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이모저모

Vol.59  2025. 5+6.

게시물 상세

 

텍스트힙(Text-Hip) 시대에 어떻게 시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이재현(문학동네 국내문학팀 편집자)

 

2025. 5+6.


 

텍스트힙 시대에 시(時) 읽기

 

SNS 쇼츠나 릴스에서 1980~1990년대 핸드폰이 없던 시절의 길거리 풍경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그때를 그리워하거나, 삭막한 지금을 아쉬워하는 반응들을 본 적이 있다. 이제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핸드폰 화면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지만, 요즈음 체감되는 것은 그 가운데 종종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손에는 논픽션, 베스트셀러 소설, 그리고 시집까지 볼 수 있는데, 정말 텍스트힙이 온 것일까?

 

출판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텍스트힙에 대한 입장은 상반된다. 텍스트힙이 이미 왔다고 가정하면서도, 과연 그 정체가 있는 것이냐는 의구심 또한 뚜렷하다. 학교 도서관에서 문학 작품의 대출 비중이 확실히 늘어났다고 하는 한편, 작년 하반기의 도서 매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전체 출판업계의 성장을 단정 지을 수 없다고도 한다. 이런 갈팡질팡 가운데 “문학은 속도전이 아니다.”라는 선배의 말이 기억난다. 텍스트힙이라는 존재는 그 중간 지대에 있거나 아직 다가오는 중이 아닐까.

 

한편, 텍스트힙을 둘러싸고 과시적 독서에 대한 찬반도 있다. 2030세대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만 소비하고 있다는 반응과 그것마저도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는 출판업계 사람들의 마음이다. 책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읽으려고 사는 것이라는 명언, 일단 책을 사고 보는 독자분들이야말로 출판업계의 빛과 소금이라는 밈(Meme)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나는 과시적 독서가 설령 질타를 받더라도 ‘독서’와 ‘책’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기꺼웠다.

 

‘텍스트힙’이란 파도에 ‘시’라는 노를 저어

 

파도가 올 때 노를 저으려고 나 역시 주어진 자리에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특히 작년에는 ‘문학동네시인선’을 전면에 내걸며 열렬한 마케팅과 브랜딩을 시도했고, 꽤 좋은 반응을 이끌며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인생시를 추천해 주는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했는데, 특정 번호로 전화를 걸면 자신의 시를 직접 녹음한 시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벤트가 도서전뿐만 아니라 SNS에서 크게 확산되어 수십만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또한 ‘열 편의 시’라는 콘셉트 아래 ‘여름’, ‘산책’, ‘고백’ 세 키워드로 묶은 시선집은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문학동네 전체 판매량 중에서도 높은 수치를 보였다.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지우고, 접근성을 높여 시집에 대한 저항감을 낮추고자 했던 의도가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었다.

 

인생시를 추천해 주는 공중전화 부스(출처: 문학동네 유튜브)

인생시를 추천해 주는 공중전화 부스(출처: 문학동네 유튜브)

 

 

그 추세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성수동 소품숍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에서 ‘문학동네시인선’만의 팝업스토어를 개장했다. 오로지 시만을 누릴 수 있도록 시인에게 직접 사연을 들려준 뒤 시집을 추천받고 나만의 노트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준비했다. 젊은 세대의 관심이 집중되는 성수동과 현대시를 맞물리게 함으로써 독자층의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문학동네시인선’ 200번 이후의 시집 중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고선경, 2023), 『오믈렛』(임유영, 2023), 『당근밭 걷기』(안희연, 2024)를 새로 리커버한 것도 반응이 좋았다. 리커버 표지의 콘셉트는 담당 디자이너와 논의하여 시각적 강렬함을 우선시하되 단순히 예쁜 표지가 아니라 오브제 너머의 사연을 짐작하게끔 처연하고 오묘한 겹에 싸인 이미지로 방향을 잡았다.

 

『샤워젤과 소다수』, 『오믈렛』, 『당근밭 걷기』 리커버 표지

『샤워젤과 소다수』, 『오믈렛』, 『당근밭 걷기』 리커버 표지

 

 

달라진 시 읽기 풍경

 

작년 ‘문학동네시인선’에 쏟아지는 호응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독자들이 시를 접하고 읽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책상에 각을 잡고 앉아서 한 편의 시, 혹은 시집 전체를 통독하는 정적인 읽기가 아니라 자유롭게 어디서든 읽고, 꼭 종이가 아니어도 되고,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꼭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 읽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아닐지?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책의 본령은 어쨌든 단 한 가지로, 잘 읽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책을 낱장으로 분해해 들고 다니든, 소설의 결말부터 읽고 앞을 읽을지 말지를 결심하든, 모든 읽기는 책에도 좋은 일이다.

 

나는 책에 필기하거나 모서리를 접는 것을 극도로 피했지만, 어느 순간 책을 신줏단지 모시는 듯했고 책장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서너 번 이상 읽어볼 일이 드물다는 예감이 든 이후로 좋은 구절은 과감히 표기하는 편이 되었다. 좋은 것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고 지극히 순간적이라, 그것을 최대한으로 잡아내야 한다. 필사나 책꾸(책 꾸미기)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닐까 한다. 소설에 비해 시의 구절은 SNS에 올리기도 쉽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도 편하다. 시의 해석에 정답이 없듯이, 시를 읽는 방법에도 정답은 없다고 봐야 하겠다.

 

최근 시에 대한 관심이 무한히 기쁘면서도 한 가지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면, 너무 빠른 회전이 조바심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시집들의 흥행은 단연코 신인 작가들의 첫 시집이 이끌었다. 199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 새로운 세대들이 이끌 2020년대 새로운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가 문학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근래 MZ세대가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의 눈에 띄는 시집으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유선혜, 문학과지성사, 2024),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유수연, 문학동네, 2024)가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가까운 세대의 시인이 그려내는 현장감에 대한 애호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최근 『도넛을 나누는 기분』(김소형 외 19명, 창비교육, 2025)과 ‘시인의 말’을 모은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강신애 외 9명, 문학동네, 2023) 두 시집이 입소문을 크게 탔는데, 책의 어디를 펼치더라도 강렬한 시구들이 많아 SNS에서 서로 공감을 나누기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도넛을 나누는 기분』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도넛을 나누는 기분』

 

 

다만 한편으로 기존의 한국 시 독자들에게 익숙한 중견 시인들에 대한 주목이 예전만 못하다는 체감이 있는데 이것이 내게는 꽤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독자들이 시집을 사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이름, 첫 시집 위주의 흥행은 신인 작가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불안이 될지 모른다. 독자들의 반응이 다각도에서 정확하게 시각화·촉각화될 때 작가는 이를 신경 쓰지 않기가 어렵고, 당장의 호응을 급급히 추종하는 창작은 작품을 숙성시키지 못하고 다급히 내놓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문학은 속도전이 아니니까.

 

시를 사랑하게 된 마음

 

책을 읽고 만드는 것처럼 책을 홍보하는 데에도 정답이 없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책을 읽어달라고 애걸복걸하면 오히려 읽어볼까 하던 마음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해서 남을 신경 쓰지 않고 무아지경에 다다르는 때, 그 시간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홍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의 눈과 손을 신경 쓰며 좋음을 말하기보단 나의 좋음을 말함으로써 내 안에서 좋음이 배가되는 선순환이 시작된다면 책과 시의 부흥은 즐거운 부산물이 될 것이다. 그래야 매출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책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왜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다. 직업적 독서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딘 채로 텍스트를 그저 독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쿠키처럼 꺼내먹는 소중한 기억이 있다.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끈 시, 그리고 그 시에 대한 나의 마음을 온전히 풀어놓은 경험이다. 나는 편집자가 되기 전부터 백은선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의 시에 대해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참조하되 그것과 구분되는 나만의 고유한 지대를 느끼기도 했다. 이것은 아쉬운 일이기도 하고, 기꺼운 일이기도 했다. ‘이걸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니? 그럼 내가 말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첫 시도는 쉽지 않았다. 백은선 시인의 첫 시집 『가능세계』(문학과지성, 2016)에 완전히 매혹되었지만, 그 매혹을 제대로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은선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을 편집하면서, 내가 왜 그의 시를 좋아하는지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다. 가장 먼저 ‘솔직함’이 떠올랐다. 살아오면서 겪은 기쁘고 슬픈 순간마다 느낀 감정을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나의 감정을 섣불리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에 나와 반대되는 이들에 대한 동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의 시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솔직함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를테면 ‘생각한다.’, ‘본다.’, ‘~인 것 같다.’ 같은 표현들이 유독 빈번하게 쓰였는데, 그 이유를 한참 고민하다 내린 나의 결론은 백은선 시인이 ‘정직해지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 판도라의 상자 구석에서 발견한 것은 ‘다정’이었다. 나는 그 자세한 다정들을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속 ‘편집자의 말’에 쓰기 시작했고, 그 글의 첫 문장을 “나는 백은선의 시를 좋아한다.”로 시작했다. 좋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해 보자는 것이었다. 정말로 시가 아니었다면, 좋아하고 아끼는 시를 더 잘 말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시 바깥의 나를 바꾸는 경험이었다.

 

나는 백은선의 시를 좋아한다. 처음 읽은 시인이 백은선은 아닐지라도 시에 대해 말할 때는 백은선이라는 이름이 언제나 서두에 자리하곤 했다. 그런 내게 누군가 백은선의 시가 왜 그렇게까지 좋으냐고 묻는다면, 화자의 어조가 가진 힘과 자유롭고 아름다운 비약, 타인 앞에서 쉬이 내뱉기 어려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고백의 태도가 나를 흔든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백은선이 다정한 시를 쓰는 사람이라 좋다고 말하고 싶다.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던 백은선의 첫 시집 『가능세계』의 한 구절을 나는 오래 곱씹어 왔다. “내내 그렇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덮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백놀이」) 이 말은 읽는 즉시 나를 포근하게 감쌌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처럼 커다란 이불을 손수 만들어 덮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만의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 「다정한 시」,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편집자의 말’에서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나는 이 글을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며 기쁜 마음에 젖어 든다. 내가 언제나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형성해 왔다는 것을 되돌아보면, 시를 빌리고 시에 빗대어 말하는 것만이 나를 가장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시에는 정답이 없지만, 나만의 정답은 가능하다. 논리정연한 설명을 할 수는 없더라도 나만의 해석이 가능한 시인은 분명 존재한다. 나의 해석을 누군가에게 채점 받을 필요도 없기에 독자들은 마음껏 시를 누릴 수 있다. 이미 각자의 방법으로 시를 사랑하고 있는 분들에게, 나는 여러분이 어떻게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시를 통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상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린다. 새로운 시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재현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팀 편집자

좋아하는 이름을 많이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기껍게 살아가고 있다.
jae@munhak.com
https://www.instagram.com/cpjh8142

 

출판계 이모저모 다른 기사보기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