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4 2024. 7+8.
[인터뷰] 드렁큰에디터 기획자 남연정
김세나(퍼블리랜서 대표)
2024. 7+8.
2020년 3월 23일, 드렁큰에디터 인스타그램 계정에 첫 게시물이 올라온다. “규칙적인 생활. 오늘도 낮맥”. 그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계속해서 술 사진이 올라오는 출판사 계정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말 그대로 드렁큰 에디터(Drunken editor)가 ‘드렁큰에디터 하는’ 날들. 심지어 드렁큰에디터가 출판사 브랜드명이란다. 그렇게 드렁큰에디터는 욕망을 주제로 먼슬리에세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술 빨고 만든 드렁큰에디터의 책들은 과연 재밌었다. 그녀는 ‘데일리 드렁큰’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다했고, B급 감성으로 똘똘 뭉친 책 홍보는 SNS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자 출판계 동료들은 궁금해졌다. 드렁큰 에디터, 당신, 도대체 어떤 편집자야?
1인 출판 브랜드 ‘드렁큰에디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처음 출판사에 들어가서 아동서를 만들었어요. 학습 만화 시리즈를 맡아 진행하다가 시리즈를 완간하고 단행본이 하고 싶어서 쌤앤파커스로 이직했죠. 신입으로 2년 정도 일하다가 몇 번의 이직을 거쳐 21세기북스에 들어가 5년 정도 있었어요. 그 사이 쌤앤파커스에 다닐 적 사수였던 팀장님이 대표가 되셨는데, 어느 날 밥 한번 먹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책 들고 가서 “저 요새 이런 거 만들어요.”하면서 보여드렸죠. 그런데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와서 다시 같이 책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주셨어요. 그 연락을 계기로, 쌤앤파커스로 다시 가서 1인 출판 브랜드 ‘드렁큰에디터’를 만든 거예요.
막내 편집자였지만 일을 야무지게 잘했으니 사수가 다시 찾았겠죠.
마감도 못 지키고 속 썩이는 신입이었는데, 저도 그게 참 의아해요. 제가 21세기북스에서 김정운 교수님 전담 편집자였는데 그때 유심히 지켜보셨던 거 같아요. ‘쟤가 저만큼 성장했구나.’ 싶어서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드렁큰에디터’라는 네이밍이 먼슬리에세이 시리즈 책들과 결이 참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그리고 위트 있게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한다고나 할까요. 출판사 브랜드명을 왜 드렁큰에디터라고 지었나요?
쌤앤파커스는 직원들끼리 술도 좀 편하게 마시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다들 믿지 않지만 제가 그전까진 술을 거의 안 마셨는데 이직하고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했거든요.(웃음) 반주로 낮술을 한창 많이 마실 때라 출판사 이름을 뭐로 지을까 하다가 그냥 딱 떠올랐는데, 제가 원했던 방향과 잘 맞더라고요. 전형적이지 않은 출판사 이름을 짓고 싶었고, 어쨌든 혼자 브랜드를 만드는 거다 보니까 1인 브랜드라는 게 좀 드러났으면 했거든요. 드렁큰에디터라는 이름이 그 생각들을 다 담고 있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았어요. 제가 고집을 좀 부렸고, 몇 주에 걸쳐 설득하고 버티기도 해서, 결국에는 거의 반 포기 상태로 “그냥 알아서 한번 해봐라.” 하시더라고요.
저도 처음에는 드렁큰에디터가 브랜드명이 아니라 편집자님 별명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드렁큰에디터 브랜드 반응이 뜨거웠잖아요. 출판사에서는 좀 놀랐겠어요.
제가 시리즈를 구상할 때 회사에서는 저한테 어떠한 사업적 기대나 요구가 없었거든요. 제가 21세기북스에 5년간 다닐 동안, 단행본뿐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 기획을 많이 시도해봤어요. 그 습성이 몸에 좀 배어 있다 보니 드렁큰에디터를 만들면서도 자연스럽게 시리즈를 무턱대고 기획한 거예요. 대표님은 소소하게 단행본 한두 권씩 낼 줄 알았는데 시리즈를 만들겠다고 하니, ‘얘가 왜 이렇게 판을 키우지?’ 하셨을 거예요. 회사의 간섭도 지원도 없이,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볼 수 있어서 그때 되게 신났었어요.
인스타그램을 정말 재밌게 운영해서 입소문이 난 거 같아요. 전 마케터가 따로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업로드되는 게시물을 보니 편집자님이 직접 올리시는 거더라고요.
기획 초창기부터 인스타그램 기반으로 홍보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걸 잘할 수 있는 젊은 마케터를 뽑으려고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마땅한 분을 못 구했죠. 시리즈 첫 책이 나올 때가 됐는데 마케터도 없고 채널도 없으니, 무작정 인스타그램 계정부터 만들었어요. 급한 마음에 일단 시작한 거죠.
그전까지는 SNS를 안 했어요. 저자 근황을 파악하는 용도로 인스타그램 ‘눈팅’ 계정만 가지고 있었어요. 드렁큰에디터라는 브랜드명도 그렇고, 책 제목도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분방한 B급 감성이잖아요. 그래서 게시물도 정제된 형식보다는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싶었죠. 그게 저희 브랜드 콘셉트에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았거든요.
‘드렁큰에디터’ 인스타그램
그 덕분에 독자뿐 아니라 출판계 내부에서도 드렁큰에디터를 응원하는 팬이 많이 생겼잖아요. 편집자가 직접 할 수 있는 SNS 마케팅의 정석을 보는 거 같았어요.
초반에는 사람들한테 ‘이건 뭐지?’ 하는 호기심이 컸던 거 같아요. 출판사 계정을 이렇게 운영하는 곳이 없잖아요. 낯설면서도 좀 신선해 보였던 거죠. 공식 계정이 아니라 개인 계정처럼 저의 캐릭터를 드러냈던 데에 친밀감도 느꼈던 것 같고요. 편집자는 출판 초기 기획 단계부터 관여하는 사람이다 보니, 저자와의 긴밀한 소통을 독자에게 바로 보여줄 수 있잖아요. 좀 더 깊이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거죠.
먼슬리에세이 시리즈에서 책 말미에 다음 책 미리보기를 넣은 것도, 제 기준에는 새로운 발상이었어요. 출판사가 종종 표지 뒷날개에 책 홍보를 하는 경우는 많은데, 이렇게 내지에다가 다음 책 본문 일부를 넣는 건 처음 봤거든요.
넥스트에세이 미리 보기 코너를 만든 건, 이 시리즈 원고들이 재밌어서 사전 홍보를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심지어 매달 한 권씩 발행되었잖아요. 책을 내면서 동시에 다음 달에 나올 책을 미리 알리고 싶어서 사전 연재 채널을 엄청나게 찾았어요. 온라인에서 연재하고 책이 나오면 북토크를 열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해서 몇몇 독립서점과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런데 2020년은 아시다시피 코로나19 시절이었잖아요. 몇몇 독립서점과 긍정적으로 논의를 하던 중에 집합 금지가 강화되면서 북토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결국 무산이 됐어요. 사전 연재 채널도 찾지 못한 채 시리즈 출간을 앞두게 된 거죠. 그런데 저는 이 시리즈 원고들이 정말 자신 있었고, 독자가 일부라도 읽는다면 무조건 반응이 올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러다 문득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신예희, 2020)을 2교 편집하면서 삽지에 원고 일부를 넣어 볼까 하고 떠올린 거예요. 그런데 그 삽지를 만들 시간도 없는 거죠. 마감은 임박했고, 출간을 미룰 수도 없고요. 그래서 가능한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내지에 넣는 걸 떠올렸어요. 생각해보면 삽지는 대부분 한 번 보고 버리잖아요. 그런데 이걸 내지에 넣으면 잘라 버릴 수는 없잖아요. 괜찮은 방법이겠다 싶어서 바로 조판해버렸죠.(웃음)
먼슬리에세이 시리즈 01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가장 재밌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을 넣으신 거죠?
네, 일단 제가 몇 꼭지를 추린 다음에 다른 팀 후배 편집자들한테 읽혀봤어요. 가장 재미있는 부분 2개만 골라 달라고 해서 가장 많이 선택받은 꼭지를 실었어요. 그 대신 전문이 아닌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끊었어요. 아침 드라마처럼 너무 궁금해서 다음 회차가 기다려지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다행히 책이 나오고 나서 빨리 다음 책 읽어보고 싶다는 리뷰가 많더라고요.
효과를 톡톡히 보신 거네요. 일반적인 편집자들이 그렇게 과감하게 시도하기 쉽지 않거든요. 아마 한 달에 한 권씩 내는 시리즈였으니까 가능했던 거 같기도 하네요. 미리 원고가 다 들어와 있어야 가능하고, 또 다음 책이 한참 뒤에 나오는 거라면 원고가 수정될 수도 있으니 편집자는 부담이 되죠.
맞아요. 원고를 동시에 다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정형화된 판을 깨는 걸 즐기시는 거 같기도 한데, 또 다른 책에서 뭔가 새롭게 시도한 사례가 있을까요?
제 기질이기도 해요. 물론 모든 책에 그렇게 하긴 어렵지만, 힘주고 싶은 책에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거죠. 이걸 시도해 본 것 자체가 ‘나 정말 열심히 고민했다.’ 싶은 거예요. 먼슬리에세이 시리즈를 마치고 단행본으로 낸 『일희일비의 맛』(홍민지, 2021)도 좀 색다른 시도였어요.
『일희일비의 맛』
그때 온 국민이 주식에 빠져 있던 시절인데, 주식 에세이를 기획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즉흥적으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원고를 공개 모집했어요. 가제를 ‘개미 일기’라고 잡고 “이제 막 주식을 시작한 개미들이 직접 쓴 주식 경험담을 책으로 만들어보겠다, 관심 있는 분들은 샘플 원고를 보내 달라.”고 했어요. 공지를 올릴 때만 해도 이게 진짜 책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2주 동안 원고가 정말 막 들어오는 거예요.
모집 기간이 짧았는데, 놀랍네요.
기획안이나 목차 다 필요 없고, 샘플 원고 두세 꼭지만 요청했는데 50편 이상 들어와 있었어요.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내가 일을 너무 키웠구나, 이거 진짜 책으로 내야 하는구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원고가 다 재밌는 거예요. 후보 5개를 추려놓고 3일 정도 심사숙고했어요. 그렇게 최종 선택된 원고가 『일희일비의 맛』이에요. 주식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보기도, 많이 잃어보기도 하는 등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담겼으면 했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문체이길 바랐는데, 거기에 딱 부합한 원고였죠.
홍민지 저자는 처음 책을 내신 분이었는데도 필력도 굉장히 좋아서 초고를 한 달 만에 다 쓰셨고, 인스타그램 공지 4개월 만에 책이 나왔어요. 속전속결로 책을 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관심 있을 때 책이 나와야 하는데 주식 열풍이 사그라들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지체하다가는 유사한 콘셉트 주식 에세이가 나올까 봐 서둘렀죠.
저는 『일희일비의 맛』을 보고 ‘제목 진짜 미쳤다’라고 생각했어요. 제목만 보면 주식 에세이인지 잘 드러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게 바로 주식하는 재미’ 부제로 뒷받침해주니, 반전 포인트가 있는 거죠. 주식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일희일비해 봤을 테니까요. 『돈을 사랑한 편집자』(이경희 외, 밀리 오리지널, 2022), 『오늘부터 반성 금지』(김신회, 밀리 오리지널, 2022), 『NFT로 돈 벌어봄』(이주윤, 밀리 오리지널, 2022) 등 책 제목도 그렇고, 목차 제목이나 카피도 참 잘 뽑는 거 같아요. “고백받고 차이는 쪽이죠? 네, 완전.” “MZ세대의 주식 쇼핑 생활이 공개된다!” 한 번 들으면 뇌리에 딱 꽂힌다고나 할까요.
『돈을 사랑한 편집자』, 『오늘부터 반성금지』, 『NFT로 돈 벌어봄』
일단 제가 네이밍에 되게 집착하는 편이에요. 이름부터 지어놓고 기획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드렁큰에디터도 이름을 지어놓고 콘셉트를 만들었고, 먼슬리에세이 시리즈도 이름이 떠올라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웃음)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 걸 예상했지만 이름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제목을 뽑으려고 굉장히 고민해요. 제목도, 카피도, 목차도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문장으로 뽑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 유의어로 바꿔가면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찾는 거죠. 또 구어체를 선호합니다. 조사가 들어간 문어체를 제가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책 제목, 표지 디자인, 목차가 하나의 콘셉트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이게 따로 놀면 실패한 콘셉트예요. 애초에 제가 의도한 기획을 구현하는 걸 중심으로 두고 원고를 편집해요. 책의 주제가 정해지면 일단 저자에게 어떤 꼭지들을 쓰고 싶은지 20개 정도 리스트업 해서 가목차를 만들어보라고 말씀드려요. 그다음엔 샘플 원고를 받아서 에피소드, 문체, 스토리텔링 등 세세하게 피드백을 해요. 이게 세팅되면 집필에 들어가죠.
초고가 나오면 제가 목차를 다시 짜는데요. 컴퓨터 화면으로 원고 순서를 재구성하는 게 불편해서 원고를 다 출력해서 책상에 펼쳐놓고 목차 재구성을 해요. 부 구성과 함께 세부적인 장 구성을 키워드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거죠. 이때 제일 재밌게 읽히는 다섯 꼭지 정도를 서두로 배치하고요. 나머지 원고들을 흐름에 따라 정리해요. 이렇게 목차 순서를 재구성한 뒤에 목차 제목들을 전체적으로 수정합니다. 책 제목의 콘셉트와 연결되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요. 가급적 꼭지 제목 하나하나가 카피처럼 보일 수 있게 뽑으려고 신경을 써요.
먼슬리에세이 시리즈 02~03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일도 사랑도 일단 한잔 마시고』
한 달에 한 권 마감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완성도 있게 일의 속도를 높이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신입 시절에 리라이팅(Rewriting) 실력이 편집자의 실력이라고 혹독하게 훈련받은 결과 같아요. 그때는 편집자가 원고에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수정하는 게 맞는 건가 고민이 많았는데요. 참 아이러니한 게 다음 회사로 이직했더니 저의 윤문 실력을 높이 사는 거예요. 연차에 비해 문장력이나 구성력이 좋다고 말이죠. 그래서 윤문이 필요한 원고를 많이 맡았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원고의 가독성을 높이는 게 제 강점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또 다음 회사로 이직했더니 그동안 계약돼 있던 타이틀을 빨리빨리 출간하는 게 시급한 상황이었어요. 저한테 맡겨진 원고를 미친 듯이 쳐내고 보니까 1년간 16권이나 만들었더라고요. 물론 외주 편집을 병행해서 가능했었지만, 기계적으로 책을 출간하다 보니 몸도 힘들었고 일에 대한 회의감도 컸어요.
그런데 그렇게 또 ‘하드 트레이닝(Hard training)’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루틴한 업무들, 예를 들면 원고 검토하고 교정·교열 보고 보도자료 쓰고 하는 그런 업무들을 훨씬 빨리 처리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대신에 중점 도서, 전략 도서를 맡게 될 때 상대적으로 더 공들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거죠. 업무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일의 속도가 붙는다는 건 같은 시간 내에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돼요. 그러려면 업무 속도를 높이는 트레이닝의 시간, 기본기를 탄탄하게 쌓는 시간을 좀 견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요즘에 와서는 합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너무너무 힘들었지만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결국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18년 동안 편집자로서 열심히 일해오셨는데, 번아웃 온 적은 없으세요? 있다면,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번아웃이 주기적으로 오더라고요. 제가 상대적으로 추진력은 좋은 편이라 초반에 과몰입해서 일을 밀어붙이는 힘은 있어요. 그런데 지구력이 약하다 보니까 그 힘이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텐션이 떨어져요. 그때 번아웃이 세게 오는 거죠.
제가 보통 연초에는 연간 계획을 세워서 저자를 집중적으로 섭외해요. 1년간 출간할 원고를 2~3개월 동안 모두 계약해놓고 원고를 만들면 대체로 가을쯤 마무리가 되거든요. 그때부터 급격히 무기력해지더라고요. 그런 사이클을 몇 년간 반복해서 겪다 보니까 ‘아, 또 그 시기가 왔구나.’ 해요. 번아웃은 극복이 안 되더라고요. 그냥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몇 달간 침체기를 보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시동이 걸리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런 사이클을 이제 알고 나니까 그냥 기다리는 마음으로 번아웃 시기를 버팁니다.(웃음)
드렁큰 에디터, 남연정
아까 제목, 목차, 표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콘셉트로 신경 써서 책을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디자인도 많이 관여하시는 편인가요? 편집자 대부분이 어느 선까지 표지 디렉팅에 참여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요.
먼슬리에세이 시리즈를 만들 당시 에세이 대부분이 일러스트를 활용한 표지였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일러스트는 배제했고, 좀 컬러풀한 표지였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석윤이 디자이너가 패턴과 컬러를 잘 쓰시는 분이라 함께하기로 했죠. 디자이너에게 특별한 레퍼런스 없이 “힙한 디자인으로 해주세요.” 하고 요청했는데, 힙한 게 뭔지 서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잖아요. 그래서인지 첫 시안은 굉장히 실험적인 디자인이었어요. 저는 훨씬 더 대중적인 취향에 가까웠는데 말이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분이 여태 작업하신 포트폴리오를 다시 살펴봤어요. 그중에 컬러풀한 패턴들을 조합한 디자인이 있더라고요. 보자마자 이거다 싶어서 그걸 레퍼런스로 다시 시안을 요청했죠. 그렇게 해서 시리즈의 첫 책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이 나왔어요.
밀리의서재는 전자책이다 보니 앞표지만 만들면 되거든요. 입사 첫해에는 한 달에 두 작품씩 오픈했어요. 종이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 달에 두 권을 마감한다는 게 굉장히 빠듯해요. 예를 들어 일러스트 표지를 한다고 치면, 그림을 발주해서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표지를 일주일 안에 무조건 완성해야 하니까요. 그럴 땐 그냥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일러스트’ ‘#일러스트레이터’ 검색해서 마음에 드는 그림체가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찾다가 눈에 띄는 그림이 있으면 그 계정에 들어가서 다른 그림들도 살펴봐요. 대부분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작품 아카이빙(Archiving)을 해놓잖아요. 그중에서 제가 준비하는 책의 제목과 잘 어울리겠다 싶은 그림을 사서 표지 디자인을 신속하게 하는 거죠.
완성된 그림을 구매하는 거니까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도 있겠군요.
네, 표지에 사진 이미지를 쓸 경우에도 무료로 쓸 수 있는 사진을 직접 찾아서 디자이너에게 주기도 하고요. 디자이너에게 이런 느낌의 사진을 찾아달라고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또 그렇게 찾아온 사진이 제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마이크로 매니징(Micro-managing)이긴 하지만, 그런 방식이 시간도 줄이면서 과도한 수정 요청으로 디자이너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밀리의서재에서 함께 작업한 외주 디자이너는 친한 후배인데, 그래서 서로 작업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먼슬리에세이 시리즈 04~05 『자기만의 (책)방』,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신뢰가 우선되면 서로 오해할 일이 덜 생기죠. 어쨌든 책을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은 편집자나 디자이너나 같으니까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니 편집자님은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지체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거 같아요. ‘기획하는 편집자’ 미니 강연도 그렇고, 저자 섭외할 때도 ‘기획서 대단하게 안 쓴다, 일단 메일 보내고 본다.’라고 하셨거든요.
저자에게 처음 메일 보낼 때 기획안 없이 일단 큰 주제만 던져요. 아무래도 연차가 있고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까,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책의 꼴이 러프하게 그려지거든요. 굳이 페이퍼로 정리하지 않았다 뿐이지, 기획안의 내용이 대략 머릿속에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제가 성격이 급하거든요. 기획 아이템이 떠오르면 빨리 제안해보고 싶어서 못 참는 거죠. 기본적으로 제가 보내는 메일은 콜드메일(Cold Mail)인데요. 영업자 마인드로 섭외해요. 이 저자가 제안을 거절하면 빨리 다른 저자를 찾습니다. 특히 유명 저자, 셀럽 같은 경우엔 그리고 섭외 경쟁이 치열하니까 속도를 낼 수밖에 없고요.
무엇보다 저는 후배 편집자들한테 기획은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빨리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안 그러면 기획은 항상 후순위로 밀리거든요. 당장 마감이 계속 있잖아요. 그래서 편집자의 의욕이 살아 있을 때 뜸 들이지 말고 일단 메일부터 보내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거절당할 확률이 높죠. 중요한 건 실패 경험을 빨리, 또 많이 쌓는 겁니다. ‘실패의 적립률’을 높일수록 기획의 성공률도 빠른 속도로 올라가더라고요.
저자 섭외 메일 보낼 때 성공률을 높이는 팁이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서론에 공들이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요. 저도 예전에는 서두에 구구절절 팬심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용두사미가 되더라고요. 섭외 메일을 쓸 때는 제안 주제와 저자 니즈, 이 두 가지가 핵심인데요. 왜 이 주제를 제안하는지 근거를 들어서 설득하고, 저자마다 갖고 있을 니즈, 예를 들면 마케팅이라든가, 계약 조건이라든가, 회사나 편집자의 특화된 분야 등을 어필해서 그 니즈를 공략해보는 거예요.
밀리의서재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종이책을 만드는 것과 다르던가요?
일단 밀리의서재는 온라인 플랫폼이잖아요. 제가 밀리의서재에 처음 오자마자 이용자 분석부터 해봤어요. 평균 연령 31.7세, 남녀 성비는 거의 반반이더라고요. 종이책을 가장 많이 사보는 사람은 40대 초반인데, 전자책 핵심 독자는 종이책 핵심 독자보다 평균 10살이 어리더라고요. 밀리의서재 이용자들은 1년에 한두 권 종이책을 사보는 사람이 20% 내외라고 분석해요. 종이책 독자 시장과 큰 교집합이 없고, 종이책 독자와 간극이 있는 거죠. 밀리 베스트를 보면 서점 베스트가 80% 이상을 차지해요. 개인적인 독서 취향이 강하기보다 대중적인 책을 선호하는 편이고요.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니 그에 맞춰서 오리지널 콘텐츠 기획을 했어요.
사실 밀리의서재로 이직해서 초기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나는 편집자인데 종이책으로 원고를 완성하지 않으면, 그게 편집자라고 할 수 있나? 기획부터 편집, 디자인까지는 거의 비슷한 과정이지만 종이책 제작을 하지 않잖아요. 일을 절반만 하는 느낌이었어요. 본문 조판한 교정지 출력해서 교정·교열 보고, 표지 카피 쓰고, 표지 본문 종이 고르고, 인쇄소 가서 감리 보고, 보도자료 쓰고 하는 뒷단의 과정이 생략되니까요.
근데 밀리의서재에서 전자책을 만들어보니 편집자로서 제 정체성의 핵심을 분명히 깨달았어요. 책 만드는 과정 중에 가장 재밌는 부분, 하나씩 쳐낸다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뭔지를 계속 고민해봤는데요. 그게 기획과 콘셉팅이더라고요. 그런 결론을 찾으니 굳이 종이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게다가 트렌디한 기획, 속도감 있는 작업 방식, 데이터로 즉각 확인하는 피드백, 개선점을 바로 적용해보는 일련의 과정이 저한테 꽤 잘 맞더라고요.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몰랐겠죠.
다른 자리에서 “저자 아닌 기획자 이름으로 책 팔고 싶어요.”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출판계에는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일 때 더 빛난다면서 편집자가 책 전면에 나서는 걸 보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대에 기획편집자의 브랜딩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기획편집자의 브랜딩이 필수는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자기 욕망이 있다면 그걸 직시하고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일을 하면서 제 내면에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일 잘하는 편집자라고 스스로 자부심도 있고 회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데, 출판계에서 나는 왜 아무 존재감이 없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내가 유명한 편집자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사실 처음에는 그런 욕심을 좀 회피하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쉽지 않고요. 그런데 드렁큰에디터를 하다 보니까 제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아,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어 했구나.’라고 느꼈죠. 그랬기 때문에 정말 신나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면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됐어요.
저처럼 이런 욕망이 있음에도 회피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편집자’와 ‘세속적인 욕망’의 조합이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한 개인으로 놓고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잖아요. 출판계의 보수적인 분위기, 편집자 역할에 대한 관성,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는 게 무엇보다 스스로 심리적인 장벽이 있을 수 있고요.
저는 일적인 욕망을 하나씩 채울 때 커리어가 계단식으로 상승했어요. ‘존재감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연봉을 더 많이 받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책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싶다.’, 이런 단계별 욕망을 하나씩 충족시키면서 그동안의 커리어가 이어졌고, 그 최종 단계가 ‘기획자인 내 이름으로 책 팔고 싶다.’인 거죠. 자기 안의 세속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출판N〉 주 독자층인 출판계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자기가 만든 결과물은 뭔가 허술해 보이고 남들이 만든 것은 왠지 대단해 보이잖아요. 저의 그럴듯한 인터뷰에도 속지 마세요.(웃음) 저 역시 매달 나오는 신간을, 베스트셀러를 보며 부러워하고 상대적 열패감을 느껴요. 이제는 한물간 편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고요. 거기서 오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일의 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저의 인터뷰가 어떤 분에게는 좋은 자극제가, 또 어떤 분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출판계 ‘샤이(Shy) 욕망꾼’들이 주변 동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활개 치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그래서 몸값도 바짝 올리고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도 느껴보고, “자기만의 방”에서 언젠가 책도 쓰고, 그렇게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다짐도 하고 말이다. 아, 물론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니까 “일도 사랑도 일단 한잔 마시고”!!! 드렁큰 에디터 남연정처럼 말이다.
남연정(드렁큰 에디터)
김세나 퍼블리랜서 대표 출판 전문지 〈기획회의〉 편집자, 이색서점 ‘세렌북피티’ 운영자를 거쳐, 현재는 출판 커뮤니티 ‘퍼블리랜서’를 운영하면서 출판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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