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 2019. 11.
도서정가제 개정 방향 논란, 해법은 무엇인가
백원근(책과사회연구소 대표)
2019. 11.
지난 9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출판문화생태계 발전을 위한 도서정가제 개선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연구용역으로 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개정 도서정가제 영향 평가 및 개선 방안 연구〉의 중간발표 성격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이 연구용역 책임연구자인 필자가 주제 발표를 하고, 책 생태계를 구성하는 저자, 출판사, 온·오프라인서점, 전자책, 도서관, 독서, 소비자와 관련된 단체·기업의 전문가들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10월 14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도서정가제 폐지 청원’이 올라왔다. 11월 13일에 마감된 이 청원에 찬성한 사람은 모두 20만 9133명이었다. 현재까지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 중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도서정가제’와 연관된 것은 모두 103건이다. 이번 청원을 제외하고 올해 올라온 7건(마지막 청원은 3월 19일)의 도서정가제 폐지 청원은 참여 인원이 모두 4명 이하였고, 지난해 4월 29일의 청원이 3만 4701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20만 명 돌파는 상당한 숫자다.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 추천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가 답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청와대 답변 내용이 ‘정가제 폐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정가제 조항이 바뀌려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이하 ‘출판법’) 개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 정부 들어 지난 2년여 동안 국민청원 약 69만 건 가운데 공식 답변 기준을 넘은 것이 130건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이번 청원의 추천 규모는 작지 않다. 참고로,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에 183만 명,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에 33만 명이 참여한 바 있다.
최근에는 단체를 만들어 정가제 반대 여론몰이에 나선 움직임도 있다. 특정 스타트업의 결제 앱을 이용해서 책을 사면 연말까지 20% 할인 혜택을 준다며 공공연하게 현행 정가제 위반에도 앞장서고 있다. 도서정가제 반대를 공론화하면서 특정 사업의 이익과도 연결시킨 사례다. 이 업체는 청와대 국민청원 과정에서도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가제 반대 여론이 커진 배경에는 근래 전자책 시장에서 정가제 질서를 확립하려던 움직임이 불러일으킨 오해도 한몫 하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 민간조직인 출판유통심의위원회는 전자책의 정가 판매 질서 확립을 위해 올해 2월 11일 〈전자책 분야의 도서정가제 준수 방법 안내〉 공문을 전자책 유통사 및 플랫폼 업체들에 발송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정가 표시 준수가 미흡하다는 신고와 민원이 계속 접수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9월에 이 위원회는 출판법 제22조 제3항의 규정에 따른 ‘전자책 정가의 판매 사이트 표시’ 준수 여부에 대해 모니터링과 신고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 내용을 10월 23일 전자책 유통사와 플랫폼에 공지했다.
이와 같은 절차는 이미 현행법에 있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갑작스런 정가제 강화 조치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오해가 생겨났다. 모든 웹소설과 웹툰을 정가에 판매하도록 해서 결국에는 무료 웹소설과 웹툰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대여가 사라져서 작가와 판매업체, 독자에게 부담이 생길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진 것이다. 현재 전자책은 간행물을 의미하는 국제표준도서번호(ISBN)와 정가 표시를 하면 정가 판매가 가능하고 부가세도 면세된다. 하지만 해당 표시를 하지 않으면 정가 판매 의무가 없다.
이번에 20만 명을 넘긴 국민청원은 ‘도서정가제 폐지’를 내걸었지만 사실상 ‘책값 부담을 줄여달라’는 요구다. 동네서점, 독서인구, 출판시장, 초판 발행부수가 줄어든 것이 도서정가제의 정책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라거나, 프랑스에서 2년 지난 책을 제한 없이 할인한다고 하는 청원인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독서인구 감소가 도서정가제 강화 때문이라면, 도서 할인율이 높던 그 이전 시기의 독서율 감소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2015년(100 기준)부터 2018년 사이에 전체 소비자 물가 지수가 104.45만큼 상승한 데 비해 출판물은 103.41로 그보다 더 낮은 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일까. 책 생태계와 관련된 부정적 현상들이 모두 현행 도서정제 때문이라면, 출판사 수와 출판 발행종수가 정가제 변동과 무관하게 지난 10여 년간 매년 증가했고 2015년 이후 독립서점이 대폭 증가한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다만, 출판 선진국들이 저렴한 페이퍼백과 문고본을 출판하고 전자책에 정가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견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 청원의 결론은 “부담스러운 책값이 독자를 책과 멀어지게 하므로 정가제를 폐지하라”는 것인데, 정말 정가제만 없애면 책값이 대폭 저렴해지고 독자들이 대폭 증가할 것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장 정가제의 뿌리부터 없앨 일이다. 도서정가제가 책값을 상승시킨다는 소비자들의 전제는 오해다. 물론 2014년까지 시행된 과거의 정가제에서는 구간 도서의 광폭 할인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직간접 15% 할인으로 제한된 데 따른 상대적 책값 부담 증가는 있다.
그렇지만 도서정가제 적용 유무가 책값(독자 구매가격)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분석이나 시장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처럼 가격제도가 자주 바뀌는 나라에서 상대적 비교만 가능할 뿐이다. 완전한 정가제가 이루어졌던 1980년대에는 책값 논란이 없었다. 책값 수준은 정가제냐 아니냐 하는 가격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권 시장 규모를 반영한 평균 발행부수와 제작비, 염가본 출판 규모 등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현재 출판사, 온·오프라인서점, 소비자 단체 등이 참여한 ‘도서정가제 보완 및 개선 협의회’를 지난 7월부터 운영 중이다. 협의체에 참여한 각계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의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결론을 도출하는 데도 작지 않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해관계자들의 상반된 입장을 그저 절충하는 방식으로는 책 생태계의 근본적 개선을 추동하는 가격제도 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정부의 정책 방향과 명확한 의지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관련 업계의 노력도 절실하다. 이를테면 페이퍼백이나 문고 같은 염가본 출판은 도서정가제와 무관하게 독서와 출판시장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는 길이며, 공공도서관과 기업(직장)도서관의 대대적 확충도 모든 이해관계자가 공감할 수 있는 출판·독서 진흥책이다. 독자의 책값 부담을 줄이면서 책과의 접촉면을 늘려야 한다.
이제 정가제라는 가격제도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책 생태계 관계자들과 국민이 바라는 출판산업과 독서환경의 지평을 넓히는 진화가 필요하다. 정가제는 당연히 그에 부응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번 국민청원의 시사점은 거기에 있다. 백원근(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현재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이며, 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과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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