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9 2023. 11.
대학도서관 장서 폐기, 누구에게 그 권리가 있는가
노경희(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2023. 11.
100년 전에도 우리는 책을 버렸다
금년 봄 무렵부터, 조선고판본과 조선고활자본의 잔권(殘卷)이 자주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이에 대해 별반 관심 없이 그저 특이한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들으니 조선의 종이를 매매하는 상인들이 구입 범위를 지방으로 넓혀 최근에는 경상도 지역에까지 이르게 된 결과, 해당 지방의 고서들이 적지 않게 경성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한 관에 얼마’라는 식으로 하여 종이 원료로 수거되는 운명을 맞이하지만, ‘책 한 권에 얼마’라는 식으로 파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책들은 따로 뽑아 고서로 팔렸다. 처음에 이상하다고 여긴 현상은 이렇게 들으니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중략)… 우리들은 일단 철저히 문헌 수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대규모의 실물 자료를 수집할 기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실물을 문헌과 대비하기 전에 먼저 실물 상호 간의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폐지의 회수가 강조되는 작금의 상황으로 인해 단편만 남은 고서의 운명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다. 「서영(書影)」 제2집의 제작은 결코 한가한 이들의 한가한 작업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1938년 경성에 거주한 일본인들 중 조선의 고서와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만든 모임인 ‘서물동호회’에서 조선의 고서들 중 진귀한 책들을 뽑아 영인(影印)하여 세상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서영」이라는 그림엽서집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위의 글은 그 두 번째 그림엽서집을 편집한 스에마쓰 야스카즈라는 한 수집가의 후기이다(노경희, 「서영(書影) - 조선의 옛 책으로 만든 그림엽서」, 『문헌과해석』 92, 문헌과해석사, 2023).
이 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이 제시되었다. 이 글이 쓰일 당시인 1938년 조선의 종이를 매매하는 상인들이 지방으로까지 구입 범위를 넓히면서 많은 고서들이 경성에 모였고, 그중 상당 부분은 ‘한 관에 얼마’라는 무게 단위로 판매되면서 종이 원료로 수거되었지만, 일부 고서들은 ‘책 한 권에 얼마’라는 식으로 따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 책들에 조선고활자 그것도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된 것이다. 당시 ‘조선고활자로 찍은 한적(漢籍)’을 중심으로 그림엽서집을 만들고 있던 일본인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높은 평가를 받는 조선의 고활자본 연구를 위해 실물 문헌이 중요한데 지금 전국 규모 ‘폐지의 회수’라는 큰 기회를 얻은 상황에서 고서 수집에 조선 고서의 운명 또한 달려 있다고 자신들의 작업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귀중본 고서들이 일본 수집가의 손에 대량으로 들어갔다.
현재 일본에는 우리나라 고서가 수만 점 소장되어 있다. 그중 상당수의 자료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장서가들의 수집을 통해 넘어간 것들이다. 그에 대해 식민지의 약자적 상황을 이용한 일본인들의 문화 침탈이라며 비판적으로 보던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보면, 당시 고서의 가치를 모르던 후손들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장서를 ‘폐지’로 여겨 헐값으로 장사꾼들에게 넘기고, 이를 수집하는 것이 조선 문화를 지키는 중요한 책무라고 당당히 합리화하며 수집하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책의 운명은 이렇게 폐휴지 취급을 받았고, 그로부터 100년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우리는 뒤늦게 그 고서들의 가치를 깨닫고는 이를 다시 환수·반환·매입 등의 절차를 거쳐 돌려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일본 교토(京都) 대학의 문학부 도서실
‘진리의 전당’ 대학도서관에서 사라져가는 책들
얼마 전 한 일간지 신문에서 “古書의 명복을 빕니다...전국 대학 ‘책 장례식’”(〈조선일보〉, 2023년 10월 4일)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오고, 이후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국공사립 도서관의 폐관과 장서 폐기 문제가 한참 화제에 올랐다. 당시 그 기사에서 장서의 절반을 폐기할 예정이라 언급된 대학은 한 광역시의 유일한 종합 대학으로, 해당 지역에서의 위상을 고려할 때 그 결정은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소요를 가져왔다. 필자는 바로 그 대학 소속 교원으로서 도서관 리모델링으로 인한 장서 폐기 계획이 교원들에게 처음 전달된 이후, 이를 반대하는 편에 서서 사태를 해결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학도서관 장서 폐기가 단순히 한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과 도서관 그리고 더 나아가 출판계와 인문학계까지 연동된 큰 사안임을 깨달았다. 이에 이 문제에 대한 ‘인문대학 교원이자 인문학 연구자로서의 입장’을 바탕에 두면서, 우리 사회가 고민할 과제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이 글을 쓴다.
필자의 소속 대학에서 내세운 장서 폐기에 대한 가장 큰 명분은 ‘미래형 도서관’ 구축으로, 이를 위해 중앙도서관 절반의 서가를 없애고 디지털 열람실·전시관·노트북존 등 학생들의 소통과 편의를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도서’를 보관하는 장소인 ‘도서관’에서 책을 없애고 다른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이 황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최근 5년간 책을 없애고 서가 공간을 전시관과 카페 등으로 바꾼 대학은 28곳이었으며, 그중에는 책 대신 캡슐 침대를 놓은 곳도 있었다고 한다(위의 신문기사 인용). 그동안 국내에서는 도서관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학교 본부와 장서 폐기를 반대하는 대학 구성원들 간에 적지 않은 갈등이 일어났고, 그중에는 계획이 유보되거나 변경되기도 하였지만 큰 소란 없이 장서를 폐기하고 새로운 시설을 도입한 곳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소속된 대학의 경우 처음 계획이 공지된 이후 교원들 사이에서 거센 반대 의견이 나왔고, 이후 여러 차례의 협의를 통해 사태의 건설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중이다.
장서 폐기를 반대했던 이들이 책을 구할 방편으로 처음 내세운 것은 법과 제도였다. 이 경우에는 「대학도서관진흥법 시행령」 제6조2항(2022년 3월 8일 시행)이 중요한 반대 근거였다.
〈제6조(시설 및 도서관자료)〉
그리고 “별표 2”에서 ‘전문대학’은 ‘학생 1명당 30권 이상’ 그리고 ‘전문대 이외의 대학’은 ‘학생 1인당 70권’의 도서자료를 보유해야 하며, 이때의 도서자료는 ‘연속간행물을 제외한 인쇄/필사 자료, 전자책’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법은 도서관 자체가 아닌 ‘진흥’을 위한 법이기에 지키지 않아도 엄밀히 말하면 불법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현재 우리나라 대학들 중에는 이 법을 지키지 않는 학교가 상당수이다. 교육부에 문의해도 “이 법은 말 그대로 ‘도서관법’이 아니라 ‘도서관 진흥을 위한 법’이다.”라고 응답할 뿐, 대학에 장서를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 내 상위권 15개 대학의 1인당 도서관 장서 보유량을 보면, 장서 수 100권을 넘긴 대학은 5개 대학에 불과하고, 70권의 기준을 맞추지 못한 대학도 존재한다(“[2023대입잣대] 1인 도서관 장서 서울대 1위.. 서강대 고대 숙대 외대 톱5”, 〈(교육전문신문)베리타스알파〉 393호, 2022년 10월 31일).
유명 대학들조차도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보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대학은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저 진흥법만 대학들이 제대로 지켜도 당장 대다수의 대학들은 상당한 장서를 추가로 충당해야 하고, 또 지금처럼 미래형 도서관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대량의 장서를 폐기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다만, 이 법에도 고려할 점이 있으니, 저 해당 도서자료 중 3번째에 ‘전자책’이 들어 있어 대학 중에서는 종이책을 폐기한 이후 전자책으로 장서량을 충당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이는 곳도 있다. 그러므로 전자책 장서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앞으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학생들의 전자책 사용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대학도서관마저 종이책을 외면할 경우 학술도서에서 종이책의 몰락이 가속화될 것이 자명한 만큼 이 문제는 종이책의 가치를 고려하여 신중히 살펴야 한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국립대학교 도서관 서고
‘폐기 도서’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필자의 소속 대학으로 화제를 돌리면, 처음 도서관 측에서 폐기 도서 선정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대출 실적’과 인터넷 혹은 상호대차를 통한 ‘대체 가능’ 자료인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교수들은 인터넷 이용 가능을 이유로 폐기하는 것은 실물(종이)책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며, 고전이나 학술서 등은 필연적으로 학생들의 이용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으로 측정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인문학 저술들은 오래된 책들 중에도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책들이 많다는 점을 근거로 들면서 폐기를 반대했다. 무엇보다 도서 ‘이용’만이 아닌 후속 세대를 위해 책을 보관하는 ‘장서’ 또한 대학도서관의 중요한 기능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다른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오는 ‘상호대차’ 제도는 지금의 규정으로는 대출 권수나 기한, 방식 등에 제한이 많아 이용자에게 상당한 불편을 끼친다. 이로 인해 다량의 전문 자료들을 참고해야 하는 학자들의 연구 의욕을 꺾고 결과물의 질적 하락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는 결국 지역 학술과 문화 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학술 연구의 중요한 바탕이라는 대학도서관의 기본 성격을 고려할 때 이는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후 본부에서는 한발 물러나 ‘폐기 대상 도서 목록’ 중에 각각의 단과대학별로 보존 희망 도서를 파악해 책을 재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작업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먼저 모두가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폐기 도서’ 기준을 정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단과대학·학과·개인별로 각기 전공 분야에 따라 의견들이 갈리었다. 처음부터 책을 굳이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필자의 대학에서는 우선 단과대학별로 ‘도서분류표’를 기준으로 책을 분담하고 각각 맡은 분야에서 보관 서적을 선별하기로 하였다. 이때 인문대학에서 제시한 기준들은 다음과 같다. 최근 고문헌의 시기 범위에 대해 기존의 ‘1910년’이 아닌 ‘1945년’까지로 확대하여 수집·보존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견해를 수렴하여(옥영정 외, 「고문헌의 성격과 범주에 대한 새로운 접근」, 『국립중앙도서관 이슈페이퍼』 7호, 국립중앙도서관, 2021년 11월), 1945년 이전의 도서는 분야를 불문하고 ‘출판 서지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하여 가급적 보존하기로 하였다. 그 다음 원칙은 1) 소장 복본 2) 인터넷 열람 가능한 연속간행물 3) 공공기관의 정책 자료 및 보고서 4) 최신판 소장의 경우 과거판 폐기(단, 서지적 가치가 있을 경우 이전 판본 보존) 5) 오래된 수험서 및 어학·실용 기술 교재 등을 우선 폐기 대상으로 정하고, 그 이외의 자료는 내용에 따라 해당 전공자들이 취사선택하기로 하였다.
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도서 목록을 모두 검토하기 위한 전문 인력과 시간의 부족이었다.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들의 가치를 모두 일별하여 보존과 폐기를 논하는 작업은 제대로 하려면 몇몇 사람의 노력으로 단기간에 끝날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현재 대학가의 사정은 일단 도서관 공사나 장서 폐기가 결정되면 기한 내 예산 집행 등의 문제로 이후의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때문에, 천천히 장서를 살피고 그 보존과 폐기를 결정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더구나 책의 가치를 논하는 일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나서도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대학에서는 해당 전공의 교원들이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평소의 업무로도 바쁜 교원들을 이 일에 동원시키는 일 또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장서 폐기 사태에 앞장서고 큰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주로 인문대학 교원들인데, 최근 대학의 정책이 인문대학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전임교원 충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인문대학 교원 숫자가 크게 줄고 있다는 점이다. 문헌을 연구 재료로 삼는 인문대학 교원이 사라지면서 책의 폐기를 막을 사람들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대학도서관 장서 폐기와 인문대학의 쇠퇴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책이 사라지면,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사라진다
이 문제를 더욱 확장해서 살피면, 전문학술서의 주요 구매층인 대학도서관에서 종이책을 폐기하고 전자책으로 대체하는 일은 학술서 출판계의 위기와 연구자들의 저서 출간의 기회를 제한하는 일로까지 연결된다. 인문학술서의 경우 저자의 연구만큼이나 그 글을 다듬는 전문 편집자의 교정 작업과 가독성 있게 만드는 북 디자인, 독서를 편안하게 만드는 종이와 인쇄 기술 선택에 이르기까지 책의 ‘물성’, 즉 어려운 지식을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한 전문 출판사의 기술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들도 중요한 요소이다. 양질의 인문서 출판의 가장 큰 혜택은 그 책을 향유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일정한 수요가 보장되지 못하면 편집과 제작 비용이 높은 전문학술서 출판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신진연구자들의 출간 기회 또한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대학도서관의 장서 폐기는 단지 책을 버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나라 인문 학술교양 생태계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 생태계가 망가진 나라는 결코 문화강국이자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이번에 필자의 대학에서는 인문대학을 중심으로 공과대학을 비롯한 다른 단과대학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보존 장서를 분류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선별 작업을 통해 적어도 각 전공 학술서와 인문 고전 및 출판사적으로 의미 있는 서적들은 남기는 방향으로 본부와 협의를 이끌어 가는 중이다. 이러한 진행은 결과적으로 학내 구성원의 반대 목소리가 제대로 수렴되지 못한 채 조용히 책들이 폐기되는 여타 대학도서관의 실태와 비교하면 어쩌면 운이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
이 문제는 여전히 끝이 아니고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과제를 남기고 있다. 새로운 시설을 위한 도서관의 공간 확보와 그를 위한 장서 폐기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기될 것이다. 이에 대해 지역별로 여러 대학이 함께 ‘공동 보존 서고’를 운영하는 방안도 이야기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해결책들이 범사회적 차원에서 모색될 필요가 있다. 또한 폐기가 결정된 책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도 보다 섬세한 차원에서의 대책이 요구된다. 비록 불용 처리되어 대학에서 버려지는 도서지만 꼭 필요한 곳에서는 귀한 보물이 될 수 있는 만큼, 책들을 그 가치와 쓰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잘 보내주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선행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도서관과는 다른 ‘대학도서관’에서 ‘종이책’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인식을 찾는 논의들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어제의 책을 버릴 권리는 없다
필자가 대학생 시절이었던 20여 년 전에도 대학도서관에서는 개인 공부를 위한 열람실에만 사람들이 가득했고 필자가 주로 찾던 고전이나 인문학 책들이 빽빽이 꽂힌 서가는 늘 한산하고 고요했다. 이러한 풍경은 그동안 유학 중에 돌아다닌 일본과 미국 유수의 대학도서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문학 서적을 주로 보는 필자에게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아무도 없는 고독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필자는 책의 저자들이나 그 책을 소장했던 옛날 사람들과 책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었다. 필자에게 도서관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타임머신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단지 몇몇 이용자들만을 위해 그렇게 큰 서고와 많은 장서를 유지하는 것은 공간과 비용의 낭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그 책들의 저자들이나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 그리고 문학과 역사, 철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도서관에 대해 필자와 같은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온 학문의 하나인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토양 위에서 과거와 대화하고 현재를 고민하며 이를 기록하여 미래에 남기는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그러니 적어도 ‘학문’을 추구하며 ‘지성의 전당’이라 불리는 ‘대학도서관’이라면 당장 ‘지금’ 사람들이 책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섣불리 책을 없애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책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저 책의 ‘내용’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책이 만들어진 시대의 종이와 먹·잉크·붓·펜·활자·목판·인쇄기 그리고 그것들을 매만지는 손길을 간직하고 있는 책의 ‘형태’를 통해서도 발현된다. 우리는 책들의 몸과 마음을 최대한 온전한 형태로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중 과연 누구에게 책을 버릴 권리가 있는 것인가.
노경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이자 국어문화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을 공부하고 동아시아 비교문학과 문헌학, 출판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서적들의 형태와 물질적인 요소와 한자와 자국어 번역, 종교서 출판 등에 관심을 갖고 인쇄출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찾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전반기 한중 문학교류』(태학사, 2015)가 있고, 번역서로는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오오키 야스시(大木康著), 소명출판, 2007)와 『에도의 독서열』(스즈키 도시유키(鈴木俊幸), 소명출판,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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