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2019. 05.
보고서도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준웅(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2019. 05.
정부 보고서로 책을 만들어 판다. 심지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책을 낸 출판사는 세금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원고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고료는 주지 않아도 된다. 거의 꿈같은 장사 아닌가.
〈The Mueller Report〉 by The Washington Post
지난 3월 미국에서 출간된 〈뮬러 보고서〉 이야기다. 저자인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는 2016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측과 공모하고 수사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윌리엄 바 법무장관에게 제출했다. 보고서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고조된 상황에서 바 법무장관은 보고서의 일부를 삭제한 편집본을 공개한 것이다. 보고서는 모두 448쪽에 달했다. 사람들이 읽기나 할까. 웬걸, 미국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질지 촉각을 세우던 시민들은 앞 다퉈 미 법무부 홈페이지에서 보고서를 내려 받았다. 일부 출판사들은 더욱 재빠르게 움직였다. 보고서를 단행본으로 편집해 종이책으로 출간까지 한 것이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집계 논픽션 부문 종합 1위에까지 올랐다.
미국에서 공기관의 보고서가 책으로까지 출간되는 일은 사실 드물지 않다. 1975년 닉슨 정부 시절 불법 도청을 조사했던 워터게이트 보고서,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성추문을 조사했던 스타 보고서, 그리고 2004년 9.11 테러 사건을 조사한 위원회의 보고서 등이 책으로도 나와 인기를 끌었다. 그밖에 정부나 정부 관련 공기관이 직접 보고서를 출판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정부가 이미 공개한 문서를 토대로 분석을 더하고 종합해서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비결이 뭘까?
문서 작성은 정부의 핵심 업무
첫째, 기록이 곧 정부의 기본 책무라는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치적, 사법적, 사회적 사안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종합적인 제언으로 정리해 보고서를 내는 일이야말로 다른 누가 아닌 정부가 할 일이라는 인식이다. 실제로 행정부 각 부처는 물론 사법부와 입법부까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해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해서 검토한다.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물은 당대 정부 정책에 활용되는 것은 물론 후대 정부의 참조 자료로 남는다. 대표적인 예로 이른바 ‘펜타곤 문서’가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지시로 18개월에 걸쳐 작성된 〈미국-베트남 관계 : 1945-67〉이란 제목의 보고서는 모두 47권에 달한다. 약 3천 쪽의 서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약 4천 쪽의 부속 문서를 정리했다.
정보 투명성의 문화
둘째, 정부가 작성한 문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개를 원칙으로 삼는다. 사실 정권을 쥔 세력이나 국정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정보 공개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근대 국가는 태생적으로 자료와 통계를 집적하려는 필요와 함께, 그렇게 수집한 자료와 통계를 독점하고 감춰두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는다. 그러나 그에 맞서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는 국가의 정보 독점과 기밀 추구의 동기를 억제하려 든다. 그 결과 정부 활동의 공개 범위를 되도록 확대하고, 정부의 ‘설명책임(accountability)’ 수행을 더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설명책임의 수행이란 시민의 질문에 답하고, 문제 제기에 대응하고, 책임 규명 요구에 응답하는 일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현대 민주정은 자기 활동을 정당화한다. 가령, 모든 정부 관련 사안에 대해 평이한 국어로 작성한 기록물을 남긴다든지, 작성한 문서의 목록을 만들어 관리한다든지, 정부의 문서 내용과 목록을 열람하고 검색할 수 있는 웹 사이트를 만든다든지, 문서를 읽지 못하는 시민을 위한 대안적 보고 체계를 완비한다든지, 문서 내용에 대한 질문과 제언에 응답하는 창구를 만들어 운영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보고서로 나타나는 국가 역량
셋째, 나는 이것이 특히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결정적 이유라고 보는데, 관료의 글쓰기 능력과 공공문의 문체가 관건이다. 이른바 '문명한' 국가란 유려한 문장과 명쾌한 논리를 빚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자들이 관료로 일하는 나라를 뜻한다. 유려한 문장과 논변으로 이루어진 문서를 당대는 물론 후대를 위해 축적해 나가는 나라야말로 문명한 국가다.
우리나라 개조식 공문서로는 요원
이쯤에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선 언감생심이다. 왜 그런가.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정부의 공식 문체로 자리 잡은 ‘개조식 문체’를 지적해왔다. '개조식'이란 내용을 길게 풀어서 표현하지 않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만 간추려 항목별로 나열하듯이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함', '-음', '-임'으로 끝을 맺는 이런 서술 방식은 일제 공문서의 잔재란 말도 있다. 혹시라도 상부나 내부 보고용으로는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문장은 글쓴이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주장은 어떻게 도출한 것인지, 자료의 출처는 어디며, 어떤 검토를 거친 것인지 등에 대해 명료하게 책임지는 쪽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쪽에 가깝다. 나아가 출판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개조식은 문장의 졸렬함이 더욱 문제가 된다. 개조식으로 작성한 구절에 주어를 찾아 주고, 어미를 붙여 주고, 문장을 이어주는 방식으로 손을 본들 출판물로 내놓을 수 있을까? 이준웅(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2011년 한길사에서 〈말과 권력〉을 출판했다. 고대 레토릭과 현대 민주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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