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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  202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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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기획이 뜬다]
섬세한 핀셋 기획, 예민한 독자를 건드린다

 

 

 

이명석(문화비평가)

 

2020. 07.


 


일러스트

 

 

 

그러고 보니 ‘마이크로’해진 책의 세계

 

두세 개의 TV 채널이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던 때가 있었다. 비슷비슷한 문학 전집이 교양인의 공용 자산이었던 때도 있었다. “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설문조사를 하면, 등산, 낚시, 독서라고 답하는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웹소설, 주문형 TV, 유튜브 등 대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디어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자유로운 해외여행과 적극적인 취미활동을 통해 개인들의 문화적 기호는 나날이 세분화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는 누구든 자신들의 취향을 실시간으로 전시하게 만든다. 나날이 섬세해지는 대중들의 요구에 다가가기 위해 출판계도 예리한 핀셋을 들어야만 한다.

 

종이 잡지가 절멸해가는 시대에 〈매거진 B〉는 ‘매번 하나의 브랜드에 집중한다’는 핀셋 기획으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위고·제철소·코난북스라는 3곳의 1인 출판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는 사람들의 작고 다채로운 관심에 집중한다.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소소한 애호의 마음, 그것이 이 시대 독자들을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했다. 세미콜론의 ‘띵’, 시간의 흐름의 ‘말들의 흐름’, 테오리아의 ‘한 줄도 좋다’ 등도 작은 취향을 저격하는 짧은 에세이 시리즈로 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출판사들 바깥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다. 무취향의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는 가운데, 색깔 있는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초소형 독립 서점들이 자신만의 팬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특정 독자들의 취향에 딱 맞는 책 꾸러미를 배달하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 펑퍼짐한 일간지 책 기사보다 뾰족한 관점을 가진 북튜버, 팟캐스트의 선택이 독서 시장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사람들의 작은 관심과 취향을 찾아내고, 거기에 맞는 지식과 체험을 전달하자.

 

어찌 보면 책이 오랫동안 가장 잘해 온 일이기도 하다. TV와 신문이 비슷비슷한 소리를 낼 때, 책은 오만 가지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지금의 출판계는 과거에 들고 있던 핀셋의 크기와 모양을 더욱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시기에 이른 것 같다. 점점 마이크로해지는 취향에 걸맞게, 마이크로 한 기획, 집필, 마케팅, 홍보가 필요한 때다.

 

 

 

한국 사회의 변화와 취향의 조리개

 

세상에는 백화점, 전문매장, 구멍가게 등의 판매방식이 있다. 모든 것을 긁어모은 맥시멀의 취향, 특정 분야를 파고드는 마니아의 취향, 미세한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마이크로의 취향도 있다. 한국의 출판 기획도 사회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 해방, 전쟁, 군사 독재의 시대에는 생존 이외의 도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터부시해 왔다. 노동 이후의 여흥이라는 게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친족/동창/연령/세대라는 테두리는 강력했고, 개인이 취향을 주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반찬 투정은 사회악이었다.

 

소위 보릿고개를 넘은 1970년대부터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낚시, 요리, 수예 등 취미 생활에 대한 세련된 접근이 시작되고, 이에 관련된 취미 실용서들이 크게 늘어났다. 여성, 학생, 어린이 등 연령과 성에 맞춰 등장한 잡지들에도 이와 관련된 콘텐츠들이 많이 생겨났다. 만화가 고우영은 사냥, 낚시, 골프, 그리고 당시로서는 희귀했던 해외여행에 대한 경험을 만화와 에세이로 옮겨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일간지 만화 연재가 결정된 직후 사냥용 총을 샀다는 에피소드는 오늘날 유행하는 취미 에세이의 선구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취미를 자랑하고,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는 일은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 ‘부유하고 기회 많은 예술가’의 특권이었다.

 

1980년대의 3S 정책, 올림픽을 통한 문화 개방을 거치면서 취미, 오락의 영역이 크게 확대된다. 이어 1990년대에는 사회 민주화 이후의 문화적 관심의 폭발로 한국인들이 여가를 즐기는 테마와 장르가 다양해졌다. 초반에는 영화, 대중음악, 만화, 애니메이션처럼 ‘작품’으로 감상하는 영역에서의 관심이 먼저 나타났고,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로 인한 경험을 거치며 패션, 여행, 미식, 카페, 댄스 등 보다 넓은 영역에서 자신의 취향을 찾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PC 통신과 인터넷의 놀라운 발전은 이들에게 충실한 정보 공급원이 되었고, 비슷한 관심사에 꽂힌 사람들이 교류하고 성장하는 동호회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를 글로 담아내는 작업도 자연스럽게 호황을 이루었다. 〈키노〉 〈이매진〉 〈이프〉 등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들이 등장했고, 경향신문의 〈매거진 X〉, 한겨레 신문의 〈ESC〉 등 일간지에서도 대중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다루는 지면이 나타났다. 출판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테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초기에는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팝음악의 결정적 순간들』처럼 해당 영역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개설서 위주였지만, 점차 개인의 감상과 체험을 중요시하는 형태로 바뀌어 간다. 필자군의 명칭도 영화 평론가, 대중음악 평론가에서 섹스 칼럼니스트, 미식 칼럼니스트 등으로 전환되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미디어가 콘텐츠의 중심이 되고, SNS와 유튜브가 신문, 잡지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주 5일 동안 자리를 지키는 ‘직업’이 아니라, 주말과 휴가 때 스스로 즐기는 ‘여가’가 개인의 정체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영화, 여행, 미식 등 무언가를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다르게’가 중요해진 시기다. 그리고 책은 이런 마이크로의 취향에 반응하고 있다.

 

 

 

작은 취향의 공감대, 그런데 왜 에세이인가?

 

위고·제철소·코난북스가 2017년부터 내놓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는 이런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작은 판형에 150쪽 정도 되는 에세이 시리즈로, 그 테마는 문구, 떡볶이, 하루키, 식물, 스윙댄스, TV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퍼져 있다. 언뜻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하기도 한데, 그 전체를 아우르는 틀은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시리즈를 시작하며 출판사의 기획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취미’라기보다는 ‘애호’와 ‘취향’. 그것이 이 시리즈를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한 용어인 것 같다. 그 안에는 망원동이라는 공간, 비건이라는 식생활의 철학도 들어올 수 있다.

 

출판은 오랫동안 취미 영역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중심이었다. 일본의 무크지는 잡지의 취재력으로 다양한 취미 영역의 지식을 묶은 뒤, 작은 책의 시리즈로 엮어낸다. ‘아무튼’ 시리즈도 나열된 제목만 들었을 때는 느슨한 취미 안내서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는 사뭇 방향이 다르다. 그 안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의도이든 아니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이 시대의 취미 콘텐츠는 그 주도권을 인터넷, 특히 유튜브의 동영상 서비스에 내주고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 낚시에 관심을 가지면 〈월간 낚시〉 잡지를 구독하거나, ‘초보자를 위한 붕어 낚시’ 같은 책을 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유튜브에 들어가서 생생한 영상으로 낚시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아무튼’을 비롯해 최근 등장하는 마이크로 시리즈들은 대부분 에세이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이 TV나 유튜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책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행과 낚시의 경험은 동영상이 훨씬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 요가와 수영을 하는 법을 ‘글로 배웠어요’ 하는 것보다는 ‘영상으로 배웠어요’가 더 그럴듯하다. 하지만 무언가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감정과 생각은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글만큼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이크로 에세이의 저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지 않는다. 살사 댄스를 배우고자 한다면, 탁월한 실력의 댄서에게 배우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몸치 소리를 듣다가 처음 살사 댄스를 배우면서 겪게 된 좌절 혹은 기쁨의 마음을 나누고자 한다면, 그냥 자신과 비슷한 초심자의 길을 거쳐 간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이 훨씬 좋다. 마이크로 기획은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섬세한 마음을 잡고자 한다. 그런데 가끔은 그렇게 작은 것을 잡으려는 시도가 커다란 공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독립출판에서 초대형 셀러로 나아간 것처럼.

 

최근 글쓰기 교실이 늘어나고 작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런 시리즈는 그들과도 잘 어울린다. 자신이 즐겁게 경험해 온 테마에 대해 손바닥 정도의 책을 쓰는 것은, 일반적인 단행본을 내는 것보다 훨씬 부담이 적다. 또한 신인 작가가 혼자 책을 내는 것보다, 이미 알려진 브랜드의 시리즈 속에 들어가는 것이 홍보에서도 훨씬 용이하다. 작은 에세이 시리즈를 읽는 독자들 중에는 분명 “아깝다, 이 주제는 내가 써볼 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아이템을 찾다 보면, 우리 출판의 스펙트럼을 미세하게 넓혀갈 수 있다. ‘여자 축구’는 누가 썼으니, 나는 ‘여자 배구’를 써보자. ‘떡볶이’는 여러 권 나왔으니, ‘군만두’를 파고 들어가 보자.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세미콜론의 ‘띵’ 시리즈는 ‘음식’이라는 취향의 대명사를 다루지만, 그 테마를 훨씬 더 마이크로하게 파고든다. 이다혜의 『조식 :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 미깡의 『해장 음식 :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한은형의 『그리너리 푸드 : 오늘도 초록』 등 음식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내고 소개한다.

 

 

 

큐레이션으로서 마이크로 기획

 

가로수길의 편집매장부터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까지, 취향의 큐레이션은 2000년대 마케팅의 핵심이다. 세계의 출판인들 역시 그것을 잘 활용해왔다. 미국 포틀랜드의 라이프 스타일을 담은 잡지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이웃과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는 ‘킨포크 스타일’을 세계에 퍼뜨렸다. 일본의 D&Department는 작은 지역을 여행하며 어떤 취향의 스타일을 모아 만든 잡지 〈d : 디자인 트래블〉을 히트시킨 뒤, 그 안에 담긴 물건들을 판매하는 편집숍을 오픈했다. 작은 대여점이었던 츠타야 서점이 일본 내 1,400개 매장을 갖춘 브랜드로 성장한 데에도, 믿을 만한 취향을 모아 보여주는 큐레이션 능력이 핵심이었다.

 

탁월해서가 아니라 소소해서 먹히는 에세이 시리즈.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도 어떤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들 시리즈가 편집매장이고 출판사는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마이크로 마케팅은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 정교하게 큐레이션이 된 상품들이 꾸준히 들어와야만, 그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을 충성스러운 팬으로 만들 수 있다. 〈매거진 B〉, 〈월간 윤종신〉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독자들이 그 스타일에 기대 노력을 덜 들이고도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리즈가 성공한 데는, 세 군데 1인 출판사가 힘을 모아 꾸준히 책을 이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주효했다.

 

최근 성공을 거두고 있는 유튜버들 역시 작은 영역의 테마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구독자들의 꾸준한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콘텐츠 업로드가 필수적이다. 이런 비슷한 성향 때문에, 유튜브 콘텐츠와 마이크로 출판 기획이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 최근 첫 호를 낸 무크지 〈유크〉는 매번 유튜버 하나를 골라 분석, 소개한다. 첫 호의 주인공은 캠핑한끼. ‘캠핑을 가서 해먹는 요리 한 끼’라는 정말로 마이크로한 아이템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취향이 확장되는 시대는, 책으로 대표되는 간접 경험에서 모든 영역의 직접 경험으로 바뀌어 가는 시대다. 이제 사람들은 퇴근 후, 주말, 휴가 시간에 집에서 책을 읽지 않고, 밖으로 나가 무엇이든지 해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경험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더 잘 경험하기 위해 책으로 돌아오는 타이밍이 있다. 출판은 그 순간을 잡아야 한다. 어떤 기획자들에게는 유튜브가 출판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취향을 통해 자신을 ‘구별 짓기(La Distingtion)’를 하고 싶어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주장은 점점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스타그램과 책꽂이, 유튜브와 서점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흐름에 보다 민감한 부류이다. 인싸들이 몰려드는 세계에서 “내가 더 뛰어나”를 외치는 것보다, 아싸들이 흩어지는 세계에서 “나는 이게 좋은데”를 속삭이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여긴다. 그들을 위한 좋은 현미경이 되는 것, 우리 시대 출판의 어떤 과제이다.

이명석(문화비평가)

민음사 편집자, 잡지 〈이매진〉 수석기자, 웹진 〈스폰지〉 편집장을 거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모든 요일의 카페』, 『논다는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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