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3 2024. 5+6.
호텔 속 창작의 공간, ‘소설가의 방’
장용근(서울프린스호텔 차장)
2024. 5+6.
서울프린스호텔에는 ‘소설가의 방’이 있다
유명한 영국 작가 J.K. 롤링(Joan K. Rowling)이 가난했던 시절, ‘엘리펀트 하우스(The Elephant House)’라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블룸즈버리 퍼블리싱, 1997)을 집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글은 어디서든 쓸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창작을 위해 집중력을 높이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작가 지망생이나 신인 작가들은 작업실을 따로 둘 만큼 여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런 작가들을 위해 특별한 호텔을 소개할까 한다.
서울프린스호텔
서울프린스호텔은 남산타워를 조망할 수 있는 명동역 근처에 위치한 호텔이다.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호텔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문학창작집필 공간인 ‘소설가의 방’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소설가의 방은 2001년 소설가 윤고은 작가가 대학생 시절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위해 선배들과 호텔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담은 칼럼 ‘호텔 프린스의 추억’을 2014년 격주간지 〈그라치아〉에 기고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프린스호텔은 매달 도서를 선정하여 전 직원에게 제공하는 독서경영을 할 만큼 문화산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 기존에 진행하던 기부나 봉사 활동 외에도 의미 있는 사회공헌사업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때 마침 호텔 직원이 윤고은 작가의 칼럼을 우연히 발견했고,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 활동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서울프린스호텔의 ‘객실’이란 자원과 딱 맞아떨어졌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호텔 공간을 지원하는 문학창작집필실(이하 ‘소설가의 방’) 후원사업을 시작했다.
2014년 초기에는 서울프린스호텔 홈페이지, 블로그를 통해 작가 모집 공고 등록, 심사, 선정 등 모든 과정을 호텔에서 직접 진행했다. 대대적인 모집이 아니었음에도 소설가의 방은 시작과 동시에 작가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처음에는 작가 10명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상하반기 6명씩 12명의 젊은 작가들을 모집하고 있다. 매년 경쟁률은 평균 3:1로 그만큼 집필 공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반 호응에 힘입어 서울프린스호텔은 오랫동안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전문성을 갖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연락을 취해 협약을 제안하였고, 2014년 4월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서울프린스호텔은 후원기관으로 입주작가들에게 객실과 식사를 지원하고 있다.
2023년, 2024년 ‘소설가의 방’ 입주작가 모집 포스터
‘소설가의 방’에서 일어난 일들
소설가의 방은 집필 활동 5년 이하 혹은 두 번째 작품 출간 계획이 있는 신진 작가를 대상으로 1인 1객실이 주어지며, 4주에서 6주까지 숙식을 제공한다. 창작에 필요한 프린트기와 인쇄용지 등도 지원하며 호텔 내 로비, 라운지, 미팅룸 등 부대시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작품 구상, 자료 수집, 출판사 등과의 미팅, 원고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호텔 내에서 할 수 있도록 환경이 갖춰져 있다. 집필실 앞에는 ‘소설가의 방’이라는 문패와 함께 “이 객실은 소설가 ○○○께서 집필하는 객실입니다. 조용히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안내문도 게시해둔다.
‘소설가의 방’ 앞 안내문
소설가의 방을 거쳐 간 대표적인 작가는 박상영, 장류진, 김초엽, 최은영, 하명희, 김유담, 한정현, 전석순, 장강명 등 현재 한국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지금까지 총 104명의 작가들이 머물며 창작 활동을 해왔다. 김초엽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의 후반부 작업, 장강명 작가의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문학동네, 2023)도 소설가의 방에서 나왔다. 2017년에는 소설가의 방을 거쳐 간 작가 7명이 서울프린스호텔에 머물면서 겪은 경험이나 영감을 담은 『호텔 프린스』(안보윤 외 6인, 은행나무)를 발간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공간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사색과 일탈의 공간인 ‘호텔’을 주제로 한 이 소설집은 최근 7쇄가 발간되었다. 올해는 특히 소설가의 방 10주년을 맞아 문화예술위원회와 추가 기념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호텔 프린스』
서울프린스호텔은 단순히 소설가의 방을 지원하고 운영하는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 2019년에는 소설가의 방을 기념하고자 ‘소설가의 방 북콘서트’를 개최해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간 호텔에 머물렀던 소설가 중 당해 연도에 작품집 또는 장편소설을 출간한 박서련, 김하율, 이동욱, 김세희, 정용준 작가가 약 50명의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2022년에는 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호텔과 작가들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한 ‘소설가의 방 홈커밍데이’ 행사도 진행했는데, 임승훈, 도재경, 손예빈, 정선임, 정은우, 우다영, 박서련, 이지, 이갑수, 문소윤, 임선우, 성해나, 장강명, 이수안, 채기성, 전석순 작가 등이 참여했다. 소설가의 방에 대해 정은우 작가는 “이전에 머물렀던 작가님들이 생각나 힘이 되었던 공간”으로, 채기성 작가는 “내가 따라올 수 있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되어줄 발자취”라며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겪은 공감대를 나누었다. 올해는 소설가의 방 10주년을 맞아 특별히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문학으로 꾸민 ‘소설가의 방’
소설가의 방이 순탄하게 운영된 것만은 아니었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서울프린스호텔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았다.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고 호텔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소설가의 방은 비어있지 않았다. 객실 운영이 불가한 상황에서 몇몇 객실을 오피스 공간으로 리모델링했고,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내국인을 대상으로 윤고은 작가의 친필이 기록된 소설책과 소설가의 방에 머물 수 있는 ‘소설가의 방 패키지’ 상품을 기획하거나 객실에 작가들의 책 표지를 전시하고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했다. 이수안 작가가 “벽에 걸린 액자 속 책 표지들을 보면서 의지를 다졌다.”라고 할 만큼 소설가의 방은 이제 작가들에게도 객실 이용객들에게도 문학 속에 젖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소설가의 방
서울프린스호텔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작가들이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어느덧 소설가의 방에 입주한 작가들이 보낸 시간들이 그 이상의 가치로 채워져 있었다. 집중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작을 위한 영감과 소재를 얻는 장소가 된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글을 쓴 시간도 중요했지만, 명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앞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지 생각했던 소중한 기억”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소설가의 방’을 통해 수상이나 화제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호텔 관계자로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잠깐 머물다 가는 호텔이지만 그 속에 창작의 흔적이 남는 것을 보면 공간이 주는 힘을 다시 한번 느낀다. 소설가의 방 벽에 더 많은 역량 있는 작가들의 책 표지가 채워지길 바란다.
장용근 서울프린스호텔 차장 서울프린스호텔에서 ‘소설가의 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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