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2 2022. 05.
[문해력의 중요성과 전망]
전병근(북클럽 오리진 지식큐레이터)
2022. 5.
종이책의 ‘신화’
지금 독서계에는 두 가지 물신주의가 있다. 종이책 물신주의와 디지털 물신주의다. 전자는 오랜 것이고, 후자는 최근에 등장해 빠르게 커지고 있다. 앞의 것부터 보자. 독서의 퇴조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말이 ‘디지털 때문에 사람들이 책과 멀어지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이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도 찬찬히 짚어볼 문제이지만, 이런 푸념에만 머물면 독서계의 위기감은 헤어날 길이 없게 된다. 이미 디지털 기술로 인한 사회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된 지 오래다. 독서를 종이책에 묶어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갈수록 위력을 더해가는 디지털 환경 속의 독서 수요 대응에는 그만큼 더 늦어지고, 아직 실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읽기의 수단이 종이책에 국한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지금 기술 상황에서는 여전히 종이책만의 고유한 특성이 엄연하다.) 종이책 역시 수백 년 전 인쇄혁명과 함께 서서히 진화하고 확산되어 온 기술 매체이고, 독서도 그런 책과 더불어 갈고 닦아온 인류의 기술이다. 과거 소크라테스는 문자라는 도구가 인간의 기억과 사고력을 약화시킬까 걱정했다고도 한다. 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어떤 영구불변한 가치의 유일한 담지자일 수는 없으며, 역사적으로 당대 기술 사정과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종이책으로 읽어야 ‘진정한’ 독서가 가능하다는 말도 불변의 진리라기보다는 특정 세대의 관성적인 사고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종이책과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 그 이면에는 기술의 발전과 인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책은 잠시 논외로 하더라도 뉴스나 보고서, 논문 같은 일반적인 읽기물의 경우 종이와 디지털 사이에서 고민하던 상황이 이제는 빠르게 디지털 적응이라는 단일 선택지로 옮겨가고 있는 형국이다. 지하철이나 사무실 풍경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코로나19로 급증한 비대면 수업과 미팅이 익숙해지면서 일상의 디지털 전환은 더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 책에서 찾던 정보와 즐거움을 상당 부분 인터넷에 연결된 디지털 기기로 해결한다. 디지털 기기는 그런 수요에 맞춰 빠르게 다변화하고 있다. 글로 된 텍스트뿐만 아니라 오디오와 동영상 매체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급격히 성장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조합의 콘텐츠를 귀나 눈, 혹은 둘 다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오디오북으로 즐겨 듣는다. 성우들의 구성진 사투리가 책으로 읽을 때보다 한층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특히 동영상의 위력이 독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 유튜브 동영상의 시청 시간은 매일 10억 시간이 넘는다. 많은 사람이 이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유튜브로 직행한다. 지금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는 디지털 매체를 읽기의 중요한 동반자로 삼는 한편, 일상의 기본 설정이 되다시피 한 디지털 환경을 독서 친화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종이책만을 독서와 등식화하고 있다가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점점 자리를 키워가는 디지털 기기의 잠재력을 다른 것에 다 내주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매체 다변화에 조응하는 노력을 독서출판계라고 피할 수는 없다.
디지털 물신주의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함정인 디지털 물신주의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사실 종이책 물신주의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이 더 많다. 그만큼 더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시가 중학생 1학년생 전원에게 태블릿을 나눠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지털 시대 경쟁력을 위해서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미국에서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일이다. 운전면허 제도는 없었다. 차량등록 제도만 있었다. 차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운전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운전면허 제도가 시행된 것은 한참 후였다. 차량등록보다 중요한 것이 운전자에 대한 적절한 교육과 자격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지금 태블릿을 지급한 교육 당국은 어떨까. 적지 않은 예산으로 아이들에게 최신 기기만 쥐어주면 만사가 해결될 거라고 본 걸까. 그것이 가져올 부작용은 충분히 따져봤을까.
관련해서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미국의 언어학자 나오미 S. 배런이 쓴 『지금 우리가 읽는 방식(How We Read Now)』(2021)이다. 저자는 디지털 기기의 확산이 정말 독서를 위협하는지 따져보기 위해 지난 20년 이상 축적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책에 따르면 뜻밖에도 독서의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곳은 학교다. 대학 교육에서는 물론이고 초·중등 교육 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 교수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은 디지털 자료를 적극 활용하고 과제물로도 내준다. 교실에서는 동영상 자료가 점차 읽기 과제물을 대신하고 있다. 학생이나 직장인도 무겁고 값비싼 종이책 교재나 참고서 대신 디지털을 택한다. 연구자들도 논문 작성과 발표, 공유를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비중이 커졌다. 교과서 출판업계 사람들은 초·중·고 과정의 종이책은 조만간 관심에서 밀려날 거라는 말까지 한다. 이처럼 학교들이 디지털로 몰려가는 데는 재정적인 원인도 크다. 게다가 학부모와 교사 들 사이에서도 아이들이 ‘디지털 혁명’에서 뒤지지 않는 것이 최우선 관심사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다른가.
문제는 대다수 디지털 매체가 종이책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더 얕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매체를 대할 때의 마음가짐(mindset)인데, 학생들은(아마 일반 성인들도) 디지털 매체를 대할 때는 은연중에 오락물처럼 대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피상화(shallowing)’라고 부른다. 반면 학생들은 종이책을 읽을 때는 더 힘들게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 결과 학생들은 종이책이 주는 추가 부담을 꺼리게 된다.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디지털 매체에 맞춰 발달된 학생들의 마음가짐은 종이책 읽기에도 영향을 준다. 전자책을 먼저 접한 아이들은 종이책을 꺼리게 되고, 심지어 종이책을 읽을 때조차 디지털 방식의 마음가짐을 취하게 된다. 이런 마음가짐은 결국 매체를 불문한 얕은 읽기의 일반화로 이어질 수 있다. 요즘은 종이책을 만드는 관계자들도 점점 즐거움의 요소를 강화하는 쪽으로 경쟁력을 높이려 애쓰는 것을 본다. 책의 본래 강점이자 목적인 읽기와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는 피상화의 악순환이다.
디지털 책은 잠재력이 크다. 가격이 비교적 싸고, 대단히 편리할 뿐만 아니라 검색에도 안성맞춤이다. 오디오북은 휴대하기 좋고 러닝머신 위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특히 매력적인 낭독자가 읽어주는 오디오북은 감정이입의 효과에서는 텍스트보다 나을 수도 있다. 읽기 장애가 있는 사람은 물론 종이책을 꺼리는 아이에게 오디오북이나 동영상은 독서의 세계로 이끄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디지털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그만한 주의와 노력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훨씬 어려운 문제이고 대단히 미진한 부분이다.
왜 읽는가
양극단의 독서 물신주의를 피하기 위해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은 독서의 의의와 목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독서의 목적을 정보와 즐거움에 둔다. 단지 그런 것이라면 종이책은 다른 경쟁 매체에 비해 승산이 높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의 결합은 정보와 오락물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훨씬 더 쉽고 빠르고 저렴하게 충족시킨다. 반면, 독서의 본령은 생각의 깊이(다른 말로는 복잡성)에 있다. 카프카가 적절히 비유했듯이 좋은 책은 얼어붙은 마음의 바다를 깨는 도끼다. 또한 일찍이 프루스트가 얘기한 대로, 자기 정신을 가동하면서 동시에 다른 정신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어 간다. 인문학이, 인간 교육이 독서를 근간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것을 다른 매개물로는 할 수 없는가? 이론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을 거쳐 뇌의 사고로 연결되면 가능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무미건조한 활자를 통해 다른 감각은 배제된 상태에서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매체로는 책만 한 것이 없다. 책은 수백 년 세월을 통해 그와 같은 개인의 ‘고독한 대화’에 최적화되어온 물건이다. 읽기 전용의 전자책이 그렇게도 종이책을 닮으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쓰는 디지털 기기, 대표적으로 스마트폰은 읽기가 아닌 다목적의 시청각 기기이고 깊이가 아닌 얕은 정보와 오락물 그리고 광고의 접속에 최적화되어 있다. 디지털의 비극은 그것이 인간보다 이윤에 봉사하는 기술로 급격히 확장돼 왔다는 사실이다.) 독서는 우리의 정신이 깊은 생각에 이르기 위한 오랜 인간적인 기술이자 구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읽기 또한 문화적 발명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읽는 뇌’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성적(後成的) 기반 능력 중 하나이다. 나아가 인류 특유의 진화적 산물인 복잡한 사고 능력을 잇고 키워가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 또한 책의 독보적인 가치가 ‘깊이 읽기’에 있다고 봤다. 깊이 읽기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유 과정에 속하는 유추와 추론, 공감, 비판, 분석, 상상의 능력을 기르고 유지하고 전수한다. 이러한 독서에서 핵심은 몰입, 즉 주의 집중과 그것에 필요한 시간의 의식적 지연이다. 만약 사용하는 매체에 따라 읽는 사람의 주의 배분과 질에 차이가 생긴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그 점에 유의해서 그 매체를 살펴봐야 한다. 읽기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문해력이란 그저 글을 읽을 줄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신이 또 하나의 정신과의 대화를 통해 성장해 가는 내면의 기술인 것이다.
깊이 읽기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삶의 방식인 민주주의와도 직결된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공감과 비판적인 사고 능력이다. 민주주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결해야 할 공동체의 크고 작은 문제도 많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기술이자 발판인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소셜 미디어의 폐해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독서의 최대 적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 속 주의력을 빼앗아가는 소셜 미디어라고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통계를 근거로 말한다. 그것의 해악성과 중독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적절한 제도적 대응책이 논의되고 일부는 추진되고 있다.
순간적인 정보 공유와 확산에 특화된 소셜 미디어에 의한 단문 중독은 사람들이 긴 글에 차분히 집중하고 자기 생각을 키워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진지한 작가와 독자들조차 점점 주의가 분산되는 경향이 커지면서 이제는 책을 읽을 때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짧아지고 깊이가 얕아지고 있음을 우려한다. 일찍이 니콜라스 카는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깊이 읽기가 이제는 투쟁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마셜 매클루언은 인간이 미디어를 만들지만 미디어는 다시 인간을 형성한다고 했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대다수 디지털 기술은 독서에 필요한 속도와 깊이를 권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휴대용 디지털 기기를 통해 어느 시대보다 많은 양의 글을 읽는다고 하지만 속도에 쫓기면서 읽는 텍스트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거나 파편화하고 있다. 동영상마저 빨리 보기를 택하는 사람이 많다. 깊은 사고는 긴 형식의 글과 씨름하며 길러질 때가 많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디지털 기기들은 얕은 읽기를 촉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읽기의 다변화를 위하여
결국 과제는 독서에 따라다니는 두 가지 물신주의를 피해 책의 본래 목적을 온·오프라인 양쪽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역동적 균형이다. 지금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기술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읽기를 위한 노력도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디지털 기술을 독서와 연결한 연구를 보면, 적어도 지금의 디지털 읽기 관련 기기의 개발 상황에서는 어린 아이에게는 종이책을 토대로 읽기의 기술을 쌓고 그것을 토대로 디지털 읽기를 병행하는 쪽으로 나아가라는 조언이 지배적이다.
이는 매리언 울프가 말하는 ‘양손잡이 읽기(biliterate reading) 뇌’의 길이다. 이중 언어 사용자(bilingual)가 상황에 따라 두 언어를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듯이, 울프는 이중 문해 능력자가 되어, 목표에 맞춰 읽기 방식(과 읽기 플랫폼)을 바꿔가며 적용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교육시키자고 주창한다. “궁극의 목표는 … 매체와 상관없이 깊이 읽기 기량에 시간과 주의를 할애하는 능력을 가진 진정한 양손잡이 뇌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디지털로 읽을 때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고, 텍스트에 집중하고, 무엇보다 멀티태스킹 충동을 눌러야 한다. 지금의 지배적인 디지털 환경(특히 스마트폰)은 사람들의 주의를 체계적으로 뺏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태블릿 기기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만으로는 위험하다. 연령/학년/수준별로 적절한 읽기와 자율적 사고 체험으로의 단계적인 인도와 훈련이 필요하다.
디지털 단말기나 플랫폼 회사, 콘텐츠 회사들이 깊이 읽기에 적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미디어 기술은 기술자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될 중대한 공적 사안이 되었다. 공기관이나 학계 연구자들이 관련 기업과 협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는 그런 노력들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글 콘텐츠에 맞는 디지털 읽기 도구(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 면에 걸친)의 개발에도 획기적인 진척이 있었으면 한다. 정부가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서는 무엇보다 습관 만들기가 중요하다. 몸의 건강을 위해 균형 잡힌 식생활을 이야기하듯이 마음의 양식인 책 읽기도 일상 속의 습관화로 이어져야 한다.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학생이나 성인의 독서량과 독서 습관의 상관관계가 높게 나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시대에 중요성이 커지는 것이 책모임 활동이다. 이것은 독서의 습관 기르기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독서는 고독한 활동이어서 고립되거나 위축되기 쉽다. 인간은 개인이기 전에 무리 동물이다. 무엇이든 함께 할 때 더 즐겁고 오래 갈 수 있다. 독서도 결국에는 여러 타자와의 대화이자 나눔이며, 그 자체가 즐거움이자 보상이 되어야 한다. 책읽기 모임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라고 체험자들은 말한다. 정신의 교감이기 때문이다.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독서 모임이나 함께 읽기 체험에 대한 만족도가 성인이나 학생 모두 매우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공공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각급 학교는 물론 도서관이나 지자체, 동네서점이 따로 혹은 함께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 모임이야말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를 수 있는 영역이다. 전통적인 책모임 말고도 요즘은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온라인 모임도 조금씩 늘어나고 활성화되는 추세에 있다. (해외에서는 요즘 개인의 온라인 독서 일기와 북클럽의 결성 및 운영을 결합해서 지원하는 포털이 각광받고 있다.)
특히 책모임을 이끌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진행에 필요한 인력과 참여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과 기술은 사소해 보이지만 독서 문화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컨대, 종이책은 독서의 모든 것이 아니다. 디지털 또한 그 자체가 위협이거나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기술은 인간의 지향을 증폭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향점이다. 책도 기기도 읽기도 인간의 기술이다. 특정 기술을 물신화하거나 그 논리에 사로잡혀서는 곤란하다. 기술은 계속해서 변할 것이고 우리의 대응도 그래야만 한다. 관건은 어떤 기술 조건에 처했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과 세상을 차분히 읽어보겠다는 마음가짐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병근(북클럽 오리진 지식큐레이터) 디지털 시대 휴머니티의 운명에 관심이 많다. 책을 읽고 옮기고 쓰고 가끔 이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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