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Vol.13  202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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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다이어리 8]
산속에 서점을 열며

 

 

 

나무선(터득골북샵 대표)

 

2020. 08.


 


터득골북샵 로고

 

 

 

원주로 터를 옮기다

 

1996년 원주로 이사 와 25년을 살았다. 9년은 시골 아파트에서 16년은 외곽의 산속에서.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다이내믹한 삶이었다. 서울을 떠날 당시는 시골의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이끌려 무조건 시골에 가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원주 버스터미널만 내리면 그냥 좋았다. 호흡도 깊어지고 조용하고 사람들도 좋고 무언지 몰라도 편안했다. 시골로 바로 들어가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땅을 마련할 돈도 집을 지을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였다. 그러나 주변에 호수도 있고 국립공원 같은 시설을 갖춘 대학캠퍼스도 있는 시골 아파트는 아주 좋은 시골생활 준비 기간이었다.

 

인근 시골집을 빌려 작업실로 쓰면서 나름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크게 손대지 않고 도배 정도의 수리만으로 시골에 착륙했지만 행복감은 아주 컸다. 사계절 동안 자연의 리듬을 흠뻑 체험한 기간이었다. 눈높이에서 풀도 관찰하고 다양한 곤충과 파충류와도 친하게 지냈다. 자주 등장하는 뱀과 눈맞춤을 하며 적당히 의사를 전달하는 재미도 있었다. 잡초와의 대화 끝에 비슷한 경험을 한 필자를 만난 게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 선생이다. 거의 자연에 미치다시피 모든 게 궁금했다. 풀 이야기부터 산 이야기까지 많은 책을 기획하고 만들었다. 이어 집짓기와 목공으로 관심이 이어졌다. 목공은 멀지 않은 곳의, 지금은 영화 〈기생충〉에 가구 세트를 제공해 유명해진 가구 작가에게 2년을 배웠다. 10대에 그림을 열심히 그렸지만 목공은 전혀 다른 체험이었다. 공구부터 재료, 짜맞춤, 도장까지 만들기에 몰입하는 시간은 일종의 명상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일과를 마치면 피곤했지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이웃에 흙집학교를 운영하는 분이 있어 1기 수료생이 되었다. 벌써 16년 넘게 1,000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했으니 그때는 그렇게 오래 학교를 운영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 시골생활에 필요한 스승이 다 있었다. 시골 아파트 생활 7년 차에 드디어 나도 흙집을 짓게 되었다. 목공과 흙집학교를 수료한 터라 두려운 것이 없었다. 궁금한 것은 이웃에게 물을 수 있고 몸으로 부딪치면 현장이 가르쳐준다는 것을 이미 배우는 과정에서 알아챘기 때문이다.

 


흙집학교 시네우네 강의 모습


흙집학교 시네우네 강의 모습

 

 

 

마을에 필요한 주민으로 거듭나다

 

16년 전 원주 외곽의 산으로 들어와 흙집으로 사랑채부터 살림집과 사무실을 지었고, 4년 전 살림집과 사무실로 쓰던 곳을 서점과 카페로 바꾸어 ‘터득골북샵’을 열었다. 지역에 정착한 이야기를 간단히 하면 위 세 줄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16년 동안 어떤 일을 경험했던가? 나는 어떤 공부를 했던 것일까?

 

시골로 들어와 살기 시작할 무렵 생태공동체 붐이 일었다. 외국 공동체마을을 다녀온 여행기가 큰 관심을 끌었고 대안사회에 관한 열망도 컸다. 나도 2003년 겨울 인도와 미국의 공동체 40여 곳을 여행했다. 시골로 들어가기 전, 이미 오래전 공동체마을을 조성한 선배 마을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대안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만든 마을은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했다. 또, 20대에 그렇게 몰두했던 명상가들의 공간도 보고 싶었다. 책에 몰두하고 경도되었던 스승들의 공간은 어떨지 꼭 느껴보고 싶었다. 두 달 동안 강행군 끝에 돌아온 나는 깨달았다. 내가 분별심에 크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공동체가 지금 살고 있는 곳과 많이 다를 거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40여 곳의 명상 공간과 생태공동체를 다녀보았지만 살고 싶은 곳은 없었다. 어느 기간 머무를 수는 있겠으나 늙도록 살고 싶은 곳은 없었다. 30년도 넘은 어느 공동체는 초기 멤버들조차도 거기에 살지 않을뿐더러 한 분 남은 여성도 세 번이나 들락거리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마을을 만든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았다. 오히려 마을에 깃들어 사는 게 옳다고 느껴졌다. 마을 복지단체에서 발간하는 회보 뒷부분에 마을회보를 8년 동안 편집했다. 마을 어르신들을 차례차례 인터뷰하고 마을의 폐교된 초등학교가 만들어질 당시의 이야기와 크고 작은 마을 이슈를 취재해 게재했다. 마을회보 편집회의 때는 두 마을의 이장님과 노인회장님, 복지단체 대표님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공유하고 함께 식사했다. 계간이었지만 8년의 세월 동안 마을 어르신, 이장님들과 많이 친해졌다. 마을의 정서도 잘 느껴졌고 동네 모임에도 초대받게 되었다. 마을에 필요한 주민으로 받아들여주니 더없이 행복했다.

 

원주 생활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 원주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알게 됐다. 원주로 오기 한 해 전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후학들과 무위당 모임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덧 40대로 접어든 나는 지역과 이웃에 관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지역을 큰 ‘나’로 삼고 평생을 사셨던 무위당 선생님을 알면 알수록 빠져들었다. ‘무위당사람들’ 실행위원 일을 하며 편집인으로 뜻있는 분들과 회보 작업과 편집 일을 함께했다. 시민단체 일은 많은 지역 선후배를 만나는 벅찬 경험이었다.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흔치 않은 공동체 경험이었다. 장일순 선생님 서거 10주기를 맞아 만든 일화집 『좁쌀 한 알』은 책을 만들며 눈물을 흘린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일 것이다. 원주와 전국에 흩어진 선생님 일화와 붓글씨를 모으는 일을 했다. 만나는 한 분 한 분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마치 선생님을 대하듯 극진하게 취재하는 사람들을 맞았다. 어떻게 사셨기에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나도록 이럴 수 있을까.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평생 원주를 떠난 적이 없었던 철저한 지역 주민이셨던 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돕고 마음을 열었을까. 17년이나 지났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의 여운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주에 사는 큰 숙제가 있었다. 지역에서 밥벌이를 하며 지역 사람들과 함께 회사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었다. 경제활동이 없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니 평생 꿈꾸던 것을 일로 실행해보고 싶은 꿈 말이다. 마음공부와 일과 시간관리를 통합하는 콘텐츠로 2015년 그림책 『오냐나무』를 만들었다. 시간관리 앱과 다이어리, 연극,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결하는 인생설계 콘텐츠였다.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선한 의지의 사람들을 위한 나침반이랄까. 그림책에 이어 연극과 애니메이션 제작까지는 초기 투자가 필요했지만 정부기관을 비롯한 많은 곳의 투자 유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5년은 그런 해였다. 다음 해에 촛불시위가 예고되었듯이.

 


그림책 『오냐나무』처럼 소원을 달아놓은 모습


그림책 『오냐나무』처럼 소원을 달아놓은 모습


오냐나무 어린이 캠프


오냐나무 어린이 캠프

 

 

 

함께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터득골북샵

 

2016년 9월 터득골북샵을 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서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케팅 이론이나 계산을 떠나 소명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주말텃밭을 함께하고 숲 산책로와 야외공연장을 만들었다. 처가 쓴 그림책 『오냐나무』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고 불러주는 공연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전환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주제의 북클럽과 북스테이도 운영한다. 숲속의 동네서점에서 일한 4년 동안 서점에 대한 고정관념이 모두 바뀌었다.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 학습공간 같은 것을 꿈꾸며 숲으로 들어왔지만 서점이 그 소원과 부합된 셈이다. 큰 도로에서 7킬로미터 거리에, 아무런 상점도 없는 산속에 서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었지만 주말만 되면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느 일간지 기자는 여름 휴가철에 북스테이 특집을 취재하러 왔다가 사람들로 붐비는 서점을 보고 깊은 산속에 서점이 있다는 사실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게 더 신기하다고 기사를 썼다.

 

주변 지인들은 못내 걱정스럽던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었다. 대영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될 정도로 대가인 어느 도예가는 2~3년 쓸 그릇을 육십 점이나 기증해주었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했던 건축가는 데크와 책장으로 쓸 나무와 개성 넘치는 커다란 탁자를 트럭 가득 실어 선물해주셨다. 산림청의 어느 박사님은 6년 동안이나 연구한 ‘숲밭’을 텃밭으로 자문해주었다. 이웃 공방의 목수님은 폐교된 초등학교 앞마당에서 베어 낸 플라타너스로 만든 큰 탁자를 재료비만 받고 만들어주었다. 평생 새집을 지어 온 새집목수님은 빈약한 서가를 보고 책 구입용 금일봉을 주셨다. 그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이 답지되었다. 서점은 예전 시골 학교처럼 다른 울림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른 가게였다면 이렇게 도움의 손길이 많이 있었을까? 어떤 방문객이 농담 삼아 말한 “요즘도 책 읽는 사람이 있어요?”라는 예측과는 달리 각종 독서모임과 교사들의 공부모임부터 젊은 주부들과 자녀들까지 다양한 독서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은 거리에서 만났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25년을 원주에 살았지만 산속 서점에서 만나는 사람은 왠지 달라 보였다.

 

여러 사람들과 터득골을 함께 즐긴다고 결정하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저절로 떠올랐다.신록이 아름답던 어느 날 대학시절 밴드활동을 한 산림청 박사님이 문득 산 언덕배기에 객석을 만들고 야외극장을 만들면 좋겠다는 얘길 하셨다. 소나무로 가득하여 대낮에도 반그늘이 되는 곳이라 무대와 객석으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토목 공사할 때 남은 돌이 많이 쌓여있는 터라 따로 재료를 구입할 일도 없었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고대 그리스의 야외극장보다 아름다운 공연장이 탄생했다. 첫 공연은 알리지도 않았건만 100명이나 함께 해 산속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을 열고 10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삶의 전환을 꿈꾸는 분들의 북스테이가 줄을 이었다. 자연에 살고 싶은데 수익에 자신감이 없어 망설이던 분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40대의 전문직을 가진 분들과 은퇴를 앞둔 50대 중후반의 직장인들이 많았다. 책 공간을 중심으로 자연에 깃들고 싶은 로망을 엿볼 수 있었다.

 

서점은 인생의 전환을 꿈꾸어 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아닌가 싶다. 단지 책만 파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옹색한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만날 수 있는 둥지라고 할 수 있다. 전환이 필요하거나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시간,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길을 보았던 경험은 누구나 하지 않았던가. 지역의 방관자에서 창조자로, 꿈꾸는 자에서 행위자로 오롯이 함께 토론해볼 수 있는 곳. 동네서점 터득골북샵은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편집하는 공간이자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휴식의 공간이 되면 좋겠다. 산속 서점 터득골북샵은 내 인생의 모멘텀이 되었다. 여기서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내는 돈으로 생활하고, 지역의 멘토들을 만나고, 함께 즐기면 논다.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북콘서트, 음악회 등이 열리는 야외공연장 모습


북콘서트, 음악회 등이 열리는 야외공연장 모습


터득골북샵 북스테이 모습


터득골북샵 북스테이 모습


터득골북샵에서 바라본 전경


터득골북샵에서 바라본 전경

나무선(터득골북샵 대표)

2016년 9월 원주 외곽 터득골에 ‘터득골북샵’ 서점을 열었다. 오랫동안 시골생활을 꿈꾸며 25년 전 원주로 내려온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꿈꾸는 것을 공부하고 실현하는 적극적인 학습공간으로서의 인생학교 터득골북샵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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