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향

Vol.44  202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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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변화’ vs ‘검열’, 고전 수정에 대한 엇갈리는 시선

 

 

 

장수정(〈데일리안〉 문화스포츠부 기자)

 

2023. 06.


 

1980년대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 등에 저항하기 위해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운동’이 고전 작품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완성도는 물론,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표현과 묘사 등 콘텐츠를 평가하는 기준이 점차 섬세해지면서, 과거 독자들을 만났던 고전들까지 다시금 평가를 받는 것이다.

 

최근 영미권 최대 출판 그룹인 하퍼콜린스(HarperCollins)가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작품 일부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미스 마플’ 시리즈에 담긴 일부 인종차별적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다른 단어로 바꿔 다시 독자들을 만나게 한 것이다. “‘흑인 하인’이 침묵이 필요할 때 소리 없이 웃었다”라는 문장에서는 ‘흑인’이라는 단어가 삭제됐으며,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1920)에서 푸아로가 한 등장인물에게 “유대인”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사라졌다. 작품 내에서 한 여성을 ‘집시 유형’으로 표현한 부분은 ‘젊은 여성’으로 바뀌었으며, 여성 캐릭터의 상반신을 ‘검은 대리석’에 빗댄 표현 또한 지워졌다. 이 외에도 1964년에 발표된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에서 미소 짓는 호텔 직원의 치아를 ‘사랑스러운 하얀 치아’라고 표현한 부분도 삭제됐다. 성난 인도인 판사에 대해 ‘인도인의 기질’이라고 설명한 부분은 ‘그의 기질’로 바꿨고, ‘원주민’이라는 단어 대신 ‘현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1953년부터 출간한 ‘007’ 시리즈도 개정판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첫 작품인 『007 카지노 로얄』(1953) 출간 70주년을 맞아 올해 봄 ‘007’ 개정판이 출간된 가운데, 이 작품 역시도 인종차별적 단어와 함께 일부 표현들을 수정했다. 흑인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했던 ‘니그로(negro)’라는 단어가 수정 또는 삭제됐다. 『007 죽느냐 사느냐』(1954)에서 본드가 뉴욕 할렘가 나이트클럽에 들어가 스트립쇼에 흥분하는 흑인들에 대해 “돼지처럼 숨을 헐떡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묘사한 부분 역시 개정판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바뀌게 됐다. 최근까지도 이언 플레밍의 ‘007’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제작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수십 년이 넘는 세월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선 변화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최근 이처럼 고전 작품을 다시금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과거 흔히 사용되곤 했던 표현들을 수정하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앞서는 영국 아동문학 작가 로알드 달(Roald Dahl)의 작품들이 재출간되는 과정에서 차별이나 폭력적인 언어를 수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익숙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1964) 속 ‘뚱뚱하다’는 뜻의 ‘팻(Fat)’이 이번 개정판에서는 ‘거대한(enormous)’으로 바뀌었으며, 『마틸다』(1988)에 등장하는 악역 트런치불 선생에 대해서도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하는 ‘피메일(female)’ 대신 사회적 성별을 뜻하는 ‘워먼(woman)’이라고 썼다.

 

『찰리의 초콜릿 공장』 표지, 영화로 제작된 <마틸다> 포스터

『찰리와 초콜릿 공장』 표지, 영화로 제작된 〈마틸다〉 포스터

 

 

이는 최근 콘텐츠들에서 추구하는 방향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간 꾸준히 ‘PC주의’를 표방하던 디즈니(Disney)는 자신들이 1898년에 선보였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아리엘 역에 흑인 가수 겸 배우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 흑인 배우가 아리엘을 연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할리우드 전반에도 팽배하다. 지난해 9월 공개된 영화 〈피노키오〉에서는 요정 역을 흑인 배우가 연기한 바 있으며, 지난달 개봉한 영화 〈피터팬 & 웬디〉의 팅커벨 또한 흑인 배우가 맡아 연기했다. 이 외에도 마블 스튜디오가 흑인 히어로의 활약을 담은 〈블랙팬서〉로 전 세계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고, 〈이터널스〉에서는 청각 장애인 배우를 히어로로 내세우는 등 할리우드에서는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다만 〈인어공주〉처럼, 원작이 있는 경우 더 큰 반발에 부딪히기도 한다. 원작 속 캐릭터의 인종을 바꾸는 것에 대해 “이는 원작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반발이 이어지는가 하면, “다양성은 다른 작품에서 추구하라”라는 요구도 이어졌다. ‘과도한’ PC주의가 남긴 폐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할리우드 등 주류 영화계에서 백인 배우를 우선 기용하는 것을 뜻하는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에 빗대어, 다양성을 위해 유색인종을 무리하게 등장시키는 ‘블랙 워싱(black washing)’이 대세가 되었다며 비꼬는 반응들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디즈니는 일부 팬들의 만족감이 아닌, 다른 선택을 통해 자신들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흑인 공주는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 공주 한 명뿐이었던 디즈니의 역사를 뒤집고 ‘다양성’을 넓히는 선택을 통해 자신들이 어느 가치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2차 창작물이 아닌, 원작 자체를 수정하는 최근의 출판계에는 더욱 큰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문학계는 물론,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름의 의견을 표명해 격렬한 논쟁을 끌어내기도 한다. 최근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한 로알드 달의 작품이 수정된다는 소식에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는 자신의 SNS에 “이것은 터무니없는 검열”이라는 의견을 게재했다. 리시 수낵(Rishi Sunak) 영국 총리도 작품 수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놨으며, 카밀라(Camilla) 영국 왕비는 한 행사에서 작가들을 만나 “표현의 자유나 상상을 제한하는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말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출판사 측은 “최근 논쟁을 들으면서 로알드 달 작품의 특별한 힘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하면서 로알드 달의 표현을 그대로 살린 ‘로알드 달 클래식 컬렉션’도 함께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수정판과 원작 버전을 함께 출간해 양쪽 의견을 가진 모두에게 선택권을 제공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고전 작품들의 일부 표현이나 메시지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1884년 작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있다. 소년 허크와 도망친 노예 짐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모험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에는 흑인 비하 표현이 수차례 쓰여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다. 한때는 미국 사회 내 인종차별 문제를 꼬집었다며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추후 평가가 뒤바뀐 사례다. 이 작품과 함께 미국의 고전 소설 『앵무새 죽이기』(1960)가 지난 2017년 미국의 일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퇴출된 바 있다. 인종차별을 아이의 눈으로 담아내며 호평을 받았지만, 최근의 대중들에게는 이 책에 담긴 일부 표현들이 불편함을 유발한다는 평을 받은 것이다. 인종차별적 단어로 알려진 ‘니거(nigger)’라는 표현이 무려 50번 넘게 실린 이 책은 결국 ‘학습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게 된 셈이다.

 

결국 이 같은 사례들은 수정 대상이 된 표현들이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거나, 또는 지금처럼 기준이 엄격하지 않아 용인된 것뿐이라는 뜻이다. ‘원작 보존’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한 ‘잘못된 표현을 수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라는 일각의 항변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다만 이 같은 표현을 수정, 삭제하면서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과거의 작품을 현대의 기준에 맞춰 평가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사례들이 독자들에게 주어진 평가의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이어진다. 독자들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직접 판단하는 것 또한 고전을 읽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작품들이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기능도 한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논란이 되는 표현들을 지워버리는 것은 과거 분명하게 존재했던 차별 또는 혐오마저 지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원작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해당 표현에 대한 동의’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고전들이 ‘원작자의 동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수정 및 삭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물론 해당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가진 출판사들이 추진하는 개정판인 만큼, 법적인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작가의 동의를 받아 수정이 진행되는 현대 작품들과 달리, 창작자의 뜻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수정은 결국 지금의 독자들 입맛에 맞춘 ‘임시방편’에 그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국 작가 필립 풀먼(Philip Pullman) 또한 앞선 로알드 달의 사례를 지켜보며 “저자의 동의 없이 (원작을) 수정하는 것보다 절판하는 것이 낫다”라는 의견을 전한 바 있다.

 

물론 출판계에도 거세게 부는 PC주의가 막을 수는 없는 흐름이 된 것은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이금이 작가가 장편소설 『유진과 유진』(2004), 『너도 하늘말나리야』(1999), 『소희의 방』(2010), 『숨은 길 찾기』(2014)의 개정판을 내놓으면서 외모에 대한 불필요한 묘사나 가부장제의 잔재를 실감케 하는 호칭 등을 수정했다. “남자 애가”, “여자 애가”라는 표현부터 바깥 외(外) 자를 쓰는 외가·외삼촌과 같은 가족 호칭을 바로잡으면서 독자들의 높아진 감수성에 부응했다. 『유진과 유진』에서 이성 친구와의 스킨십을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세 번은 거절해야 한다”라고 조언하는 문장을 아예 지우기도 했다.

 

출판사는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개정판을 소개하면서 ‘달라진 시대 의식, 성인지 감수성 적극 반영’이라고 표현했으며, 이금이 작가 또한 ‘작가의 말’에서 “2007년에 한 번의 개정 작업을 거쳤으니 정확하게 하자면 이번 책은 재개정판”이라고 설명하면서 “그사이 변화한 농촌 환경이나 개선된 인권 의식, 성인지 감수성 등을 다시금 살펴보고 반영할 수 있어 다행이고 기쁘다”고 해당 작업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 이는 유연한 태도를 통해 과거의 독자가 아닌, 지금의 독자들과도 소통하며 책의 생명을 연장한 긍정적 사례가 됐다.

 

『유진과 유진』,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개정판 표지

『유진과 유진』,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개정판 표지

 

 

앞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개작한 업체는 로알드 달의 작품을 넷플릭스에 판매하기 위해 신중하게 수정 과정을 거쳤다는 입장을 전했었다. 넷플릭스는 지난 2018년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와 로알드 달의 작품을 바탕으로 3년간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과거의 작품들이 지금의 대중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대적 감수성에 맞는 적절한 변화가 수반돼야 하는 경우들도 늘어날 것이다.

 

이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출판업계 종사자들의 고민도 더욱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고전 수정을 둘러싼 갑론을박들이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고, 나아가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 또는 수정의 여지가 남은 작품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장수정 〈데일리안〉 문화스포츠부 기자

〈데일리안〉에서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새로운 시선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며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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