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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  202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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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3.0의 시대]
신춘문예에 대한 의심스러운 시선들
신춘문예는 과연 몰락하는가?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2. 8.


 

몰락인가? 건재인가?

 

청탁 주제가 ‘신춘문예의 몰락’이다. 첨예한 하강적 변화를 함축하는 ‘몰락’이라는 판단이 신춘문예의 영향력이나 파급력에만 제한된다면 어느 정도 수긍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예전에 비해 신춘문예 당선자나 당선작이 화제에 오르는 일이 거의 없는 데다, 당선작보다는 후속작 검증에 의해 빼어난 문단 구성원으로 승인되는 흐름이 강해진 것을 보면 ‘몰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위상 약화’는 분명해 보인다. 당선만으로도 숱한 화제를 뿌렸던 지난 시절의 신춘문예를 떠올린다면 그다지 작지 않은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예비 신인들의 열망이나 언론 매체들의 지속성으로만 본다면 그러한 진단은 현장감을 전혀 모르는 오진으로 몸을 바꾸게 된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새해가 밝으면 어김없이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종이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운다. 해마다 치러지는 관성적 행사일지라도 그때마다 심한 열병을 앓는 신춘문예주의자들도 여전하다. 나이와 학력과 계층과 젠더를 막론하고 남몰래 설레는 마음으로 매해 연말을 보냈을 이들의 존재야말로 여전히 신춘문예가 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또렷한 지표일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강렬한 매혹과 절망을 동시에 선사하는 신춘문예는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각별한 위상을 여전히, 아직도, 가까스로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등단’ 제도의 변화

 

보통 ‘등단’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작품의 첫 발표 시점을 말한다. 그 방식은 신춘문예처럼 현상 모집 같은 경우도 있고, 명망가에 의한 추천도 있고, 아예 작가 스스로 단행본을 내면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소설 쪽에서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지 않고 바로 장편소설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물론 ‘등단’이라는 것은 미(未)등단자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고, 비유적으로 말하면 어떤 ‘단(壇)’에 올라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단상이 있고 단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표현에는 단상에 먼저 오른 사람들이 단하의 지원자들에게 단상으로 올라와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말하는 제도적 완강함이 숨겨져 있다. 그러니 신인들로서는 단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참담하겠는가.

 

사실 등단 제도는 한국 문학만의 기현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신춘문예나 추천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기도 하고 그 지속성도 벌써 한 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제도의 순기능은 묻혀 있는 유능한 신인들을 발굴해내는 데 있고, 역기능은 자기 사람들끼리 선호도가 생긴다든가 또 뽑아준 분에게 너무 귀속되어 개성을 잃는다든가 하는 데서 생겨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등단 제도에 균열을 가하는 사례도 여럿 있었다. 1980년대에 시인 박노해는 〈시와 경제〉라는 동인지를 통해 활동하다가 『노동의 새벽』을 내면서 정식 시인이 되었고, 시인 장정일은 아예 동인지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라는 단행본 시집을 내면서 시인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만, 이제는 흔히 발견되는 유형이 되었다. 그렇게 다변화한 실례들이 경쟁의 장에 들어와 신인 발굴과 발견과 성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권장할 만한 것이다.

 

매체들도 등단 방식이나 규모를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등단 제도를 인색하게 운영하여 신인을 정예적으로 뽑는 곳도 있고, 등단 제도를 아예 없애버렸거나 창간 때부터 재생산 제도를 두지 않는 곳도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을 양산하는 쪽도 있고, 또 선발 방식을 다양화하는 곳도 엄연히 있을 것이다. 2017년에 명망 있는 저널인 〈21세기문학〉에서 등단 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20년간 유지해왔던 신인상 제도를 폐지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현행 등단 제도가 줄 세우기, 파벌 조장을 강화하는 등 부정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좋은 작품을 발굴하여 게재하는 것으로 등단을 갈음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래저래 등단 제도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대칭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양면성을 가진 것 같다.

 

또한 매체들이 지역으로 수평적 확장을 하면서 그동안 주류 저널이 행사해왔던 독점적 권력으로부터 등단 과정이 진화했다는 점도 부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많은 문예지가 전국적으로 생겨나고 이를 통해 지역 문인들이 상당수 배출되는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여전히 신인들이 후속 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등단 숫자는 많은데 그 규모를 흡수할 만한 필드는 좁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역기능이 있더라도 그러한 폐단을 조정해가야지 등단 제도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절충해서 말한다 해도 이러한 등단 제도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맞다. 폐단을 일반화하여 폐지하자는 것은 지나친 이상론이고, 현실적으로 조건에 맞게 예비생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좋은 기회와 위상을 부여해가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자와 피선자 사이의 종속적 위계에 대해 걱정하는 분들도 많다. 다양한 에피고넨(Epigonen)이나 박수부대(Claque)의 출현이 아닌가 하는 우려일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작가들이 처음에는 모두 정지용을 따라했지만 결국 정지용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어간 사례도 있다. 그러니 어쩌면 한국 문학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강렬한 등단 욕구야말로 한국 문학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저변의 힘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신춘문예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각 언론사들이 이 제도를 폐지하지 말고 계속 운영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신춘문예의 명과 암

 

아닌 게 아니라 신춘문예가 언론사의 도움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폐지된다면 문학 지망생의 숫자는 현저하게 감소될 것이다. 당선작들이 여러 차례 표절 시비를 겪기도 했지만 다수는 문학을 향한 젊은이들의 역량과 열정을 환하게 보여주면서 한국 문학의 수원으로서의 굳건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신춘문예 당선작들 자체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도전과 모험을 하기보다는 고전적 주제와 방법을 줄곧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춘문예가 톡톡 튀는 실험성이 있는 작품보다는 두루 모양새를 안정되게 취하고 있는 모범생 같은 작품을 줄곧 뽑는다는 관행을 응모자들이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 시대가 그동안 정치성 및 실험성의 과잉을 반성하고 문학 본유의 고전적 통찰력이나 서정성으로 회귀하는 보편적 현상을 신춘문예 역시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신춘문예가 지향하는 ‘모범 답안 증후군’은 변함없이 지속되어갈 것이다. 시의 경우, 알맞은 길이(지나친 단형이나 장형은 기피된다)와 단아하게 짜인 시상(난해시나 문맥 소통이 불편한 계열 역시 기피된다), 소통이 편안한 보편적 상징에 얽매이는 것이 그 공통 경향이다.

 

생각해보면 신춘문예라는 관행이 한 해의 문학적 흐름과 방향을 적시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한계를 안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원자들은 자신의 독자적 미학을 소신껏 펼치기보다는 일종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심사 위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기획을 하게 되고, 당선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좌표를 세워갈 것이기 때문이다. 모범생들을 통해 학교의 현실을 진단할 수 없듯이,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통해 한 시대의 흐름을 모두 다 들여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신춘문예는 문단으로 나오기 직전 일종의 자기 은폐의 제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신춘문예의 부정적 징후에 대한 우려일 뿐이고 여전히 신춘문예의 순기능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춘문예의 치명적 한계이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통찰과 새로운 희열

 

다시 청탁 주제를 보니 “신춘문예의 몰락: 신인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한국 문단의 구조적 현실”이다. 등단 제도를 뚫고 나온 신인들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음을 감안한 주제일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한국 문학은 해방 후 세대와 전후 세대를 거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단계를 지나, 이제 완전히 새로운 조건을 갖춘 시대로 진입해가고 있다. 외연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세계 문학으로서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표절, 사재기, 미투, 권력 등을 키워드로 하는 부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온라인 디지털 시대의 자연스러운 확장이 새로운 구술 문화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도제 방식을 고수하는 문학 시장도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장단점의 활력이 각종 장르와 플랫폼들의 활력과 맞물리면서 한국 문학은 더욱 다양한 장르 확장, 문학 소비 형태의 변화를 치러갈 것이다.

 

지난 연대 내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탈(脫)근대 담론들은 한국 문학의 엄숙주의와 계몽성에 일정한 반성적 계기를 부여하였고 문학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핵심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담론은 우리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자질이었던 삶의 비극성에 대한 천착과 공동체 차원의 사회적 전망을 하나하나 지우는 폐단을 키워나갔다. 심지어는 문학을 통한 인문적 통찰이 가장 낡은 방식으로 내몰리기까지 하였다.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심화된 이러한 미학적 근시성은 이제 우리에게 문학의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청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개별화된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을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에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미학적 대망과 관련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난제에 대한 우회적 답변이 될 것이다.

 

여전히 신춘문예의 유효성은 남아 있는가? 신인으로 등장했다 하더라도 주류 편입의 욕망에 비해 그 성취가 너무 요원하기만 하지 않은가? 어렵게 등단한 신인들은 어떤 문학을 어떻게 지향해가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연쇄에 답하기 위해 여러 차원의 논의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신춘문예를 비롯한 신인 등단 제도는 더욱 자연스러운 변이 형태를 갖추어가면서 한국 문학의 저변을 넓혀가는 데 순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등단 이후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앞으로 펼쳐질 가혹한 자기 쇄신과 확장의 너비와 깊이에 의해 그 평가를 받으면서 자기 위상을 얻어갈 것이다. 이미 많은 문인들이 존재하고 있고, 새로운 발굴도 물리적으로 어려워진 시대이다. 신인들의 무대가 비좁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당선작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확대 재생산하는 원환(圓環)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상상력과 사물의 비의(秘義)를 투시하는 구체적인 형상화 능력을 갖춘다면 자신을 작가로 뽑아준 어떤 힘과 방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수행하리라 생각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세 가지 문제를 던진 바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글을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점점 혼자가 되어가면서 사실은 모두 ‘그들’이 되어가는 우리에게, ‘그들’에 편입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해지는 시대에, 여전히 작가의 실존적 지남(指南)으로 다가오는 전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롤랑 바르트는 규범 언어를 위반하는 텍스트가 최고의 희열(bliss)을 생산한다고 하였다. 신인들이 그러한 실존적 지남과 새로운 희열을 결속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불리한 시장의 조건들을 함께 극복해가기를 소망해본다.

 

유성호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서로 『서정의 건축술』, 『단정한 기억』 등이 있으며,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nniee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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