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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46  202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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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를 말한다: 작가]
나라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약자를 지키는 게 정의다

 

 

 

명로진(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2023. 08.


 

최근 만난 후배 C씨는 재개발 아파트 조합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나야 부동산을 모르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재개발 지역에 집이 있었고 감정가가 나중에 생길 아파트 가격보다 높았다. 현재 아파트가 다 완공되었는데 조합에서 차액을 주지 않고 있다. 돈을 돌려받는 걸 어렵게 해 놔서 매달 많은 이자를 부담하고 있다. 언제 돌려받을지도 알 수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합은 돈과 조직, 용역을 거느리고 노인이 대부분인 조합원에게 무슨무슨 합의서를 받고, 총회를 하여 불합리한 조항을 만들어 냈단다.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짧고, 몇백 쪽의 문서를 읽을 능력이 없는 어르신들은 그저 “알아서 하라”고 조합에 맡긴다. 그런데 조합은 건설사 측에 유리한 일만 한다는 것이다. 후배 C씨는 만시지탄(晩時之歎), 뜻있는 조합원을 모아 싸우고 있지만 돈도 조직도 인원도 딸리는 형편이라 어렵게 투쟁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럴 때 나서서 중재하라고 있는 게 공권력이다.

 

기독교 계열의 한 대학에서는 2017년, 교내에서 성소수자 강연을 주최했던 학생 석 모 씨(27)를 무기정학 처분했다. 학생은 약자고 학교는 강자다. 학생들은 학교의 징계에 반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징계를 철회하라”는 권고를 학교에 내렸다. (학교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은 ‘동성애자는 입학을 금지한다’는 신입생 모집 요강을 내기도 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럴 때 나서서 소수자를 보호하라고 있는 게 권력이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가 있다 치자. 누구든 반사적으로 “안 돼!” 하며 그 아이를 구하려 할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어른이 아이의 손목을 비틀고 때리고 못살게 군다면, 어른을 말려야 정상이다. 그 어른이 힘이 있다고 해서 같이 어린아이의 손을 비틀어선 안 된다. 어린아이 손 비틀기가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손 비트는 어른을 막아야 한다. 그럴 때 나서서 아이를 도우라고 있는 게 나라다.

 

개정 이미지

 

 

서설이 길었다. 곧 도서정가제가 개정된다. 나는 힘 있고 돈 있는 자본의 편에 유리하게 이 제도가 바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이 ‘주인’인 사회다. 돈이 먼저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이다. 국가가 중립을 지켜도 사회는 돈과 힘이 있는 쪽에 유리하게 굴러간다. 그래서 국가는 되도록 약자(빈자)를 보호하고 강자(부자)를 견제해야 한다. 그래야 운동장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대한 우려 섞인 소식이 들린다. 앞으로 위탁 예산을 대부분 삭감하려 한다는 비공식 첩보도 있다. 작은도서관 예산을 전액 삭감한다든지, 이에 반대한 도서관장을 경질한다든지 대체로 현 정부에 들어서 들리는 소식은 ‘반(反)도서-반(反)문화’ 정책이다. 왜 그럴까? 그게 자본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돈과 힘을 가진 쪽에 유리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사회의 큰 틀이 어떤 방향을 향해 갈 때, 문화의 지향도 그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도서정가제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대형서점과 유통업체에 유리한 쪽으로 바뀔 것 같다. 창작자로서는 우울한 예견이다.

 

앞서 예를 든 조합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도 힘없는 조합원이 된 기분이었다. 성소수자가 된 느낌이고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 같았다. 출판 시장에서 저자가 강자 같지만 99%는 을이다. 출판 계약서에만 ‘갑’이라고 명기되어 있을 뿐이다. 30년 넘은 출판 경험상 출판 계약서상에 저작자를 처음으로 ‘갑’이라고 새겨 넣은 게 1990년대 후반이다. 그 이전까지는 계약서상에도 저자는 을이었다. 어떤 출판사는 내게 “을은 향후 10년간 갑 출판사와 전속이며, 그 이후 자동으로 10년씩 이 계약을 연장한다”는 계약서를 내민 적도 있다.

 

출판사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저자의 실존이다. 출판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이거 고쳐 주세요.” 하는 저자는 드물다. 조합을 믿고 총회에서 찬성하는 조합원처럼 그저 출판사를 믿고 서명할 뿐이다. 창작자가 순진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자는 창작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서 계약서의 문구를 시시콜콜 교정할 여력이 없다. 이런 건 출판사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잘 만들어 줘야 한다.

 

출판사와 합리적인 계약을 맺고 책을 냈다 치자. 어느 날 도서관에 가 보면 내 책이 인기리에 대출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뻐해야 할까? 아니다. 도서관에서 백 번 대출이 되어봤자 저자에게는 1원 한 장 돌아오는 게 없다. 다른 날 중고 책방에 가 보니 내 책이 정가의 반에 팔리고 있다. 좋아해야 할까? 역시 중고 책방에서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내게 돌아오는 이익은 없다. 또 다른 날 교보문고에 갔더니 내 책이 50% 세일을 하고 있다. 거기에 예쁜 머그컵까지 딸려 파는데 사람들은 머그컵을 사려고 책값을 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창작이고 뭐고 뮤즈를 욕하게 된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도서정가제보다 더 시급한 것이 ‘공공대출권’이다. 1946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세계 33개국이 실시하는 제도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대해 그 책을 쓴 저자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보상금은 정부 예산으로 지급한다. 이런 것까지 세금을 쓰라고? 이렇게 묻는 사람에게는 K-POP과 드라마, 영화가 세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보라고 권하겠다. 영상물과 음악은 철저하게 저작권자를 보호한다. 함부로 복제, 전송, 공유하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 놓았다. 왜? 콘텐츠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막대한 돈이. 콘텐츠가 만들어 내는 자본은 영향력을 수반한다. 세계인이 한국 문화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한국의 힘과 위상은 높아진다.

 

현재 음악의 경우 공연 및 방송, 스트리밍, 웹 캐스팅, 복제, 대여, 영화 등 전파 가능한 거의 모든 미디어를 통한 이용에 대해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2023년 상반기에만 3,887억 원의 저작권료를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출처: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실시간 회계 정보)

 

히트곡을 작사, 작곡, 편곡하는 창작자들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든든한 배경과 지원 그리고 저작권료라는 실질적 보상 덕에 여유 있는 환경에서 노래를 만들고 있다. 출판에 목매다는 저자들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같은 단체를 만들든가 작사를 하든가 택일해야 한다. 사실 도서정가제는 국가가 국민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 하나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도서정가제보다 더 실제적인 공공대출권 제도를 하루 속히 제정해 주길 바랄 뿐이다.

 

도서 이미지

 

 

지난 1~2월 대통령실 국민제안 웹사이트에서 ‘도서정가제 적용 예외(장기 재고 도서 자율 할인 판매)’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참여자의 46%가 도서정가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도서정가제 유지가 필요하다는 참여자는 3%에 불과했다. 유지가 필요하다고 답한 이들은 “도서정가제가 도서생태계의 몰락을 근근이 막고 있는 동네책방, 지역서점의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탄력적인 도서정가제 적용 예외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은 95.2%에 달했다. 여기서 ‘탄력적’이란 것은 그야말로 적용 예외 범위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므로 수치에 큰 의미는 없다.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도서 가격 상승과 독서 인구 감소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자출판물에 대한 도서정가제 적용 제외 의견을 낸 참여자들은 전자출판물이 소규모 영세업자가 취급하지 않고 인쇄비와 유통비 등이 소요되지 않는 무형의 콘텐츠임을 이유로 들어 일반적인 도서와는 다른 분류로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출처: 〈데일리팝〉, 2023.5.12.)

 

도서정가제에 장단점이 있고 근본 취지에 이의를 달 사람도 있겠지만 중소출판사와 서점, 저자를 위한 제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군가 ‘왜 책만 정가제를 해야 하나? 책도 하나의 상품이다.’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왜 도서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짓나? 지방자치단체마다 있는 문화회관은 왜 나라에서 짓나?’

 

수년 전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르후스에 간 적이 있다. 인구 30만 명의 작은 도시인 이곳의 명물은 ‘도켄(Dokk1)’이라는 시립도서관이다. 도서관에 들어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시설이 너무 훌륭했다. 중소 단위의 세미나실과 모임 공간, 휴게 시설, 놀이터 등 인테리어가 최고급 호텔 못지않았다. 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의실과 모임 장소에서는 매달 100여 개의 이벤트가 열린다. 매년 1,300만 명이 이용하는 이곳에는 30만 종의 자료가 갖추어져 있다. 대지 면적 1만㎡에 연면적 2,800㎡인 이곳은 시에서 2,500억 원을 들여 지었다. 자재가 최고급인 걸로 봐서 누군가 중간에 건축비를 착복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외국인인 나는 완전 개가식(開架式)인 이곳 도서관을 아무 제지를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었다. 모 대학 겸임교수였던 당시 나는 대학도서관을 이용할 때 복잡한 서류를 제출한 뒤 받은 출입증이 있어야 했다. 오르후스 시립도서관 사서 다니엘 스반홀름 씨에게 물었다. “시설이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오르후스 시민의 지적인 성장을 돕는 공간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어떤 시설이 도서관보다 더 화려해야 하는가?”(명로진, 〈한국일보〉, 2016.7.5.에서 고쳐 인용)

 

도서정가제는 국가가 대형서점과 유통사에 비해 약자인 중소서점, 출판사, 저자를 응원하는 최소한의 정책이다. 시민의 지적인 성장을 돕는 책을 팔면서 자본의 논리만 따르지 말라는 일말의 권고다. 계란판으로 버려지는 인쇄물이 무수한 세상에서 공들여 쓴 책이 나오자마자 떨이로 팔려나가지는 않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에 대한 마지막 지지다. 곧 있을 개정에서 개악이 아닌 개선이 되길 바란다. 그보다 더 긴 안목과 깊은 궁리로 저자뿐 아니라 국민의 복지를 위한 큰 그림이 그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명로진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논어는 처음이지?』(세종서적, 2017) 등 60권의 책을 썼다. 60권의 책을 쓰기 위해 200여 개의 출판사와 접촉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인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쳤다. 6대륙을 여행했고 국제 살사 댄스 축제를 개최했다. 스쿠버 다이빙 어드밴스드 자격증이 있으며 안데스 산맥 6천 미터급 침보라소 봉을 올랐다.
roz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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