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탐구

Vol.48  202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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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를 말한다: 소비자 찬성 입장]
동네 서점에서 찾는 도서정가제에 관한 진실

 

 

 

박균호(북칼럼니스트)

 

2023. 10.


 

동네 서점에 있다 보면 자주 보이는 풍경이 있다. 학부모로 보이는 어른이 전화를 받으면서 자신이 사야 할 책 목록을 확인한다. 더 볼 것도 없다. 자녀가 원하는 입시용 참고 도서나 문제집을 사는 학부모다. 요즘 입시가 하도 치열하다 보니 학생들이 직접 서점에 와서 차근차근 책을 고르는 풍경은 보기 힘들고 부모들이 대신 필요한 책을 산다. 내가 아는 한 학부모는 아이에게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줄 때 꼭 함께 서점에 들러 지갑에서 돈이나 카드를 꺼내 결제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준다고 한다. 즉 문제집이 부모에게 문자를 보내면 뚝 떨어지는 공짜 물건이 아니고 부모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구매한 책이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나는 이 평범한 이야기에 도서정가제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책이라는 상품은 제값을 치르고 산 사람일수록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을 만드는 출판업자도 아니고 책을 파는 사람도 아니니 지극히 독자적인 관점에서 도서정가제 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책을 둘 곳이 더 이상 없어지는 것이다.

 

책의 본질은 품질인가 가격인가?

 

초보 독서가는 책을 모으는 데 급급해 닥치는 대로 사 모으지만 결국 한때는 고민하면서 구매한 책을 자기 손으로 버려야 할 순간이 온다. 용돈을 아껴 구매한 책이 무게를 달아 팔아야 하는 폐지가 되거나 터무니없는 헐값에 팔아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공간이 부족해진 당신의 서재에서 어떤 책이 가장 먼저 버려질까? 쉽게 얻은 책이 1순위다. 특히 공짜로 얻은 책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절실하게 읽고 싶어서 구매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헌책방에는 그토록 많은 증정본이 있는 것일까? 증정본은 본인의 필요가 아닌 타인의 결정에 따라 무료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이다. 책을 증정하는 사람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아 증정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의도치 않게 공짜로 얻은 책이다. 증정본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정가가 아닌 저렴하게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스스로 망치는 지름길이다. 질보다 저렴한 가격에 현혹되어 구매한 책은 결국 읽지도 소장하지도 않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뿐이다. 물론 꼭 읽고 싶었던 책이 저렴하게 팔리는 예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개정 이미지

 

 

도서정가제가 폐지된다면 책의 ‘품질’보다 책의 ‘가격’으로 경쟁하는 출판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낮은 가격을 미끼로 삼아 겉모양만 그럴듯하고 속은 빈 책만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도 생겨날 것이다. 더 좋은 책을 원한다면 더 합리적인 비용을 공급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현재 일본의 서점에 가보면 저렴한 문고판 서적으로 매대가 꽉 차 있다. 물성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내용의 온전함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서정가제를 지켜 더 많은 책을 구매한다면 우리도 일본처럼 주머니 사정이 궁한 독자를 위한 문고판 책이 활성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독자도 출판사도 모두 공생할 수 있다. 독자가 더 싼 책을 원하면 출판업계도 더 저렴한 책을 낼 것이다. 다만 그 품질도 함께 낮아질 것이다.

 

도서정가제를 폐지하지 않더라도 책값은 물가 상승률에 비해 점점 저렴해지고 있다. 여러분들이 당장 인터넷서점에 가서 10년 전쯤에 출간된 책을 검색해보시라.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깜짝 놀랄 것이다. 대부분의 상품은 물가 상승률에 비해 가격이 올라가지만 한번 출판한 과거의 책에 새로운 가격을 붙여 다시 파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비용은 끊임없이 오른다. 마트에 가면 수많은 상품을 할인해서 파는데 왜 책은 꼭 정가를 받아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그 할인 상품들이 10년 전에 얼마였는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그리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상품과 겨우 1천여 권 정도 만드는 책을 같은 잣대로 볼 수는 없지 않을까. 더구나 이미 우리나라는 10%의 할인과 5%의 경제적 이득을 허용하기 때문에 완전한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정보 제공자인 소규모 출판사를 살리는 도서정가제

 

많은 독자가 도서정가제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날벼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도서정가제는 1829년, 영국의 출판업자들이 소매점의 과도한 할인에 대처하기 위해 서점위원회를 결성하여 만든 무려 200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제도다. 세계 각 나라는 앞다투어 도서정가제를 도입하였으며 1970년에 들어서는 멕시코, 스리랑카 등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프랑스는 문화 대국답게 온라인 판매 할인과 무료 배송마저 금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도서정가제를 시행 중이다. 프랑스의 도서정가제와 비교하면 온라인 할인 판매를 허용하고 일정 금액을 넘어서면 무료 배송도 해주는 한국의 도서정가제는 그저 무늬에 지나지 않는 도서정가제이다. 물론 지금은 영미권에서는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진 않지만 세계적인 판매 시장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미국을 좁은 독서시장에서 군소 출판사가 다수를 이루는 우리나라 출판시장의 사정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는 출판계라는 좁은 생태계 안에서 독자와 출판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독자들은 출판사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동반자로 여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내서 부동산을 매입할 만큼 큰돈을 버는 곳은 극소수의 대형출판사다. 대형출판사는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더라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체력이 있으며 오히려 도서정가제 폐지가 또 다른 기회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도서정가제가 폐지되고 소수의 대형출판사가 우리나라 출판계를 휘어잡는다면 독자들이 더 다양한 책을 읽을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독자 인구에 비해 출판사가 지나치게 많다며 한탄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소규모 출판사가 많다는 건 더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형출판사에서 내기 어려운 책을 내는 소형출판사가 얼마나 많은가. 소형출판사 한 곳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도서정가제 폐지론자들은 도서관에도 도서정가제가 적용돼 일반 시민들이 좀 더 많은 책을 접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임으로써 공공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도 허상에 불과한 것이, 많은 공공도서관의 고민은 더 많은 책을 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래서 도서 대출 가능 권수를 대폭 늘이지 않는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시민이 구매 희망 도서를 신청하면 대부분 구매한다. 만약 도서관이 폭주하는 독서량을 감당하지 못해 더 많은 책을 구매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상황이 온다면 도서정가제는 이미 필요 없는 시대인 것이다.

 

개정 이미지

 

 

나는 2권으로 이루어진 윌리엄 M.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의 『허영의 시장(Vanity Fair)』(1848)으로 거의 한 달을 행복하게 지냈다. 두 권 합쳐봐야 3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3만 원이 채 안 되는 비용으로 한 달을 행복하게 지내게 해주는 물건이 책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이것보다 더 저렴하게 구매하고 싶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큰 즐거움을 주는 출판업계를 쥐어짜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그토록 감동적으로 읽은 최신 번역본 『허영의 시장』이 절판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영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이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진 것은 도서정가제 탓이 아니라 책을 구매해서 읽는 독자들이 적은 탓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좋은 책을 저렴하게 읽는 방법은 당장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책을 읽는 것이다.

 

*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균호

박균호 북칼럼니스트

독서가이자 좋은 책을 소개하는 북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더 좋은 책을 읽기 위해서 독자와 출판계가 상생하는 아름다운 생태계를 꿈꾼다. 저서로는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갈매나무, 2022),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소명출판, 2021) 등이 있다.
erwitt@nate.com
www.facebook.com/parkkyoo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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