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2019.05

VOL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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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지 않고, 책으로 써줘서 고맙습니다

이영미(마녀체력 저자) 출판 에이전트로 일하며, ‘인생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강의를 하고, 라디오와 팟캐스트에서 책 소개를 한다. 문학사상사, 디자인하우스, 웅진단행본, 펭귄클래식코리아 등에서 100여 권의 책을 만들었다.

“하필이면 왜 그리 먼 데서 책을 내셨어요?” <마녀체력>을 낸 뒤로, 사람들이 많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다. 궁금할 수도 있겠다. 책을 처음 내는, 출판계가 생소한 일반 저자라면 모를까. 이래봬도 나는 25년간 이 업계에서 밥을 먹은 베테랑 에디터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내로라하는 큰 회사를 다녔다. 여러 출판사 대표들과 교류할 만큼 발도 넓은 편이다. 그런데 왜 서울에 있는 수많은 출판사가 아니라 통영에 있는 자그마한 ‘남해의봄날’에서 책을 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부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봄날의책방

서울에서도 안 되는 출판을 하겠다고?

한 회사에서 근무했던 후배가 퇴사를 했다. 잡지 쪽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곧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작은 사무실에 두 사람이 앉아 일하던 기획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직원이 20명 가까이 될 만큼 번창했다. 영민하고 부지런한 일꾼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한창 키워 가던 피 같은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보니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것이다. 몸무게가 36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졌다. 사업이고 돈이고 다 소용없었다. 결국 후배는 바다 근처에서 요양을 하겠다며 아무 연고도 없는 통영까지 내려갔다. 1년쯤 지났을까. 제법 살이 찌고 체력이 붙어 이제 살 만하다는 연락이 왔다.
“여기 맛있는 거 많아요. 놀러오세요!” 난생 처음 머나먼 통영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이런! 낭중지추라고, 재주를 알아챈 사람들이 있어 후배는 거기서도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통영의 신선한 수산물과 바닷바람에 그런 효과가 있었나.
얼굴을 보고 온 지 몇 달 후, 갑자기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통영에서 출판사를 하고 싶은데, 전문가인 내 의견을 먼저 듣고 싶다는 거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후배의 말을 끝까지 다 듣기도 전에 도시락 싸 들고 반대하겠다고 나섰다.
“아서라! 서울에서도 다들 죽어라, 죽어라 하는데, 통영 구석에서 무슨 출판을 하냐?”
출판과 관련된 인프라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기회가 취약한 불모지라는 선입견이 강했다. 아무리 잡지 쪽에서 실력이 뛰어났다 해도, 출판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업이다. 출판은 진입 장벽이 낮아 일단 시작하기는 쉽다. 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책을 만들었던 지인들조차 하나둘 업계를 떠나는 것을 목격해왔다. 몸도 약한 후배가 큰 실망 끝에 다시 만신창이가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결과적으로, 선배의 충심 어린 진지한 조언은 철저하게 묵살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첫 책을 냈다며 우편물 하나가 날아왔으니까.
“하이고, 이런 책을 내면서 어떻게 먹고 살겠다고!”
슬쩍 훑어봐도, 의의는 있으나 잘 팔리긴 힘든 책이었다. 한편으론 걱정을 담아, 한편으론 내 예언이 틀리길 바라면서 책이 나올 때마다 조심스레 지켜봤다. 한 권, 두 권, 책이 나오는 것도 더디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출판사 옆에 손바닥만 한 책방까지 열었다고? ‘봄날의책방’? 봄날은커녕 한겨울에, 망하는 지름길을 달려 보겠다는 심사가 아닌가.

나무가 뿌리를 천천히 내리듯이

그런데 3년 넘게 통영에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견디던 새싹이 꼼지락대며 자라기 시작했다. 무슨 식물인지 몰랐던 나무가 오래된 떡잎을 떨구고, 윤기 흐르는 초록 잎이 하나둘 돋아났다. 이런저런 지면에서 ‘남해의봄날’의 책들이 소개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지방색을 살려 야무지게 기획한 책으로 출판대상을 받았다. 망하기는커녕, 내는 책마다 독자의 관심을 모으는 색깔 있는 출판사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봄날의책방’은 통영 촌구석인 봉수골을 꼭 들러야 하는 관광지로 바꿔 놓았다. 천생 기획자인 후배는 책방에도 특별한 컨셉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쓰러져 가던 폐가를 갈고 다듬어 통영의 예술가인 박경리의 방, 전혁림의 방으로 멋지게 꾸몄다.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책방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는 발상은 사람들을 어서 오라고 유혹했다. 그러니 여기서 사는 건 단순한 책이 아니라 ‘멋스러운 통영 여행’을 상징하는 추억이자 기념품이었다. 좁아터진 책방에서 잠을 자고 책을 사겠다고, 각지에서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형편없는 이 선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었다면 어쩔 뻔했나. 나는 후배의 앞날을 망치고, 출판계는 뛰어난 출판인 하나를 잃었을 것이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만약 내가 원고를 쓴다면 꼭 ‘남해의봄날’에서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던 겨울 내내 800매에 달하는 원고를 쓰고 나서, 슬그머니 후배에게 보내 버렸다.

저자 행사에서 이영미 작가의 모습

나이든 평범한 여성의 운동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그 원고가 바로 <마녀체력>이라는 책이 되었다. 젊은 것도 아니요, 몸매가 좋지도 않은 ‘나이 든 평범한 여성의 운동 이야기’가 과연 대중에게 먹힐까? <마녀체력> 원고를 완성하고도, 이런 주제가 책이 될지 의구심이 앞섰다. 더군다나 내가 해온 철인3종은 프로페셔널 선수나 동호인이 얼마 없는 비인기 종목이다. 그중에서도 내 기록은 꼴찌에 가까웠다. 작은 출판사니, 큰 서점의 매대를 사거나 온라인 광고를 할 마케팅 비용도 없을 터였다. 그동안 많은 책을 만들고 팔아본 경험으로, 이번엔 냉정하게 내가 쓴 책의 운명을 점쳐 보았다.
‘한 3,000부 팔리면, 아니 2쇄만 찍으면 종잇값은 건지려나.’
또 한 번 나는 형편없는 에디터이자 예언가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손익분기점이나 넘기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마녀체력>에 기대하지 못한 관심과 사랑이 쏟아졌다. 정말이지 통영의 바닷바람에는 마술 효과라도 있는 것인가. 마침 비슷한 시기에 신간을 출간한 김탁환 선생과 합동 북 콘서트를 갖기로 했다. 하루 만에 100명 신청이 마감된 전혁림 미술관 안에는 난간 옆 계단까지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전국의 동네책방들과 단단한 네트워크를 가진 ‘남해의봄날’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기’로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전국에 있는 동네책방을 돌며 독자와 직접 만나는 ‘달려라, 하니’가 아닌 ‘달려라, 영미’를 내건 것이다. 마치 이런 날을 위해 ‘마녀체력’을 키워왔다는 듯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배에 올라탔다. 중년의 여성이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고 속초에서 부산까지, 4개월에 걸쳐 25군데 서점을 순례하듯 돌아다녔다.
신흥 종교의 교주라도 된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경주와 포항을 오가며 세 번 연속 북 토크에 참석한 독자,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입원 중인데 몰래 빠져 나온 광주 독자, 책을 읽은 뒤 굳은 결심으로 운동을 시작해서 30킬로그램을 감량했다는 부산 독자…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면서 내 몸을 돌보지 못한 여성들의 간증이 눈물과 함께 쏟아졌던 시간들이었다.

이영미 작가 강의

책으로 하면 듣고, 말로 하면 안 듣고

어느새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책을 통해 뿌리내린 ‘마녀체력’이라는 종교는 계속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에디터에서 저자로 변신한 나는 50군데도 넘는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설사 로또 1등에 당첨되거나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고 해도, 이런 정도의 관심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책으로 써내고 공감 받은 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책을 읽고 난 젊은 여성들이 난생 처음 수영장에 등록하고, 엄마들이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는 사연들이 쏟아졌다. 나처럼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신노동자들이 체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운동을 시작했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혼자만 잘 살지 않고, 책으로 써줘서 고맙습니다.”
아, 겨우 책 한 권 냈을 뿐인데, 많은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이만큼 운동을 전도하는 데 성공했으니, 어쩌면 천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예감마저 들고 있다.
마흔 넘어 꾸준히 해온 운동은 내 육체와 정신, 나아가 삶의 모습까지 바꿔 놓았다. 하지만 이 놀라운 경험이 만약 책으로 구현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저 한 개인의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차려입고 방송에 나가 목청껏 떠들어대도, 정치인들의 선거공약처럼 허공을 맴돌았을 것이다. 심지어 늘 옆에서 운동하는 나를 지켜보던 가족과 친구들조차, 책을 읽고 난 뒤부터 괄목상대하기 시작했다.
10여 년 간 운동을 통해 천천히 변화하는 한 여성의 인생을 지켜보고, 자기 스스로의 삶에 접목해 나가는 것. 이런 과정을 단 2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카페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힘이다.
그동안 에디터로 일하면서 저자들한테 주문처럼 했던 말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몸소 경험했다. 책을 읽지 않는 세대,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책을 쓰고, 만들 수밖에 없는가. 한 개인의 삶 자체로는 단 한 사람의 마음조차 움직이기 어렵다. 그 삶의 정수가 책을 통해 제대로 구현될 때,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존재로 급등한다. 수천, 수만 명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을 얻는 것이다. 책에는 그런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커다란 위력이 담겨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좋은 책을 낼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준 ‘남해의봄날’. 빵이나 커피가 아닌 종이책으로 여행객이 붐비는 공간을 만들어낸 ‘봄날의책방’. 한 평범한 여성 저자를 유튜브 69만 조회 수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 <마녀체력>. 이것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나는 ‘책의 기적’이라고 하겠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만 기적인가. 작은 인연이 책이 되어 수많은 독자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도 크나큰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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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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