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 09.
[해외통신/독일]
문항심(독일어 번역가, 독일 통신원)
2019. 09.
독일에 있는 유치원들 중 약 200여 곳은 이번 가을에 하나의 작은 경사를 맞게 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시행되는 〈책유치원 Buchkindergarten〉 인증을 받게 된 것이다. 독일 도서관협회와 독일 서적유통연합회가 주최해서 원생들이 책을 가까이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유치원에게 인증서를 발급하는 것이다.
독서 습관은 사실 유아기 때부터 그 기초가 세워지는데, 독일에서 본격적인 문자교육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글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아무도 유아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독일 유치원에서는 하여간에 뭔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보통 한국에서는 유치원생이 집에 돌아오면 부모가 “오늘은 뭘 배웠니?”하고 묻기 마련이지만, 독일에 사는 자녀의 집을 방문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오늘은 유치원에서 뭘 배웠냐고 매번 묻다가 그때마다 아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요? 하고 대답하자 할머니가 대체 여기 유치원은 왜 이러냐고 투덜거리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독일 유치원생들은 글자나 특정 지식을 배우는 대신 정해진 일과를 따르는 법과 크고 작은 규칙을 몸에 익히며 그냥 어울려서 노는 가운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간다. 초등학교에서도 교사의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일부 매우 보수적인 경우 글을 미리 깨친 1학년생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해서 분위기를 흐리며 자만하다가 자칫 나중에는 뒤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1학년 교실에서는 정말 abc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가르친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과 달리 자기 이름 정도는 쓰는 법을 가르친 후에 입학시키는 부모들이 많아지긴 했다.
그렇다면 ‘책유치원 인증제’란 뭘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다니는 책유치원이라니? 책유치원의 목표는 아이들을 책과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 혼자서는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많이 읽어주고 그 책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며 다양한 그림책도 보여준다. 이 인증제를 시행하게 된 교육적 배경은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책은 좋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독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유치원에서부터 여건을 마련해주고, 특히 가정의 경제적,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게 책과 독서를 바탕으로 스스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기틀을 아주 어릴 때부터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모국어와 현지 언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쳐본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어른이 생각할 때는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 어구가 많은 동시나 노래, 말놀이 같은 것에 가능한 한 많이 노출시키는 것이 유아기 아이들로 하여금 그 언어에 대한 기본적 감각을 느끼도록 만드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꼭 강조하고 싶다.
이번 인증서 선발 과정에는 독일 전 지역에서 820개의 유치원이 지원해서 208곳이 인증서 취득에 성공했다. 취득 요건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전체 원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책을 읽어주는가(주당 최소 2-3회 이상이어야 유리)
지난 5월 신청서에 이런 사항들을 상세히 기재해서 제출한 유치원들을 대상으로 아동발달 전문가, 유아동도서 전문가, 어린이전문 사서, 협회 위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합격한 곳에는 향후 3년간 유효한 인증서가 이번 가을에 발급되었는데 인증 유치원의 명단을 살펴보니 과연 독일 서부와 남부 지역 유치원들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았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이러한 인증서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유치원의 수가 남부 독일의 두 연방주에 월등히 많았다는 것에 주목해 본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바이에른 주는 독일 내에서 교육열과 공교육의 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유아기의 독서예비교육과 초중고에서의 읽기능력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지역신문에는 어느 유치원이 책유치원 인증서를 취득했는지 자랑스럽게 소식이 실리기도 한다. 유치원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돌보는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와중에도 독서교육에 관심을 두고 고심하는 교사들의 특별한 노력의 소중한 결실이 인증서로 증명되는가 하면, 학부모들에게도 다른 유치원과 차별화된 질 높은 보육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으니 홍보효과도 톡톡해서 앞으로 지원하는 기관은 더 많아지리라고 본다.
책유치원 인증서의 로고. 인증서를 획득한 유치원은 이 로고를 사용할 수 있다.
이 인증제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 출판사 네 곳이 지원하고 있는데, 그 중 아동청소년 전문 출판사로 저명한 모리츠(Moritz) 출판사는 지원 방법 중 하나로 유치원 및 학교에 무료로 책을 대여해 주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인기 있는 책 가운데 주제나 형태별로 골고루 28권을 선정해 패키지로 만들어 원하는 기관에 우편으로 보낸다. 어린이들과 관련 있는 기관이라면 모두 신청할 수 있다. 박스를 받은 기관은 한 달의 대여기간이 지나 다음 신청기관에 보낼 때의 우편료만 부담하면 된다.
아동도서 전문출판사 모리츠 출판사의 도서박스 구성내용 중 일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아들에게 전달되는 무형의 재산은 열거하기 버거울 만큼 많다. 어른이 동시나 리듬감 있는 글을 반복해서 읽어줄 경우 언어 감각이 놀랄 만큼 발달하고 책에 관한 대화를 통해 논리력과 호기심, 감수성이 싹튼다. 한편 혼자 보는 그림책을 통해서는 색감과 형태감이 발달하고 상상력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총체적 구술 능력이 길러진다.
당연히 예외도 있지만 독일 유치원 연령의 아이들은 대부분 교사의 독서지도를 상당히 잘 따른다. 보통 독일 가정에서는 전집류나 시리즈로 된 도서를 사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한두 권씩 구매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부족한 읽을거리를 지역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실에서 자발적 필요에 의해 스스로 구해서 읽는 편이다.
부모라면 알 것이다. 집에 책이 많다고 아이들이 자동적으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책이 적다고 글 읽기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책에 대한 관심과 약간의 노력이다. 대여섯 살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조금씩이라도 자주 읽어주고 귀찮더라도 말놀이 상대 역할을 해주고 함께 본 그림책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어떨까.
[해외통신]에서는 웹진 〈출판N〉의 해외통신원들이 현지 최신 동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합니다. 문항심(독일어 번역가, 독일 통신원) 독일어 번역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도서관에서 일한 뒤 지금은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살면서 독일어 책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다. 소설 및 인문서 등 다양한 책을 번역했고 지금도 열심히 작업 중이다. 독일어권 작가들이 좀 더 재미있는 책을 많이 써서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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