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9 2023. 11.
2023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스케치
최민경(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정책연구팀)
2023. 11.
1949년 205개의 독일 출판사가 참여한 소규모 도서전으로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올해로 75주년을 맞이했다. 2023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er Buchmesse, 이하 2023 FBM)은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And the story goes on)’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10월 18일부터 22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메세(Messe Frankfurt)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슬로건은 수십 년에 걸쳐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도서 박람회로 성장한 도서전의 역사와 끊임없이 변화하며 글로벌 출판 비즈니스와 문화·정치·경제의 역동성을 강화하고 있는 도서전의 의미를 담았다.
올해 도서전에는 전 세계 95개국에서 4천여 업체의 출판 관계자 105,000명(2022년 93,000명)과 110,000명(2022년 87,000명)의 일반 방문객들이 전시장을 찾으며 글로벌 출판산업의 만남의 장으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전시업체 면적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였을 때 약 80%까지 회복하며 다시 활력을 되찾은 모습이었고, 도서전의 꽃이자 신간 저작권 계약이 이뤄지는 에이전시 센터(Literary Agents & Scouts Centre)는 총 548개의 테이블이 일찍이 마감되며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2023 FBM에 참가한 한국의 에이전시 담당자들은 한국 문학의 높아진 위상을 증명하듯 도서전 전부터 쏟아진 해외 출판 관계자들의 미팅 제안으로 30분 단위로 짜인 빼곡한 일정표를 소화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해 보였다.
혼란 속에 시작된 2023 FBM
2023 FBM 개막을 앞둔 주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의 위기는 도서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CEO 유르겐 부스(Juergen Boos)의 친이스라엘적 입장을 취하는 발언*을 하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산하기관인 리트프롬(Litprom)이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Adania Shibli)에게 수여하는 ‘2023년 리베라투르상(LiBeraturpreis)’ 시상식을 연기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며 개막식을 앞둔 주말 인도네시아 참가사들과 아랍출판협회(Arab Publishers Association), 에미레이트 출판사 협회(Emirates Publishers Association), 샤르자 도서청(Sharjah Book Authority) 등이 도서전에서 철수했다. 리베라투르상 시상식은 1988년부터 매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시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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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으로 2023 FBM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이스라엘 출판사 등이 도서전 측에 참가 취소 이메일을 보냈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CEO 유르겐 부스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도서전 개막 전 주말 아랍출판협회 등이 참가 철회를 결정했다. 이후 도서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유르겐 부스는 논란에 대해 “오해”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 동정심을 표한다.”고 입장을 수정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 정세에도 불구하고 도서전은 활기를 띠었다. 영국의 환경운동자이자 작가인 가이아 빈스(Gaia Vince)의 “기후 위기가 인간 이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도서전에서는 기후 변화, 민주주의 위기, 전쟁 등 국제 분쟁에 대한 주제가 심도 있게 다뤄졌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을 비롯하여 지속가능성, 인플레이션, 표현의 자유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주제까지 그야말로 거대 담론의 장으로서 도서전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한국관(좌), 리모델링한 5.1홀과 6.1홀 로비 사이에 마련된 새로운 인터내셔널 스테이지(우)
전년에 비해 전시도 규모 있게 치러졌다. 올해는 리모델링한 5홀 1~2층을 추가로 개방하여 3홀, 4홀, 6홀의 1~3층까지 총 10개 전시 홀을 사용하였고, 6.1홀에는 만화 센터(Comics Centre)를 새로 열어 국제 만화 시장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했다. 일반 관람객이 입장하는 주말에는 코스프레를 한 방문객들이 일본 만화 섹션에 몰려 일본 만화의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도 6.1홀에 한국공동관을 운영하여 한국 만화 콘텐츠의 우수성을 알리고 K-콘텐츠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주로 일본 만화를 출판하고 있는 독일 만화 출판 전문 업체인 알트라버스(Altraverse)는 K-POP 등의 영향으로 유럽 독자들 사이에서 한국 만화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며 한국 만화 출판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문학번역원 등도 6.1홀 국제관에 자리를 잡고 한국의 콘텐츠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작년보다 부스 규모를 40% 확장하여 출판사 및 에이전시 등 17개 참가사와 종합 부스를 마련해 한국의 책 전시와 함께 저작권 교류를 위한 기회를 모색했다.
일반 관람객이 입장하는 주말에 많은 인파가 몰린 3홀
한편 일반 관람객이 입장하는 주말 이틀 동안의 방문객 수는 지난해 대비 30% 이상을 넘어섰는데, 펭귄랜덤하우스 등 대형 출판사와 독일의 출판사 그리고 아동·소설 분야 등 다양한 전시와 저자 사인회가 열린 3홀에는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관람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또한 도서전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상당수의 참가업체가 부스를 철거해 일반 관람객들은 실망감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올해의 주빈국 슬로베니아 ‘단어의 벌집(A Honeycomb of Word)’
올해 주빈국이었던 슬로베니아는 도서전 첫날 ‘류블랴나 독서 선언문(Ljubljana Reading Manifesto)’을 발표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선언문은 디지털화 과정이 독서에 미치는 사회적·문화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전 세계 정책 입안자들에게 독서 교육 장려와 현재의 독서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연구를 확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하나인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행사 중 발표된 영상 연설에서 “민주주의 생존을 위해서는 심층적인 독서가 중요하다”며 “비판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도서전 CEO 유르겐 부스는 이 선언문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슬로베니아관에서 류블랴나 독서 선언문이 발표되고 있는 모습(좌), 올해의 주빈국 슬로베니아관(우)
슬로베니아는 ‘단어의 벌집(A Honeycomb of Word)’**을 주제로 ‘독서’, ‘시’, ‘철학’을 기반으로 한 자국의 출판과 문화를 소개했다. 슬로베니아관은 자연채광에 중점을 둔 육각형 벌집을 모티브로 한 두 곳의 세미나관과 레이스로 만든 구름, 슬로베니아 산맥의 협곡을 형상화한 재활용이 가능한 폼으로 만든 좌석, 슬로베니아의 숲을 반영하여 디자인된 서가로 슬로베니아의 풍경을 재현했다. 슬로베니아의 강점 중 하나인 ‘시’와 자국의 유명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시인 밀랴나 쿤타(Miljana Cunta) 등을 초청해 도서전 기간 동안 시인, 번역가, 지식인 등이 참여하는 70여 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슬로베니아에 관한 책’ 4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슬로베니아는 작년 주빈국인 스페인으로부터 게스트스크롤(GuestScroll)을 넘겨받은 이후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슬로베니아의 작가, 시인, 철학자, 음악가 등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행사를 개최했으며, 약 100여 권의 슬로베니아 도서를 독일어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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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부 유럽에 위치해 있는 슬로베니아는 약 200,000개의 꿀벌 군집을 보유하고 있으며, 카르올란벌(Carniolan bee)을 재배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올해 주빈국 슬로건인 ‘단어의 벌집’은 벌처럼 날아다니며 아이디어를 얻고 그곳에서 꿀을 추출하는 것과 같이 연결성, 포괄성, 지식, 문화 측면에서 아이디어 교환의 가치에 대한 의미를 담았다.
시와 철학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 외에도 소규모 도서 문화권인 슬로베니아 도서 산업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수익률이 낮은 도서 시장의 문화 정책”이란 주제로 한 패널 토론에서는 도서관 도서 구입 예산 및 번역 지원, 도서정가제 등 정부의 도서 및 출판사 자금 조달에 관한 정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슬로베니아 작가 타냐 투마(Tanja Tuma)는 “슬로베니아는 200만여 명의 인구에 비해 매년 많은 신간을 출판하지만 워낙 작은 도서 시장으로 1,000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간주된다”며, “인쇄 부수는 적고 출판 비용이 높기 때문에 출판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출판인 허버트 올링거(Herbert Ohrlinger)는 일부 출판사가 파산하기 시작한 1992년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의 출판 보조금 제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번역 자금 등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됨으로써 상업적으로는 출판할 수 없었던 특정 도서를 오스트리아 시장에 출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2023 FBM 최대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
2023 FBM의 최대 화두는 책만큼이나 자주 언급되었던 ‘인공지능(AI)’이었다. 2023 FBM에서는 작가, 번역가, 법률 전문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챗GPT(ChatGPT)부터 학술출판, 번역, 저작권 문제까지 인공지능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는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출판 분야의 AI 현황’을 주제로 한 패널 토론에서는 독일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Johannes Gutenberg University Mainz)의 도서학 교수인 ‘크리스토프 블래시(Christoph Bläsi)’, 영국에 본사를 둔 Shimmr AI의 설립자 겸 CEO인 ‘나딤 사덱(Nadim Sadek)’, 스페인 폰타스 문학 및 영화 에이전시(Pontas Literary & Film Agency)의 설립자이자 문학 에이전트인 ‘안나 솔러 폰트(Anna Soler-Pont)’가 연사로 참여한 가운데 인공지능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포럼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좌), 왼쪽부터 나딤 사덱, 사회자 토마스 콕(Thomas Cox), 안나 솔러 폰트, 크리스토프 블래시(우) ⓒPW
먼저, 나딤 사덱은 출판업계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설명했다. 그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책 광고를 생성하고 이를 미디어에 효율적으로 게재할 수 있어 구간도서와 신간도서 모두 더 쉽고 효율적으로 홍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나 솔러 폰트는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오디오북 및 번역과 관련하여 ‘예술 작품의 번역은 반드시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와 같은 새로운 계약 조항들이 생겼다며, 오디오북이 인간의 음성에 의해 녹음되지 않는 한 오디오 판권을 판매할 의향이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녀는 예술을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과 기술을 홍보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인공지능은 이미 ‘AI 번역 교정’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토프 블래시 교수는 AI가 특히 유용할 수 있는 출판 작업으로 메타데이터 생성, 마케팅 카피, 분류 등을 꼽았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출판할지를 고민하고’, ‘그 콘텐츠를 어떻게 표현하여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는’ 출판의 이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은 AI가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인공지능은 책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것이고, 이는 독자들이 더 얇게 분산되어 특정 도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이날 대부분 연사들은 창의성의 미래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공지능 기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And the story goes on)
올해 도서전 개막식을 앞두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측은 내년 주빈국인 이탈리아에 이어 필리핀(2025), 체코(2026)를 주빈국으로 발표했다. 필리핀은 2015년 동남아시아 최초의 주빈국인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1976년부터 ‘주빈국(Guest of honor)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올림픽이자 출판계의 만국박람회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라는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주요한 요소가 이 ‘주빈국’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회는 매년 한 나라를 선정해 주빈국으로 삼고, 해당 주빈국에 전시장 중 약 2,000평에 달하는 전시 공간을 제공하여 출판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 전반을 홍보할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빈국이 된다는 것은 더 많은 지역과 국가를 상대로 더 많은 출판물에 대한 새로운 판권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023 FBM 도서전 풍경
한국은 2005년, 이미 한 차례 주빈국 행사를 치르며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주빈국 제도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최근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가 36년 만에 두 번째 주빈국 행사를 갖게 되었다. 브라질과 인도 역시 이미 두 차례 주빈국에 선정된 바 있고, 스페인의 경우에는 ‘카탈루냐’까지 합치면 세 차례나 주빈국 행사를 치렀다.
이번 전시 기간 중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운영한 전자출판관 부스를 방문한 한국어 전공 독일 학생들은 대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도 한다며 한국 도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제는 주류로 자리 잡은 K-컬처의 인기와 더불어, 한국 문학 또한 주요 국제 도서상에 후보로 거론되는 등 국제적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국내 출판의 세계화에 걸맞은 홍보 방법과 전략의 수립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임을 실감했던 도서전이었다.
내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되며, 이탈리아가 ‘미래의 뿌리(Roots in the Future)’를 주제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내년 도서전에서 한국 출판은 올해와 다른, 또 어떤 이야기로 세계 출판 시장의 이목을 끌어당길 수 있을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다시 한번 주빈국으로 자리하는 그날을 고대하며 글을 마친다.
최민경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정책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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