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5 2024. 9+10.
[함께하는 출판의 의미]
최지영(에디토리얼 대표)
2024. 9+10.
출판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출판하는 언니들’. 청탁받은 원고 주제의 앞단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원고 작성을 위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1인 출판을 하는 5명의 멤버(가지 박희선 대표, 메멘토 박숙희 대표, 목수책방 전은정 대표, 에디토리얼 최지영 대표, 혜화1117 이현화 대표)가 2024 서울국제도서전(이하 도서전) 공동 참가를 결정하며 지은 이 이름, 지금까지 해온 활동 그리고 이 활동이 출판 연대의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회자되는 건 훨씬 나중의 일이어야겠지.’였다.
‘출판하는 언니들’이 출생 신고를 한 지 채 백일이 지나지 않았다.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이 훨씬 많기에 우리 모임에 ‘연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출판하는 언니들’이란 타이틀(혹은 브랜딩)이 만들어졌고 한 번에 그치는 건 아쉬우니 내년 도서전에도 참가하자고 마음을 모은 것인데 ‘5명이라는 숫자는 너무 작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있다.
또 떠오르는 생각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곳곳에 숨어 있을 업계 선배와 고수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 우리가 받은 과분한 관심과 응원 덕분이며, 받은 건 흘려보내는 게 훈훈한 우리네 정서라 여기기에 이 보잘것없는 보답의 글이 또 누군가에게는 참고와 응원이 될 수 있기 바라며 적어보려 한다.
‘출판하는 언니들’의 시작
코로나19라는 신종 감염병 출현과 대유행이 문명(?) 세계를 멈추었던 서너 해 전을 어찌 잊으랴. ‘출판하는 언니들’이 있기 전에 ‘어쩌다 1인 출판’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혼자 일하는 1인 출판사 대표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코로나19는 그 모임도 흩어버렸고, 일상이 서서히 회복되어 갔음에도 모임은 복원되지 못했다. 그사이 각자의 상황도 적잖이 변했으리라. 당시에 나는 마포구 경의선 책거리(지금의 레드로드 발전소)에 위치한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플랫폼P에 입주해 있으면서 입주 기한 3년이 끝나기 전에 알고 지내던 1인 출판사 대표들과 부정기적인 밥 먹는 모임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궁리하던 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모임의 성격은 업계 동료들과 이따금 만나 밥 먹고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2023년 9월 비 내리는 모일, 연남동 비건 식당에 3인이 모였다. 메멘토 박숙희 대표가 “우리 사무실 근처에는 이런 힙한 밥집이 없다.”며 분위기를 추어올렸다. “오늘 홍대 온다고 좀 차려입고 왔다.”는 혜화1117 이현화 대표의 추임새에 우리는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늘 만나면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로의 근황 토크는 야근을 해도 모자랄 기세가 되곤 했다. 맛난 것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3인 회동의 결론은 ‘걷자’였다! 이틀 뒤 나는 ‘어쩌다 1인 출판’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서울성곽 둘레길 중 가장 온화한(만만한) 한양도성길 낙산구간 성곽길 코스를 걸을 예정이니 동양서림 앞으로 집결!” 첫 걷기 모임의 성원은 연남동 회합 때와 같았고, 두 번째 모임부터 목수책방 전은정 대표와 가지 박희선 대표가 합류했다. 다들 하나같이 엉덩이 무겁게 앉아서 일도 잘하는데, 그 중력을 떨치고 나와서 그런지 걷기도 잘 걸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과 몸이란 모임의 결속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열쇳말이라 믿는다. 그렇게 5명의 멤버가 모였다.
한파에 둘레길 코스는 포기하고 창경궁과 창덕궁을 누빈 2023년 11월 모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제대로 뭉친 언니들
서울국제도서전 개최 공지는 해마다 1월에 서울국제도서전과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나는 2023년 도서전에 참가했었는데, 올해 참가는 조금 망설였다. 다시 혼자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속설이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증액된 부스비는 많은 소규모 출판사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출협에 연합 참가를 열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한 모양이었다. 나도 목소리를 보태고자 출협에 전화를 넣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뭐든 해보는 게 좋다는 평소 지론을 실행에 옮겨 참가를 신청했고, ‘어쩌다 1인 출판’ 단톡방에 연합 참가가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같이 도서전에 참가해보자고 제안했다. 언니들은 몸이 아프지 않은 한, 일정이 불가피하지 않은 한 뭐든 해보자는 쪽이라 기뻤다.
도서전 부스 추첨이 끝나고 부스 번호가 확정되었다. I18! 어쩜 이렇게 번호 배정마저도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입에 담기엔 민망해도 머리로 가지고 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리는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겨서 배를 잡는다는 10대로 돌아간 듯 도서전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깔깔거렸다. 부스 간판에는 각각 다른 5개의 출판사 상호를 인쇄할 수밖에 없어도, 부스 내부 디자인과 운영 방식에는 통일감을 가져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종의 공동 브랜딩을 시도하자는 것. 언니들 연식이 좀 되다 보니 브랜드 이름으로 ‘독수리 오자매’ 유의 아날로그 감성(이라 쓰고 ‘구리다’라고 읽는다.)에서 그다지 진전이 없던 차, 우리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반영한 ‘출판하는 언니들’이 툭 튀어나왔다. 어?! 괜찮은걸.
우리 일이 눈덩이 굴리듯 커져 버린 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도서전 참가사 지원 사업이 발표된 직후였다. 누가 지원 사업을 마다할쏘냐. 나는 사업 공지를 언니들에게 알린 뒤,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당시 기본 부스 2개 비용에 더해질 분담 비용의 폭을 어느 정도 정해둔 상태였다. 그러니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공동 참가라는 의의에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합격하면 우리는 원래 하기로 했던 일, ‘출판하는 언니들’ 공동 브랜딩에 집중하면 되었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 부스 세팅 후 촬영한 단체 사진
다행히 사업 지원자 전원이 합격했다. 『언니들의 계속하는 힘』(2024)이란 소책자 기획은 메멘토 박숙희 대표의 발상이었다. 50세가 되어서도 출판계 현업에서 뛰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각자 한 꼭지씩 재밌는 키워드로 풀어 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다들 책을 만들면서 도서전 준비를 병행했는데도 ‘까짓 20매!’ 군소리 안 하고 만장일치로 쓰자고 했다. 가지 박희선 대표는 하룻밤 사이에 헤드카피, 서브카피를 마구 쏟아내는 괴력을 발휘해 ‘카피 머신’이란 별명을 얻었다. 세련된 표지 디자인으로 부러움을 사는 목수책방 전은정 대표에게는 부스 디자인을 조심스레 제안했는데 역시 흔쾌히 오케이였다. 혜화1117 이현화 대표는 400~500쪽을 훌쩍 넘기는 세 권의 책을 마감하고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돌아와 언론 홍보 담당을 자임했다.
장안의 화제 『언니들의 계속하는 힘』 ©박희선
올해 도서전에 대해서만 평가하자면 다섯 출판사는 각자가 희망하는 매출 목표를 달성했다. 공동 참가라서 내 출판사 책이 덜 나간 게 아니라 함께 나온 덕분에 서로를 견인한 결과를 얻었다. 작년에 단독 참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두 해의 도서전 경험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니, 물심양면에서 올해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우리를 계속 이어주는 힘
나는 사실 ‘출판하는 언니들’이 이토록 장안의 화제가 될 줄 예상치 못했다. 그저 우리끼리 즐길 수만 있다면 그걸로 대만족이었다. 화제의 중심이 되지 않았어도 나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재미있고 뿌듯했을 것이고 또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었다. 한데 ‘긍정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이름 붙인 혜화1117 이현화 대표의 마력 같은 글이 일간지 문화부의 출판 담당 기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후 ‘출판하는 언니들’에 대한 관심이 인터뷰와 기사로 이어졌다. 그렇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었을 터다. 사랑을 받았으면 돌려주고 기운은 흘러서 이어져야 하니 언니들의 힘은 받은 것을 순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망원동 책방 이후북스는 우리를 불러 북토크도 열어주었다. 세상에 비매품 소책자로 북토크를 할 수 있다니! 도서전 판촉용 책자 『언니들의 계속하는 힘』 2천 부를 제작한 지 일주일 만에 2쇄를 찍었다. 이후북스는 책자에 다 담지 못한 내용을 더 들어보기 위한 행사를 기획하였다. 잘 나가는 책방은 하는 일도 다르구나 싶었다. 장마철인데도 행사 당일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40명 가까운 참석자와 책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장소에서 북토크도 잘 마무리되었다.
이후북스에서 열린 『언니들의 계속하는 힘』 북토크(2024.7.20.)
지금 우리는 각자의 책상으로 돌아가 전처럼 원고를 읽고 교정을 보고 새로운 기획에 전념하고 있다. 그런데 ‘출판하는 언니들’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아직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가을쯤에 책방 두 곳에서 북토크가 열릴 참이고, 이후북스의 연이은 놀라운 제안도 고민해봐야 한다. 가장 가깝게는 한 서점과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다. 나는 도서전을 무사히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 우리에게 건네진 이 제안들에서 연대의 힘을 느낀다. 대의명분이 잘 통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지만 도서전에 한달음에 달려와 책을 구매하고 행사를 즐기며 공간을 채워주신 독자들로부터도 짜릿한 연대의 힘을 충전 받았다.
거창함보다 ‘즐거운’ 연대
세상일엔 묘한 면이 있다. 예년과 같이 도서전이 치러졌다면 연합 참가는 불가능했을 테고 ‘출판하는 언니들’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들까지 헤아린다면 운이 좋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러니 ‘출판하는 언니들’을 자평해본다면, 우리는 ‘거창한 연대’라는 목적보다 뭔가 ‘함께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고, 협동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뭉쳤더니 궁합이 잘 맞아 시너지가 났을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나도 고인물이 되어 가는 처지라 그런지 ‘연대’에 대한 내 감각이 고리타분해서 자꾸만 그 무게를 덜어내려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산이 저기 있으니 오른다는 한 산악인의 말처럼, 큰 책 잔치가 열렸으니, 힘을 모아 출전한 것이란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글을 쓰는 동안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우리가 한 일이 ‘출판 연대의 힘’으로 읽힌다면 애써 그 의미를 탈색하기보다 ‘즐거운 정신’으로 달라진 출판 환경에서 ‘도모’할 수 있는 우리만의 놀이로 화답하는 편이 언니들에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구나 알지만 막상 일이 앞에 닥치면 신경회로가 마비되어 놓치기 쉬운데, 일이 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습관과 실천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깨달음을 4명의 언니들과 연대하며 배웠다. 내가 언니들에게 항상 고마워하는 대목이다.
모 언론사 기자는 어찌 보면 경쟁사 관계인데 이런 일을 함께 벌이며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아마도 각자 출판사를 더 키우겠다는 사업적 포부와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여겨 한 질문일 것이다. ‘출판하는 언니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데는 우리가 몸이 가벼운 1인 출판사라는 이유도 작용한다. 우리 성원 가운데 누군가 직원을 뽑고 일이 많아지고 회사 경영에 더 신경을 쏟아야 할 상황이 된다면 ‘출판하는 언니들’은 흔하디흔한 친목 모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여하간 거듭 상기하는바 ‘출판하는 언니들’은 백일이 안 된 신생 브랜드라서 우리도 이 ‘부캐(부 캐릭터)’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도서전 기간에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인증의 언어들이 웅변했듯 ‘책방하는 언니들’, ‘서점하는 오빠들’, 그림책 작가들의 여름 프로젝트 그룹, 오래된 북클럽 등 책동네 힙스터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출판 연대’로 한정할 경우 시리즈 공동 기획의 좋은 사례들이 있으며 지역출판인들의 연대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출판하는 언니들’을 만들 때 ‘연대’라는 것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출판하는 언니들’이 순수하게 친목 모임에만 머물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 5명 모두 우리의 공동 행보가 무엇이 될지 몰라도 길게 이어져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고 싶은 듯하다. 나부터 그러니까. 그래서 누군가 연대의 힘에 대해 물어본다면 일단 모여서 재미나게 놀라고 권할 것이다. 판을 바꾸겠다는 포부가 앞설 수는 없지 않겠나. 자기 일을 금쪽같이 아끼고 보살펴 온 사람들이 결국은 틀에 균열을 내고 판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연대가 계속되기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은 속내도 있다. 우리가 한 일이, 업계 동료들이 하는 일들이 자력갱생의 안간힘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바깥의 시선으로만 보면 출판은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새로운 기술이 부문 간 경계를 허물 때, 주로 전통 산업이 타격을 크게 입는다. 내부로도 들어와서 보면 출판계는 변화를 외면하는 쪽이 아니라 변화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쪽이었다. 이는 느려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타깝게도 변화는 너무나 전방위적이고 빨라서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소규모 출판사는 새로운 적응 방식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2010년대 이후 1인 출판사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출판업종은 신기술 기반의 스타트업계에 비해 조금만 섬세하게 정책을 설계해도 적은 예산으로 굉장히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실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출판하는 언니들’과 같은 시도가 어렵지 않게 자주 일어나는 여건이 조성되기를 희망한다. 이는 전국 동네책방이 책을 매개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올해의 도서전 참가사 지원 사업을 일종의 시험 사업인 ‘파일럿(Pilot)’으로 삼는다면 내년에도, 그 후로도 참신한 정책적 시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책의 미래, 출판의 미래는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는 현재의 길이 미래를 열어젖힐 것이다. ‘출판하는 언니들’은 2024년이라는 맥락의 산물임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하여 앞서 언급한 독자와 동료들의 연대, 언론사의 연대가 이 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끝으로 강조하련다. 원래 후속편이 본편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은 법. 그럼에도 ‘출판하는 언니들’이 쇄를 거듭하고 개정증보판도 요청받는 등 단정한 책의 생애를 닮아 가도 좋으리라는 꿈은 즐거운 정신의 소유자라면 품어봄 직하다.
최지영 에디토리얼 대표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에서 좋은 선후배, 동료, 저자 들을 만나 즐겁게 일하며 배우고 성장했다. 현재는 1인 출판사 에디토리얼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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