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09

VOL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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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보물 창고, 그러나 열쇠가 필요한

이명석(문화비평가) 문화비평가. 문학 단행본 편집자, 잡지 기자, 웹진 편집장을 거쳐 전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여행자의 로망백서 / 북하우스>, <모든 요일의 카페 / 효형출판>, <논다는 것 / 너머학교>, <은하철도 999, 너의 별에 데려다줄게 / 파람북> 등이 있고, 한겨레신문 ‘삶의 창’ 칼럼을 연재 중이다.

서울책보고

전철 2호선을 타고 강변역을 지나 한강 남쪽으로 넘어가면 잠실나루역이 나온다. 십 년 전의 이름은 성내역이었다. 그 몇 년 전까지 엘리베이터도 없고 연탄을 때던 시영아파트가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은 초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주변 풍경은 여전히 휑뎅그렁하다. 이곳 강변에 지난 3월 27일 거대한 책의 보물 창고가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서울책보고(이하 책보고)’. 서울시가 옛 암웨이 창고 자리 1465㎡(약 443평)에 책 판매장과 카페, 각종 행사 시설을 갖추어 놓은 복합문화공간이다. 특이하게도 이곳 서가를 채우고 있는 ‘보물’은 ‘헌책’들이다. 규모로만 보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공공 헌책방’이다.

서울책보고

널찍한 창고 대부분은 터널 형태의 서가들이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 10만 권이 넘는 헌책들이 꽂혀 있다. 운영을 책임진 서울도서관이 전국책방협동조합 등을 통해 헌책방들에 입점 의사를 물었고, 청계천의 동아 서점, 신촌의 공씨책방 등 모두 25곳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헌책방에서 가격을 매겨 책을 비치해두면, 책보고 측은 위탁 판매 수수료 10%만 공제하고 수익을 전해준다. 헌책 서가의 반대쪽엔 옛 교과서, 희귀 잡지 등을 모아놓은 특별 전시 코너, 독립 출판물의 상설 전시 서가, 카페와 강연 무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산뜻한 디자인에 넓이와 쾌적함까지 더한 공간에서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환영할 만하다. 출판 관련 문화시설이 많지 않은 강동 지역에서는 새로운 문화 구심이 될 것도 같다. 그런데 출판 관계자와 열정적인 독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왜 헌책일까? 왜 공공 헌책방일까? 왜 이런 일에 서울시가 직접 나섰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개관식에서 “서울책보고는 기존 헌책방들과 함께 오래된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입혀 책이 보물이 되는 복합문화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역사를 지켜온 헌책방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 헌책방들을 접근이 편리한 곳에 모으고, 시민들이 헌책이라는 보물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청계천 주변에는 1960년대부터 노점 형태로 헌책을 파는 상인들의 군락이 형성되었다. 청계천 복개 공사 이후에는 이들이 평화시장 일대로 모여들어 헌책방 거리를 형성했다. 이곳은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과 문인들, 오랜 자료를 찾는 연구자, 혹은 퇴근길에 취미 삼아 헌책을 탐험하는 직장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대학이 밀집된 신촌 지역에도 1990년대까지 헌책방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경제 상황이 나아지고 온라인 서점 등을 통해 쉽게 책을 구할 수 있게 되자, 헌책방을 찾는 발길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서울시와 서울도서관은 그동안 헌책방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다. 2013년에는 국내 1세대 헌책방인 공씨 책방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2015년부터는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 산책길에서 '서울 미래유산 청계천 헌책방 거리 책 축제'를 열고 있다. 2018년 마포대교 남단 서울색공원에서는 '한강 다리 밑 헌책방 축제’를 열어 헌책방 200여 곳의 책을 전시 판매하기도 했다. 책보고 역시 이런 헌책, 헌책방 육성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 편집자, 번역자 등 출판인들은 이런 헌책방 문화를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들이다. 틈날 때마다 헌책방을 찾아 숨은 보물을 찾는 이들의 상당수가 출판 관계자들이다. 하지만 ‘초대형의 공공 헌책방’이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출판계에서는 적지 않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업형 중고 서점이 시장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있는데, 서울시가 나서서 대규모의 중고 서적 판매를 시도하는 것은 아닌가?

책보고의 이한수 기획홍보팀장은 이런 우려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고 했다. “계약에 명시된 사항은 아니지만, 헌책방 주인들에게 분명히 제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헌책방의 이름을 걸고 창고에 쌓여 있는데 정말 빛을 보여주고 싶은 책, 혹은 사람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을 내놓도록 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 책이 될 수 있는 무한한 재생력을 지닌 헌책의 공급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실제 책보고의 서가에 꽂힌 책들 대부분은 10년 이상 지난 구간들이었고, 같은 책이 두 권 이상 꽂혀 있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책보고는 정반대편, 그러니까 이미 기업형 중고서점의 편리함을 맛본 독자들의 불평도 듣고 있다. 책보고의 개장 소식을 듣고 빠르게 방문한 시민들 중에는 SNS에 ‘책을 찾기가 어렵다’는 불평을 올린 이들이 제법 있다. 책보고의 홈페이지 고객마당에도 이와 관련된 문의가 많다. 요약하자면, ‘책을 왜 헌책방별로만 나누어 두었는가? 주제별로 책을 분류한다든지, 최소한 가나다순으로 정리해두면 찾기가 편리하겠다’ 등의 의견이다. 책보고에서 진열, 판매되고 있는 도서는 인터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헌책방 서가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기 때문에, 다시 수백 권의 책을 뒤져야 한다.

이에 대해 책보고의 이한수 팀장은 말한다. “신속한 도서 검색 후 찾던 책만 가지고 황급히 떠나는 공간이 아니라, 직접 각 헌책방 서가를 돌며 시간을 들여 책을 찾아야 하는 약간은 불편한 서점입니다. 하지만 개성 넘치는 책장들 사이에서 보물 같은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는 공간입니다.” 기업형 중고서점에서는 소비자들이 헌책을 가져와 되파는 것도 가능하지만, 책보고에서는 이런 방식도 배제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의도한 불편함’이 책보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장치가 되는 것 같다.

서울책보고

그럼에도 책보고에서 헌책방 거리를 산책한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서가별로 헌책방의 이름과 간단한 소개만 있을 뿐, 개별적인 책방이 주는 아늑한 공간감은 없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이한수 팀장은 이렇게 답했다. “특정 서점의 컬러를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령 ‘이달의 서점’식으로 특정 책방을 마케팅으로 띄운다거나 하는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전체 헌책방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저희의 기획 의도입니다.”

책보고를 찾은 북 칼럼니스트 박사 씨는 본질적인 약점을 지적한다. “원래 헌책방에도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기엔 책방 주인이 있잖아요. 책방 주인은 손님이 구하는 책을 금세 찾아주고, 어떨 때는 추천해주고, 없으면 구해주기도 해요. 이곳에서는 그런 인간적인 관계를 만날 수가 없네요.”

도쿄의 진보초 거리는 헌책방의 문화적 힘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장소다. 160개 내외의 헌책방은 저마다 고유한 분야를 다루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주인은 오랜 단골들과 유대를 이어간다. 희귀한 절판본이 헌책방에서 발굴된 뒤 복간되어 새로운 독자를 만나고, ‘이와나미 출판사’처럼 헌책방을 토대로 출판 사업을 벌여나가기도 한다. 책보고측에서도 출판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 잊혀진 책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헌책을 발견하고 판단하는 일을 고스란히 독자에게만 맡기고 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한 뒤에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 작가의 후속편은 없는지’ 물어볼 방법이 없다는 점은 무척이나 아쉽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책보고를 찾을 만한 매력은 분명히 있다. 책보고의 서가에는 시중의 서점에서는 절대 만나지 못할 수십 년 전의 잡지가 꽂혀 있고, ISBN이 없어 온라인 유통은 불가능한 대본소 만화들도 있다. 때론 헌책방 주인도 가치를 몰라본 희귀본, 초판본, 절판본 등의 보물을 찾아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기증도서 전시 코너에 있는 1970년대 <서울대 문리대학보> 같은 비매품 매체들도 헌책방을 탐험하는 재미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런 행운의 책에 붙은 가격이 아주 싸다. 만 원 짜리 한 장으로 추억이 담긴 책 서너 권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계산대의 줄은 길게 이어진다. 매장 관계자는 기대보다 판매고가 아주 높다고 자평했다. 독립 출판물만 모아 전시하는 코너도 인기가 높다. 현재는 여러 독립 서점의 추천을 받아 출판물을 구매해 선보이는 도서관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구매를 희망하는 시민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판매 계획도 있다고 한다.

서울책보고

최근 부산의 보수동, 광주의 계림동, 인천 금곡동 배다리 주변 등 지역에서 헌책방 거리를 보존하며 문화 여행지로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책보고’는 이런 헌책방 문화를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책보고를 통해 헌책을 찾아 읽는 재미를 얻은 독자가 청계천의 헌책방을 직접 가볼 수도 있고, 여행지에서 헌책방을 만나면 예전보다 편하게 들어가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출판 산업이 오랜 불황 속에 허덕이고 있는 지금, 중고 서적의 대량 유통 문제를 편하게만 보기는 어렵다. 책이란 어디든 전시되어 있는 것을 무료로 읽을 수 있고, 언제든 값싼 중고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시하면 곤란하다. 자칫 서울, 혹은 한국 전체가 거대한 헌책방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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