 대표가 여러 차례 찾아와서 맡게 되었어요. 2년 동안 저를 포함한 연구자 다섯 사람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줬습니다.”
(번역에는 안재원(서양고전학) 이외 곽문석(신학), 김은숙(한국현대사), 김태주(한문고전), 윤재성(서양고전학)이 참여했고, 책 맨 뒤에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도운 사람들’ 명단이 가나다순으로 빼곡히 수록돼 있다.)
- 디지털 도서관이라면 미국의 페르세우스 프로젝트 같은 것 말인가요? 국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페르세우스는 미국 보스톤에 있는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의 고전학자인 그레고리 크레인(Gregory R.Crane) 교수가 시작한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이에요. 1984년부터 연구실에서 모여 컴퓨터 입력용 카드 구멍 뚫기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미 의회와 인문학재단(NEH)에서 정식으로 지원을 받으면서 서양의 그리스-라틴 고전의 메카가 되었죠. 요즘 빅데이터니 AI니 하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이 페르세우스가 더 원조에요.
간단히 말하면 고전 텍스트를 온라인에 업로드해서 누구나 무료로 접속할 수 있게 해놓은 겁니다. 디지털 사진이나 스캐닝한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 입력된 것이어서 검색도 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생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텍스트에서 용례를 뽑아내 스스로 일반화하고 사전도 만들어가지요. 그래서 저희도 시작한 것이 1894년부터 일단은 1910년까지 국내에서 나온 중요 문헌을 디지털화하는 겁니다. 이 시기가 우리 언어가 중세에서 현대어로 바뀐 가장 중요한 시기니까요.”
- 그 첫 책으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비판정본』을 내기까지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주시겠어요?
“안중근 선생의 「동양평화론」은 이미 여러 본이 나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친필 원고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인이 옮겨 적은 필사본(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본)만 있고, 이것을 가지고 국내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책이 있지요. 또 2016년 서울시에서 지원하고 ‘안중근평화연구원’이 기획한 책이 있습니다. 모두 검토해보니 우선 원문 연구는 전무하고, 오탈자가 너무 많았어요. 심지어 윤병석 선생은 영인본에다 자신이 표점까지 찍어놨어요. 그 뒤로는 이게 원본인 줄 알게 된 거죠. 엄밀하게 말하면 이건 원본 조작에 해당됩니다. 이런 걸 바로잡는 작업을 한 8개월 했어요. 어느 게 더 원본인지를 확인해야 하니까요. 보니까 일본 국회본이 맞아요.”
- 서울시만 해도 일본 국회본은 참고를 안 한 건가요?
“사실 제가 보기엔 중문과, 한문학과 학생들 시켜서 그대로 옮기면서 베껴 놓은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한글 프로그램에서 한자 변환키를 치면, 상용한자가 들어가게 되잖아요. 두 단어, 세 단어나 사자성어 같은 것. 그러니까 곳곳에서 오류가 나버리는 거지요. 그 다음 사람들은 이 분야에서 제일 유명한 분이 해놓은 거니까 이게 원본인 줄 알고 쓰는데 사실은 그 분이 끊어 놓은 대로 읽은 거예요.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비판정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이 작업이 왜 중요하냐하면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서 논문을 쓰고 한 것이 참고문헌만 한 50페이지 돼요. 수천 편입니다. 그런데 그중 3분의 2 정도가 행사용인 겁니다. 3월 26일 생신날, 8.15 기념일, 등등 모두가 의례용으로 나온 거예요. 그런 날 보훈처 같은 데서 돈이 나오고 하니까, 그냥 위대하다는 찬사만 쏟아놔요. 그러면서 문장을 막 가져다 써요. 진짜 본인이 한 말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된 상태로 막 가져다 쓰는 거죠. 그런 걸 이번에 잡아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 원래 안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것은 미완성본이지요. 그 나머지 부분까지 이번에 추정해서 완성해보셨더군요.
“이 작업을 하던 중에 우리끼리 이야기하다가 문득 안중근 선생이 살아서 원래 쓰시려고 했던 목차대로 완성했다면 어떻게 썼을까? 호기심이 생긴 거예요. 그러면 당초 목차에 들어있었던 현상, 복선, 문답까지 한번 재구성해보자고 해서 시도해본 거지요. 그때부터 추적을 했던 게, 이등박문 전집이 있어요. 일본 문헌에서 이등박문과 동양 평화, 극동 평화와 관련된 것들 찾아보니까 제목으로 잡히는 건 한두 개가 있더군요.
그 다음에 책을 찾아보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루틀리지(Routledge) 출판사에서 영어로 낸 이등박문(伊藤博文) 평전이 있었어요. 굉장히 잘 썼어요. 그걸 다 읽어보니까 이등박문도 나름 위대한 사람이더군요. 적어도 일본에서는. 동양에서 무혈로 입헌군주제를 만들고 민주공화제를 위한 틀도 만들었으니까. 초대 수상도 했고. 또 가만히 보니까 조선에 대한 나름의 생각도 있었어요. 사실은 그게 독립협회랑 연결도 되지요.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 두 개도 다 번역해서 읽어봤어요.”
- 그런 건 우리말로 번역이 안 돼 있나요?
“아무 데도 안 되어 있어요. 지피지기(知彼知己)라 했지만 우리는 이등박문이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모르고 안중근만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안중근이 왜 그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왜 위대한지는 잘 따져보지도 않지요. 사실은 안중근 선생이 동양평화론을 쓴 것도 이등박문이 극동평화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니까, ‘네가 생각하는 평화는 잘못된 거다’ 그러면서 그 논리를 정면으로 깨고 들어간 거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이런 거라면서 말이죠.
당시에 그걸 전해들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안중근이 옳다, 동양 평화는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동양에서 유교 이래 가장 큰 사람이 나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을 읽어보고 안중근 선생의 글을 정리해 놓고 보니, 아! 이걸 가지고 한중일 관계를 유럽 정도로 새로 정립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역할을 언급한 부분을 두고 안중근이 친일파였다고 한 주장도 있었지요?
“‘오늘날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옛날 방식의 일소(一掃)이고 철저한 개혁이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과 산업의 길로 들어서게 이끌 것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을 누릴 것이고, 일본은 한국 사람들과 힘을 공유할 것이다’라고 한 부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독립하고 난 다음에는 일본과도 같이 살아야지, 두들겨 패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지금 아베 총리가 마음이 급해서 불안해서 자꾸 저런 짓을 하는데 가르쳐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한중일, 미국까지 리버럴한 지식인들은 한데 묶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쓴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과 비교해서 보니까 그런 대립각이 나오더군요.”
- 서론 부분에 나오는 ‘순천득지응인(順天得地應人)’의 해석이 눈길을 끌더군요.
“이번에 새롭게 찾아서 밝혀낸 거에요. ‘순천(順天)’은 유교의 주역과 서경에도 많이 나오고 맹자에도 나오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득지(得地)’는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안 나와요. 그런데 그게 1909년에 나온 신약 번역본 마태복음에 나와요.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 山上垂訓)에서 온유한 자는 ‘지(知)를 득(得)할지어다’라고. 땅을 얻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요즘 번역은 기업을 이룩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만. 이게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동양의 유교 경전 개념하고 서양의 기독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거지요. 여기서 중요한 대목 중 하나가 호생염사(好生厭死)예요.
안 의사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 명제로 생각을 풀어갑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방식이죠. 만물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한다, 거기서부터 생각을 끌어내요. 우리 사상철학의 내력이 오래됐지만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대개는 공자 왈, 맹자 왈, 소크라테스 왈, 칸트 왈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끌어내지요. 반면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본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철학의 기본입니다. 이 점에서 안 의사의 생각은 매우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 의사가 한학을 굉장히 열심히 했고 라틴어도 했어요. 또 불어도 했고요. 그런 배경에서 보편 명제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점에서 안 의사가 또 한 번 위대했던 대목은 당시로선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렸겠지만 정경분리론(政經分離論)을 내세운 겁니다. 마치 유럽경제공동체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유럽이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 반성하면서, 우리가 석탄 때문에 싸움이 붙었으니까 그걸 공동 개발하는 쪽으로 가자고 해서 유럽연합이 시작됐잖아요. 40년 전에 안 의사가 그런 경제권 개념을 이야기한 겁니다.”
- ‘득지(得地)’가 성경에서 따왔다는 건 어떻게 알아내셨지요?
“그건 곽문석 박사가 찾아냈습니다. 우리 독도글두레의 보배이지요. 사실, 우리는 1790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 가지고 수원교회사연구소장 정종득 신부님이랑 계속 같이 공부해오던 중이었어요. 여기 사람들이랑 가톨릭 문서를 한번 찾아봤지요. 안 의사가 원래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서 어느 정도는 성경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사진촬영: 김원)
- 안중근 선생은 일찍 한학(漢學)을 했고 나중에 서학(西學)에도 밝았다지요?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인용해요. 무릇 혼이란 3가지가 있는데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이 있다, 생혼은 식물에도 있고, 깨어있는 혼은 움직이는 동물에게도 있는데, 오로지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인간만이 갖고 있는 영혼이다, 내가 유교를 공부했지만 인간에 대해, 사람 마음에 대해 영혼에 대해 이렇게 잘 설명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내가 천주교를 믿는다고 설명해요. 이처럼 보편적인 사상에 열려 있는 걸 보면, 아버지도 대단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진해 현감을 지냈고 한문 공부도 많이 했는데, 이 분이 지금부터 우리는 가톨릭이다, 유학 전통으로는 안 된다, 못 이긴다, 서양을 따라잡으려면 이걸 잡아야 된다, 당시에 그런 말을 합니다.”
-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을까요?
“앞에서 이야기한 이등박문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개념이에요. 서양의 팍스 개념은 기본적으로 지배와 통치를 바탕에 두는 개념이지요. 제국의 패권 개념입니다. 안 의사는 이 팍스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지요. 국가는 서로 평등한 것이고 국가 간 관계를 유지하려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상호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정의는 강자의 것이라는 패권 논리가 지배적인 듯하지만, 어찌 되었든 인류 역사를 놓고 볼 때 당시 안 의사의 이런 생각은 창조적이고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UN 역사가 이제 고작 100년도 안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혹자는 안 의사의 이런 생각이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합니다. 저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로 이 평화 개념을 일본 사람들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의외로 일본 학자들 중에 안중근 신봉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안 의사의 평화 개념이 중요한 점은 조선과 그 뒤를 이어 세워질 대한민국을 연결했다는 데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요?
“대한민국 헌법은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독일과 프랑스 것 갖다 놓고 인권사상에 입각해서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근데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찾은 것이지만, 이 뒷부분에 무슨 얘기가 있냐면, 동양평화의 관점에서 한국 독립은 우리가 내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무장투쟁도 하면서 달성해야 하겠지만,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고 또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할 때 가능한 것이지 설령 누가 대신 해줬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해요. 그 후 10년 만에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무오 독립 선언서 쓰면서 이걸 갖다 써요. 순천득지라는 말을.
그리고 기미 독립선언서에 가서도 다시 동양평화론이 이어져요. 한국이 독립됐을 때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 김구의 문화국가론이 나오죠. 우리가 제대로 된 정상 국가가 된다면 주변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 보편적인 세계 질서에 입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어떤 특정 강자기 패권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유엔이 나오기도 전에 이런 평화론을 제기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동안 안중근 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사로만 얘기되고 행동적인 면모만 많이 부각됐는데, 그 이면에 이런 사상가적인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위인들을 좀 깊이 못 보는 측면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안 의사의 사상가적 측면을 다시 되살려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할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거기엔 정의도 있고 공정함도 있고 평화도 있어요. 당시 사상적으로 이등박문도 대단했는데, 그게 사실은 독일의 비스마르크한테서 배운 거거든요.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 공화국을 합병할 때 써먹은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조선을 병탄해버리잖아요. 이등박문이나 비스마르크나 그 시대 제국주의 세계를 한번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자국에서는 영웅이었죠. 그렇지만 그것을 사상적으로 뒤집었다는 점에서는 안 의사가 이겼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안 의사가 생각하고 화두로 던졌던 몇 가지 키워드들은 지금도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봐요.”
- 안 의사의 어록 중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지요. 대단한 독서가였던 모양이지요?
“책은 늘 가까이에 두고 읽었던 것 같아요. 옥중에서 쓴 자서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일기에 옛날 책에서 인용한 게 많아요. 통감이나 논어, 이런 데서 읽은 걸 조금씩 바꿔 쓴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글을 많이 읽었다는 거지요. 머릿속에서 외고 있었던 겁니다. 머리가 비상했던 건 사실인 것 같아요.”
- 동양평화론의 전개 방식이 독특한데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논문 쓰기 방식으로 쓴 거에요. 이건 가톨릭에서 배운 것 같아요. 신부들이 책을 쓰는 방식이니까요. 동양의 표나 부의 양식에선 보기 어려운 목차 구조에요. 이 방식은 전형적인 가톨릭 대학교 교재에서 쓰는 방식 중 하나에요. 가톨릭 문서를 보면 황제나 교황에게 바치는 편지에서 항상 제일 먼저 이걸 어떻게 썼다, 그 다음에 연구사를 쓰고 그 다음에 왜 이걸 하게 되는지 현재 문제를 이야기하지요.”
- 안 의사가 투옥됐던 여순 감옥을 8년 전쯤 가본 적이 있습니다. 당직실 옆에 안 의사가 수감돼 있었다더군요. 사형을 언도받은 상황에서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자기 사상을 글로 쓸 시간을 달라고 했다는 게 대단한 배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번 작업 중에 이 글을 소리 내서 한 12번 읽었거든요. 제가 한문 전공자가 아니어서 문장은 잘 쓴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세련되어 있진 않아요. 그런데 힘이 느껴집니다. 일부러 운을 맞춘다든가 하진 않아요. 그냥 사태의 핵심으로 직진해버려요. 그러니까 굉장히 정신이 맑았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 주인공으로 치자면 죽음 직전에 내면적으로 고민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 글만 보면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 나이에 가지고 있는 열사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 이 문서가 빛을 보게 된 과정도 극적인데요. 본인이 썼던 건 소실됐다고...
“글쎄요. 소실됐는지는 알 수 없어요. 제 생각에 일본 사람들은 문서를 없애지 않아요. 아마 일본 법무부 기록 보관소 같은 데 있을 거예요. 지금 우리에게 전해오는 것은 일본 간수가 베낀 거라고 해요. 동양평화론은 한 사람이 베끼고, 자서전은 세 사람이 베껴가지고 갖고 나온 거에요.”
- 원본은 어딘가에 있을 거란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지요?
“모르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일본사람의 관행으로 볼 때는 이런 문서를 절대로 안 버리거든요. 국가 기록 보관소나 어딘가 들어 있을 거예요 헌종,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양 조씨(漢陽 趙氏) 조인영이라고 있어요. 이 분이 대단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추사에게 돈을 대줘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비문을 탁본해서 책을 만들어놨어요. 전쟁 나면서 싹 없어졌는데, 이게 일본 오사카 대학 창고에 있었어요. 그걸 고려대에서 들여왔죠.”
- 기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에 비판정본 해제문을 쓰시면서 이전 판본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하셨던데요. 어떤 것은 관계자나 기관의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폐기돼야 마땅하다고까지 하셨지요. 출간 후 반론이나 항의 같은 것 없었나요?
“아마 본인들이 창피해서 못 할 걸요? 저희 것도 물론 오탈자가 있겠지만, 앞의 것들은 오류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명백한 오역을 버젓이 두고, 그 뒤의 사람들은 또 원문도 안 보고 그걸 베낀 겁니다. 그래놓고 행사 때마다 지원금을 받아 찬사만 늘어놓기를 반복합니다. 이거 원문이 A4 용지로 대략 10장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걸 이렇게 해 놓으면, 그러고도 앉아서 ‘극일하자, 일본을 이기자’고 하면, 일본 사람이 볼 때는 우스운 겁니다.
문명이라는 게 얼마나 섬세한 수준인데,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안 해놓고 디지털 혁명 한다, 뭐 한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그래 놓고 민족 영웅, 국가적 영웅이라고 떠들기만 하니 부끄러운 노릇이죠. 이런 사례들이 비일비재해요. 오류 지적에 대한 반박이라고요? 저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 썼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조차 오류투성이에요. 영인본 스캔해 놓은 것하고 한글 파일하고 비교하면 안 맞는 게 많아요.
대표적인 예가 ‘함경도’를 ‘감경도’로 해놓은 거예요. 그게 왜 중요하냐. 일본 사람들은 히읗 발음을 못 받아들였어요. 우리는 고려 말부터 히읗 발음을 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학교’, 일본은 ‘각고’라고 부르잖아요. 강제병합 이후에는 신문에서 ‘감경도’라고 쓴 데가 많아요. 이걸 전부 틀린 표기라고 해서 싹 고쳐놓으면 관련 검색에서 다 빠지게 돼요. 감경도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나 정보들이 다 빠지게 되는 거죠. 틀린 건 틀린 대로 맞는 건 맞는 대로 놔두고 주석을 달아줘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게 너무 많아요.”
- 그 점은 국가 기본 텍스트의 발굴, 복원, 보존, 그리고 문헌학의 중요성하고도 관계가 될 텐데요. 이번 책이 그런 문제를 공론화한 점도 중요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작업하려는 것도 그 부분입니다. 1910년대에 일제가 들어서면서 구한말에 나온 한국 책 중에서 약 40종을 금지해요. 이게 한국의 근대화와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우리는 흔히 박은식, 신채호하면 독립운동가나 민족사학자로만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가령 박은식 선생은 공화파이고 신채호는 입헌군주파입니다. 박은식 선생이 사람 시켜서 번역한 책이 워싱턴(화성돈 華盛頓) 전기에요. 신채호 선생은 표트르 대제 책을 내요. 왜 그랬겠어요? 한국이 나라가 좀 커지려면 워싱턴을 봐야 한다, 입헌군주제에 입각해서는 고종을 표트로 대제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각각 그랬던 겁니다. 이런 책 내면서 같이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도 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현대 문명의 중요 제도 용어들 있잖아요. 그게 다 이 때 만들어져요. 책이 수백 권이 나왔으니까. 사실이 이런데도 흔히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본 아니면 우리는 번역을 못 했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전에 개념어를 다 쓰고 있었어요. 갑오경장부터 1910년까지 그 15년 동안에 출판되고 통용되는 것들 보면, 우리가 근대어로 넘어갈 수 있는 준비를 했던 과정이 충분히 나와요. 우리도 이미 스스로 개념도 만들고 문장도 만들고 한 거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아까 말한 역동사전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때 통용됐던 개념어가, 가령 일본을 통해 학문용으로 받아들여진 것하고 차이가 있나요?
“지금 쓴 거랑 똑같아요. 왜냐면 한자문명권에서는 한자가 만들어지는 운명적 성격이 있어요. 명청 때 서양어를 예수회를 통해 만난 것도 그렇고, 불교 시대에도 마찬가지고. 일본이 먼저 했다, 조선이 먼저 했다 그런 건 없어요. 일본에서 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명청 때 들어온 예수회 사람들이 기초적인 작업을 다 해주었으니까, 그 위에서 일본이 만든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 사상의 근대적 기초에 해당하는 것들을 부각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정치도 진영론에 빠져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는데, 한반도 문제를 좀 세계사적 맥락에서, 동양의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 의사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 문화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 공감을 하면서도 거기에 들어가는 수고와 노력에는 너무나 인색하거나 무관심한 것 같아요.
“실은 국가 연구재단 같은 데서 그런 걸 해야 해요. 이마저 성과 중심으로 가다 보니까. 시간도 돈도 너무 조금 주고 뽑아가는 것은 너무 많게 잡으니 제대로 안 되죠. 언어는 결국 축적의 체계잖아요. 기억의 축적. 그걸 위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고 그 방법론의 기초가 고전문헌학인데 서양은 그런 식으로 가고 있죠. 중국도 일본도 그렇게 가는데 우리는 여기에는 돈을 안 써요.”
- 중국도 일본도 한다는 건 그런 전담 기구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일본은 교토 대학과 동경대학에 관련 학과가 있어요. 일본의 불교학이 세계 최고인 이유가 있죠. 우린 아직 고려 팔만대장경 경판 연구 한 번 제대로 안 했잖아요. 그러니 그걸 가지고 뭘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중국은 런민대학(中國人民大學)에서 하고 있어요. 아예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지고 운영을 해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은 핵심 사업으로 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국가 지원 하에 체계적으로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지요.”
- 우리는 왜 안 되고 있나요?
“무엇보다 지금은 인문학이 찬밥 신세이다 보니...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인문학 하는 사람들도 디지털 코딩 배우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디지털화도 일정 정도 활성화되고 나면 특성상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책으로도 내게 됩니다. 디지털로 생산되다가 어느 시기에는 딱 끊고 판본으로 정해지고 다음 번 고칠 때 반영하고 또 꺼내고 그런 식으로 가는 거죠.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일정 시기에는 끊어서 묶어서 보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치가 있는 것들만 계속 남게 되는 거죠.”
-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제2의 침략,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요?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사진촬영: 김원)
“유럽과 비교해 보았을 때, 동양은 그러니까 아시아는 아직 국가들 사이에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단계가 아닙니다. 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역 패권을 잡기 위한 경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곳이 특히 동북아 지역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안 의사가 주장하는 동양평화론은 정경분리의 원칙에 입각해서, 한중일 삼국의 경제 공동체를 주창했고, 만국공법의 원칙에 따라 평등과 동등과 상호호혜 원칙에 입각해서 한중일 삼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인류의 공존과 공생 그리고 공영을 도모하는 문명 공동체로 나가자는 제안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베의 군국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바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일 겁니다. 아베와 일본도 아울러 중국도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인류 문명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동양의 지역 문제를 살피고 관리할 때라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북한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지역 분쟁 구조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시각은 아시아를 영원히 이류 대륙으로, 동양 문명을 이류 문명에 머물게 만들 겁니다. 동양 문명에는 현대 문명이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그냥 자본화된 ‘시멘트 문명’ 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고작 찾는다면 박물관에 보존된 전통 유물 정도가 동양 문명을 대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에 통용되고 공용되는 “삶의 방식(modus vivendi)”를 만들지 못하면 그 문명은 이미 죽은 겁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아울러 인류 보편의 시각에서 한반도의 문제도 접근해야 할 때예요. 그래야 세계의 패권 국가인 미국도 함부로 아시아를 못할 겁니다. 아니 더불어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공동의 문제들이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 문제를 예로 들 수 있지요. 아울러 자본의 양적 과잉 상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또 다른 사례입니다.”
- 다음 작업 계획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 비판정본을 작업 중입니다. 아울러 디지털 도서관의 핵심 기능인 역동사전(Dynamic Lexicon)도 계속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