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09

VOL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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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책의 도시를 만나다

김욱(로컬앤드 대표)

사진 1_2018 글로벌 출판전문인력양성 참여진(필자 제공)

15년 전, 처음 만났던 도쿄의 풍경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출근하는 사람과 높은 건물, 복잡한 지하철만 봤으니 차이점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의 여행 뒤에 느낀 도쿄는 서울과 많은 점이 다른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서점과 지하철에서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단편적인 부분이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한국에서는 책 읽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2018년 9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주최로 다녀온 <2018 글로벌 출판전문인력양성> 프로그램은 일본의 출판산업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5일 동안 일본의 출판산업 최전선의 현장을 만나보았지만 한국과 비슷하게 인터넷 시작 이후의 출판산업은 그리 호황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점의 매출이 급감한 탓에 어떻게 하면 책을 많이 읽게 할 수 있을지, 잘 팔 수 있을지가 큰 고민인 듯합니다. 일본의 출판산업도 외형만 봐서는 한국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독자의 수’만큼 조금만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에서 책을 다루는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의 출판산업과 출판디자인을 통해 앞으로의 출판과 디자인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고민의 한 방편으로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디자이너로서 또 한때는 서점인으로서 이번 프로그램이 많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출판시장을 만나다

사진 2_후지사키 게이이치로(필자 제공)

<디자인의 현장> 전 편집장이자 현재 도쿄예술대학(東京芸術大学)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후지사키 게이이치로(藤崎圭一郎) 교수는 상업화의 목적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디자이너에게 중요하다는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상업 출판의 여러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활동으로 ‘독립출판’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편집자를 통하지 않은 디자이너의 결과물이 독자를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코믹마켓’도 그런 점에서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1인 출판사’나 ‘독립출판’이 큰 이슈입니다. 디자이너가 편집자를 통하지 않고, 또 편집자가 디자이너를 통하지 않고 다양한 출판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들이 하향세를 보이는 출판산업에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후지사키 교수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일본의 출판산업에서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지사키 교수가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관계에 대해 우려한 것과는 다르게, 쇼분샤(晶文社)의 사이토 노리타카(齊藤典貴) 편집장은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그동안 만나본 어느 편집자보다 열린 마인드의 편집인이었습니다. <쇼분샤의 책 만들기>를 통해 사이토 씨가 디자이너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쇼분샤는 소규모 출판사들이 생기던 1960년부터 지금까지 문학, 철학 등 인문서적을 만들고 있는 인기 있는 출판사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책이 3,100권이 넘으며, 매년 50권 이상 출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4년 대형 출판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기획한 ‘웨스턴 3부작’의 디자인을 시작으로 디자이너 한 사람에게 출판사의 디자인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 디자이너가 바로 히라노 코가(平野甲賀)입니다. 사이토 씨는 쇼분샤에서 편집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압축합니다. “편집자의 의향대로 디자이너의 영역까지 침범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글씨의 크기를 키워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고, 그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이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글씨의 크기는 결국 가독성을 높여달라는 뜻으로 한 의견이고, 그 방법이 글씨를 키우는 것일지 다른 디자인을 할 것인지는 디자이너의 몫이란 뜻입니다. 디자인 시안이 잘못 나오는 것도 결국 편집자 탓이라고 합니다. 책의 콘셉트를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연을 듣고 있는 우리가 모두 북디자이너라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지만, 디자이너를 신뢰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기준으로 디자이너를 고르기 때문에 가능한 마인드입니다.

최근 쇼분샤는 한국문학 중에 선별하여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한국문학의 선물> 시리즈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등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쿠온출판사(CUON)에서 이미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는 시리즈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을 출판했기 때문에 쇼분샤로서는 한국문학끼리 다투지 않도록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디자인이 겹치지 않도록 이미 한국문학 시리즈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피해서 디자인을 의뢰할 텐데 쇼분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같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면 오히려 디자이너가 그러한 차이를 주면서도 한국문학을 잘 살려서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에피소드입니다.

사진 3_<한국문학의 선물> 시리즈(쇼분사)(필자 제공)

진보초(神保町) 근교에 있는 출판 디자이너 사토 아사미(佐藤亜沙美)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최근 일본의 출판 디자인을 선도하고 있는 사토 아사미 씨는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 광고, 음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디자이너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한다는 것은 이런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아사미 씨의 디자인 특징은 ‘계획’입니다. 작업들이 대부분 화려하고 아이디어가 많이 담긴, 그리고 공들여서 작업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이러한 작업의 이면에는 아주 자세하게 정리한 계획표가 있었습니다. 사토 씨는 원고를 비판적으로 읽고, 아이디어를 체크해서 계획표를 만든다고 합니다.

자세한 계획을 짜는 것은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출판사와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모두 사토 씨와 같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에 공을 들이는 것은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보다 보니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사토 아사미 씨의 스튜디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책보다 모두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사토 씨의 바람을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북디자인을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 독서인구의 변화를 느끼다

일본의 출판산업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책의 수요는 꾸준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림책의 성인 수요는 늘어났다고 합니다. 성인들도 쉽고 따뜻한 내용의 그림책을 많이 보는 것으로 힐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갈 곳을 잃은 정년퇴직자들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손주들을 위해 그림책을 사 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재미있는 결론은 포레스트출판(フォレスト出版)의 대표 오타 히로시(太田宏)의 <팔리는 책을 만드는 방법>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오타 히로시는 경제경영서 전문 출판사의 대표답게 일본 출판산업의 흐름을 파악하고 팔리는 책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일본의 최근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비즈니스 서적에서 건강관리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건강관리 식사 방법』이나 『하루 1분 인생 변화』, 『읽기만 해도 시력이 좋아지는 책』 등 어쩌면 터무니없는 민간요법인듯하지만 그 수요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타 히로시 대표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정년퇴직자들이 갈 곳이 어디인가?” 정년퇴직 이후에는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정년퇴직자들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갈 곳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안 드는 곳을 찾아가게 됩니다. 1위는 도서관, 2위는 극장, 3위는 스포츠 그리고 마지막 4위는 서점입니다. 바로 이 서점에서 자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아끼는 손주를 위해 어린이 그림책을 사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답입니다.

오타 히로시는 이어서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정년퇴직자들은 어떤 것을 궁금해 할까?” 1위는 역시 건강입니다. 그리고 2위가 돈, 3위가 장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1위가 건강인 이유는 바로 이어서 나온 2위 돈 때문입니다. 건강해야 병원비가 들지 않고, 그래야 고령화사회에서 자녀들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병원비가 많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의료보험비가 많이 든다는 뜻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세금의 비효율성 때문에 민간요법을 장려하고,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를 하게 됩니다. 결국 출판사가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건강관리 식사 방법』 같은 민간요법 책이 잘 팔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65세 이상의 인구비율, 즉 고령화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고령 인구가 늘어났다기보다는 노인들은 장수하고, 출산율이 떨어져 청년층이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산업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독자가 줄었다기보다는 20, 30대는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으로 독서 인구에서 빠져나갔지만, 노인들은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 독서 인구로 남았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한국도 이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 일본보다 빠르게 고령화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출판산업을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일본 디자인의 현재를 만나다

‘크리에이션 갤러리 G8(Creation Gallery G8)’에서 열린 ‘굿디자인 컴퍼니(Good Design Company)’의 20주년 기념전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굿디자인 컴퍼니의 대표 미즈노 마나부(水野学)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계기는 몇 년 전부터 인기 있는 구마모토 현의 캐릭터 ‘쿠마몬’ 때문입니다. 양쪽 볼이 빨간 검은 곰 캐릭터 덕분에 구마모토 현이 새로운 관광지로 뜨고 있다는 소식처럼 그의 활동은 최근 일본의 산업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캐릭터나 브랜딩뿐 아니라 상품의 기획,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전 방위적으로 디자인 활동을 하고 있어 알게 모르게 그의 디자인을 만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팔다’에서 ‘팔리다’로』(이콘)를 비롯해 『센스의 재발견』(하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매년 어렵다는 출판산업이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출판산업은 동네서점과 독립출판을 기점으로 일본과 다르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출판계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출판산업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런 성장 에너지를 부러워하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이 일본보다 10여 년 늦는다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출판산업과 같은 지식산업은 이제 일본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것 같습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모습도 정보화 시대에서는 장점이라고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출판산업을 배우고 느끼러 왔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출판산업도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9명의 북디자이너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가 커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먼저 제 자신부터 한 걸음, 한 뼘 더 나아가고 커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진 4_굿디자인 컴퍼니의 전시 중 일부(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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