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3 2023. 05.
다시 ‘도서전다운’ 모습으로 돌아온 런던도서전
홍순철(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2023. 05.
2020년 런던도서전(The London Book Fair)이 전격적으로 취소되었을 때 전 세계 출판관계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3~4개월 전에 예약해놓은 비행기와 호텔을 취소하고 환불 절차를 밟기 위해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런던도서전이 취소될 것으로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런던도서전 주최 측은 전시회 시작 불과 일주일을 앞둔 3월 4일 2020년 런던도서전의 전격적인 취소를 발표했다. 이후 팬데믹 상황이 이어지면서, 런던도서전은 2021년에는 ‘온라인’ 방식으로 그리고 2022년에는 영국의 주요 출판사들이 참가한 채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올해 2023년 제52회를 맞이한 런던도서전은 진정한 ‘도서전다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도서전 주최 측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4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총 3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도서전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숫자는 팬데믹 이전 런던도서전 방문객 수를 능가하며, 그동안 세계 출판관계자들이 얼마나 도서전다운 도서전을 기다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2023년 런던도서전 개막일 전시장 입구 모습
팬데믹 이후 다시 찾은 올림피아 전시장에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느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저작권 에이전트와 스카우트의 주요 무대이면서 저작권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인 ‘국제저작권센터(International Rights Center)’의 공간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었다. 팬데믹 이전에는 그랜드홀 2층에 자리하고 있던 국제저작권센터가 올해부터는 그랜드홀 1층의 안쪽 대부분과 2층 일부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사전 준비된 500개의 테이블이 매진되면서, 런던도서전이 국제 저작권 거래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회 기간 내내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간이 국제저작권센터였으며, 그곳에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을 서야만 했다.
기존에 국제저작권센터가 있던 자리에는 아동 출판사들의 부스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아동 출판사들은 한층 정돈된 모습으로 책을 전시할 수 있게 됐지만, 볼로냐국제어린이도서전(Bologna Children’s Book Fair)이 치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아동 출판사 부스는 상대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한편 아셰트(Hachette), 펭귄랜덤하우스(Penguin Random House), 하퍼콜린스(HarperCollins), 블룸스버리(Bloomsbury Publishing) 등 전 세계 주요 출판사들은 부스의 규모로 경쟁하듯 각각 전시장 중심에 크게 자리하면서, 올해 출간 준비 중인 주요 작품들을 선보였다.
새롭게 배치된 올림피아 전시장 내부(좌),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전시장 내부(우) 모습
지난 3년간 화상 미팅을 하면서 대면 미팅의 아쉬움을 달래던 세계 출판관계자들은 런던도서전에서의 해후를 반기며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진짜 도서전”이라면서 맘껏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했다. 한편 런던도서전은 ‘마켓 포커스(Market Focus)’ 제도를 통해 한 국가 또는 문화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일종의 주빈국 제도를 2004년부터 시행해왔는데, 올해는 마켓 포커스를 없애고, 우크라이나를 ‘스포트라이트 국가’로 선정했다. 세계 출판관계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각종 피해와 위기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올레나 젤렌스카(Olena Zelenska) 우크라이나 대통령 영부인이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개막식에서 송출된 영상 메시지에서 젤렌스카 여사는 “책은 우리의 증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세계 출판관계자들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줄 것과, 또한 우크라이나를 주제로 한 더 많은 책을 출간함으로써 참혹한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려줄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인플레이션과 도서 제작 및 유통 비용의 증가’는 도서전에서 열린 거의 모든 세미나의 주된 주제였다. 하퍼콜린스의 최고 경영자 브라이언 머레이(Brian Murray)는 도서전 첫날 진행된 세미나에서 “연료, 에너지, 노동력 등 모든 비용의 증가를 고려할 때, 제작 비용의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책 가격 역시 어느 정도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책 가격 인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아울러 이번 런던도서전에서 ‘번역’을 주제로 한 세미나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문학 번역의 현재와 미래’라는 세미나에서는 AI 번역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유럽 내에서 증가하고 있는 아프리카어와 아랍어의 번역 지원 확대 방안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특히 AI와 챗GPT(ChatGPT)가 출판 시장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활발한 예측과 분석도 이어졌는데, 대체적인 전망은 당분간 출판 시장에 혼란을 일으키겠지만, 결국 ‘인간의 상상력을 담는 도구’인 책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출판 비즈니스를 위한 비용 증가’ 세미나
런던도서전 참가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두 가지 소식도 있었다. 첫 번째는 프랑스 출판사 에디씨옹 라 파브리끄(Editions La Fabrique)의 저작권 담당자 에르네스트 모렛(Ernest Moret)이 런던도서전에 참가하려다 테러방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영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해당 출판사와 국제출판협회(IPA·International Publishers Association)는 이 사건에 대해 ‘테러방지법의 남용’이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며 즉각 반발했다. 또 다른 소식은 내년 런던도서전의 개최 시기가 4월에서 3월로 변경된다는 것이었다. 2024년 볼로냐국제어린이도서전이 4월 8일에서 11일까지 개최되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런던도서전 주최 측은 내년 개최 기간을 3월 12일에서 14일까지로 변경하는 것으로 확정 발표했다.
한편 오랜만에 도서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불만을 산 점도 있었다. 올림피아 전시장이 리노베이션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전시장에는 유독 앉아서 쉴 공간이 부족했다. 전시장 내부에 마련된 카페와 공용 공간에 좌석이 충분하지 않아, 방문객 상당수가 계단과 홀 바닥에 앉아 상담이나 회의를 진행해야만 했다. 몇 년 만에 모처럼 방문객들로 붐비는 전시회였지만, 인상된 입장권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시회 공간에 마땅히 앉아 쉴 만한 공간이 없었다는 점은 상당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전 세계 주요 출판사들의 봄/여름 주요 신간 타이틀에 대한 고급 정보와 주요 작가들의 신작 발표 소식이 이어지는 런던도서전은 한 해의 출판 트렌드를 가늠할 수 있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올해 런던도서전에서도 여러 흥미로운 신간 타이틀과 집필 작업 중인 원고들이 세계 주요 출판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우선 문학 분야에서는 기존의 스릴러, 로맨스, 판타지 등 장르적 성격이 짙은 ‘상업 소설(Commercial Fiction)’과 함께 ‘업마켓 소설(Upmarket Fiction)’이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흡수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업마켓 소설이란 순문학과 대중문학 사이에 위치하면서 두 장르의 모든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즉, 어린 시절부터 주로 판타지나 로맨스, 스릴러 장르를 즐겨온 독자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주로 읽는 ‘장르의 스펙트럼이 넓은 문학 작품’이 업마켓 소설이다. 이 분야는 기존의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이분법으로 문학을 구분하는 방식에 불만을 가진 젊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함께 탄생시킨 새로운 분류라고 볼 수 있다.
하퍼콜린스는 『양귀비 전쟁(The Poppy War)』(2018) 시리즈와 『바벨(Babel)』(2022)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중국계 미국 작가 R. F. 쿠앙(Rebbeca F. Kuang)의 범죄 스릴러 소설 『황색 화장(Yellowface)』 출간 소식을 전했다. 1996년생 중국 광저우 출신인 R. F. 쿠앙은 판타지와 역사를 결합한 대서사를 선보여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는데, 5월 출간 예정인 『황색 화장』에서는 다양성, 인종주의, 문화 유용, 소셜미디어의 끔찍한 소외 문제 등, 시의적절한 주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영국의 편집자 출신 작가 캘리안 브래들리(Kaliane Bradley)의 데뷔작 『시간부(The Ministry of Time)』는 런던도서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업마켓 소설로 ‘48시간 경매’에서 무려 13개 주요 언어권과 번역 저작권 계약을 맺었고, 대형 영화/텔레비전 제작사와 경매를 진행했다. 2024년 6월 영미권에 선보일 이 작품에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간 여행을 통해 공상과학, 코미디, 로맨스를 결합한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이밖에도 서아프리카 지역의 전설을 토대로 엘프와 요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라 엘-아리피(Saara El-Arifi)의 새로운 판타지 3부작 등 다양한 신인 작가들의 대형 데뷔작 출간 소식이 이어지면서, 문학 시장에서는 오랜 침체기를 깨고 다시 기지개를 켜는 움직임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논픽션 분야에서는 ‘지속가능성’, ‘환경’, ‘생태’ 그리고 ‘마음과 정신건강’이 가장 관심을 끈 주제였다. 런던 시장인 사디크 칸(Sadiq Khan)은 5월 말 영국에서 출간 예정인 자신의 책 『호흡(Breathe)』을 통해 기후 위기에 대항하는 강력한 행동을 위한 7단계 가이드를 제시하면서, 런던을 세계 최고의 녹색도시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오랜 노력을 소개할 예정이다. 케냐 출신 양봉가이자 농부인 제시 드 보어(Jess de Boer)는 ‘회복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식량 불평등과 외로움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선보인다.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들의 심리 자기계발서, 또는 요리책 등도 속속 출간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출판과 소셜미디어의 결합은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가장 유망한 마케팅 전략으로 여겨진다.
펭귄랜덤하우스는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를 이을 다음 독서 리스트로 독일 최고의 노화전문의학자인 베른트 클라이네 군크(Bernd Kleine-Gunk) 박사와 이화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출신인 트랜스 휴머니스트 철학자 슈테판 로렌초 조르그너(Stefan Lorenz Sorgner) 교수의 신간 『호모 엑스 마키나(Homo Ex Machina)』의 출간 소식을 전했는데, 인간과 기계의 결합으로 탄생한 ‘트랜스 휴먼’과 인공지능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 사회가 인류에게 희망일지 재앙일지 의학적 측면에서 그리고 철학적 측면에서 예측해보고 있다.
런던도서전 개막과 동시에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The International Booker Prize)’ 최종 후보 여섯 작품이 발표되면서 해당 작품에 대한 저작권 문의가 활발했다. 특히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문학동네, 2014)의 저작권에 대한 문의가 해외 출판관계자들로부터 이어졌는데, 한국 문학이 이제 세계 문학 시장의 변방이 아닌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다. 아울러 전시장 한복판에 자리한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 2022) 영문판 홍보를 위한 월페이퍼는 도서전을 참가한 한국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느껴졌다. 영국의 대형 출판사 블룸스버리는 올가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영미판 출간을 앞두고 벌써부터 홍보전에 돌입했고 전시장 가장 중심에 자리한 블룸스버리 부스 전면에 영미판 표지 월페이퍼를 설치했다. 전시장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영미판 출간 소식을 알게 된 세계 출판관계자들은 인상 깊은 표지의 책에 대한 저작권 문의를 하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밖에도 특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사람 간의 연대나 사랑 또는 특별한 치유 경험을 선사하는 주제의 소설들이 해외 출판관계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윤정은 작가의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북로망스, 2023)의 경우는 펭귄랜덤하우스를 비롯한 영미권 초대형 출판사들과 현재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문학 작품 저작권 수출 선인세로서는 사상 최대 금액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영어판 표지가 게시된 블룸스버리 월페이퍼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20세기에 ‘책의 세계’에 입문해 24년째 그곳에서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 ‘저작권 에이전트’로서 전 세계 출판 콘텐츠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북칼럼니스트’로서 지면 칼럼과 방송 등을 통해 출판 트렌드를 분석해 소개하고 있다. 〈한겨레〉에 “홍순철의 이래서 베스트셀러”, 〈한국경제신문〉에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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