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09

VOL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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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바다’ 그리고 한국 북디자인 10선

전가경(사월의 눈 대표, 그래픽디자인 연구자)

1. ‘생각의 바다’

이것은 사진가 구본창의 첫 사진책 이름이자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1995년에 설립한 출판사 이름이기도 하다. 1983년, 1년간의 프랑스 유학 후 당시로서는 여전히 북디자인의 불모지인 한국에 귀국한 정병규는 이듬해 1984년 ‘정병규 디자인’을 설립한다. 이는 국내에 ‘북디자인’이라는 개념과 행위가 유통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1985년, 독일에서 사진디자인을 수학한 구본창이 귀국한다. 어떻게 인연이 된 그들은 종종 만나 얘기를 나눴고, ‘생각의 바다’라는 말이 간혹 한번씩 언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이 된 해에 구본창은 정병규에게 자신의 첫 사진책 이름으로 ‘생각의 바다’를 써도 되냐고 묻는다. 정병규의 동의로 구본창의 첫 사진책은 <생각의 바다>라는 이름을 달고 행림에서 출간된다.

이 사진책에는 현재는 기계비평가인 이영준의 첫 ‘구본창론’이 수록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5년, 정병규와 구본창은 의기투합하여 ‘생각의 바다’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첫 출간물로서 <신체 또는 성>이라는 전시 도록을 발행한다. 탁한 붉은색에 ‘신체 또는’이라는 제목 글자가, 다이컷팅 된 표지 한가운데에는 ‘성’이라는 제목 글자가 은박으로 찍혀 있다. 1990년대 붉어진 신체에 대한 사유와 논의를 구본창을 포함한 총 아홉 명의 작품들을 통해 집결시켰다.

‘생각의 바다’라는 출판사명으로 또 한 종의 중요한 책이 나온 게 1996년. 국내 북디자인 역사에서 이 해는 중요하게 기록될 해로서, 다름 아닌 국내 사상 첫 북디자인전이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정병규의 나이는 50세. ‘북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로부터 10년이 조금 넘는 시점에 정병규는 명실상부 국내의 상징적 북디자이너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로부터 그의 두 번째 북디자인전이 열린 게 7년 뒤인 2003년이었다. 영월책박물관에서 파란색 도록이 출간되었는데, 그곳엔 은박으로 “책의 바다로 간다”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생각의 바다’라는 두 단어로 조합된 용어는 망망대해의 책 이미지뿐만 아니라 감히 몇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책과 관련된 사유의 거대한 부피를 떠올린다. 그것은 ‘한국 북디자인 10선’이라는 과제 앞에 서 있는 나의 심정과 유사하다.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불분명한 국내 출판 생태계에서 10종의 책을 건져 올린다는 발상이, 북디자인이라는 개념 설정이, 10선이라는 한정된 선정 범주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행했다. 10종의 책들을 숙고 끝에 선정했고, 그 나름의 이유를 달았다. 가급적 선정의 배경과 이유를 논하는 방편으로서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코멘트를 덧붙이고자 노력했다.


2. 책이 현대적이기 위한 조건들

특정 범주 안에서 어떤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에는 기준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국 북디자인 10선’이라는 과제를 안은 이번 선정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엔 다소 진부하다고 할 만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먼저, ‘한국’이라는 국가적 테두리는 북디자인 선정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스위스만큼 복잡한 다국어 체제도 아닐뿐더러 미국만큼의 ‘멜팅팟’ 국가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들고 제작한 책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한정 짓는다.

다음으로, ‘북디자인 10’선. ‘북디자인’ 그 자체로서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 이것은 그다지 복잡한 이슈가 아니다. 디자이너마다 좋은 북디자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을지언정, 북디자인이 한 종의 책을 만듦에 있어 중요한 조형적 과제를 수행한다는 점에 대해선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낱장이나 파편의 글 혹은 이미지 원고에 통일된 형식을 부여하는 게 북디자인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10선’이다. 논쟁은 여기서 시작한다. 특정 기준과 잣대가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뿐만이 아니다. 시대도 그렇다.

캐티 로버트-두러: 과거에 책의 아름다움(좋은 북디자인)이란 기술적 완벽함을 의미했던 것 같다. 가령, 합자의 완벽한 사용 말이다. 그래서 심사단은 이런 디테일을 매우 세심하게 들여다봤고, 이 중 어떤 오류라도 생기면 책으로서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책을 전체적인 하나의 큰 작업으로서 바라본다. 예를 들어, 올해 ‘끔찍한’ 조판을 봤지만 결과를 좌우할 만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33)

라우렌즈 브루너: 앞서 말했듯이 이 시상 제도가 처음 생겼을 때는 기준을 세우는 게 중요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린다 반 되르센: 이제는 규율을 어떻게 부수는지가 더 중요해진 것 같다.(35)

위 내용은 ‘2007 스위스의 아름다운 책’ 심사 관련 대화 중 일부다.1) 선정 기준은 개인과 시대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선정 주체의 취사선택으로 귀결된다는 다소 따분하면서도 회의론적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한가지 명료한 것은 기준에서 ‘동시대성’이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좋은 북디자인에 대한 선정 기준이 유동적이고 개인과 시대에 따라 굴절될 수밖에 없다면, 이를 긍정하고 수용하되, 기준의 동시대성을 고려하는 게 최우선이지 않을까?

가령, ‘물성’이 북디자인에서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에선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겠지만, 어떤 물성이 좋은 북디자인의 바로미터가 될 것인가는 별개의 심오한 질문이 된다. 선정 결과물은 바로 이 예민한 지점에서 엇갈린다. 현재 대다수가 동의하는 좋은 물성의 기준을 택할 것인가, 혹은 낯설지만 조금은 근미래로 책의 형태를 이행시키는 새로운 접근의 물성이 좋은 북디자인의 조건이 될 것인가. 전자는 당연히 안전하다면, 후자는 논쟁적이다. 그리고 나는 좋은 북디자인 선정 배경에는 후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엘 리시츠키도, 얀 치홀트도, 정병규도, 스기우가 고헤이도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이 활동한 시대에 안주하는 북디자인이 아닌, 내일의 시공간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책의 ‘아방가르드’를 제안했던 자들이다. 선정 결과가 친숙하기보다 낯설 수도 있는 이유다.

이들의 태도를 계승하여 이 글에서 나 또한 ‘현대적 책으로서의 자격 혹은 조건’을 선정 기준으로 내세웠다.2) 동시에 현장에서 사진책을 만드는 나의 시선을 적극 반영했다. 사진책은 문자가 아닌 이미지 중심으로 구현되는 책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전통적 구문론에 기댈 수 없는, 반전통적 매체다.3) 나아가 이미지 중심의 책이라는 특질은 문자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책의 여러 ‘전통적’ 규범들은 의문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곧 사진책이라는 장르 자체에 잠재된 책의 현대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고민의 연속 속에서 총 다섯 가지의 선정 기준을 제시했고,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확장성. 기존 관점에서는 ‘책’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을 책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의 의미다. 둘째, 책의 구조 및 이와 맞물려 돌아가는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다. 셋째는 물성이다. 넷째는 제시된 기준들 중에 가장 현대적이며 그래서 인습 타파적이라 할 수 있는 활자 사용이다. 다섯 번째는 이제 책을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 태도로서의 젠더 감수성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킨 책들을 소개하면서 각 선정 기준에 대한 이유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선정의 범위는 다소 넓다. 국내 본격 단행본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출간된 책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출간된 책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광활한 ‘생각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한국 북디자인 10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곁을 스치며 인상 깊게 포착된 책들을 선정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40년이라는 망망대해에 비해 실제 그 부피는 얄팍했음을 고백한다.

강조하건대, ‘북디자인’이란 이름 하에 특정 책을 선정해서 살펴보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책의 형태를 ‘정리’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이후’의 책을 상상하고자 하는 현재의 몸부림이고자 한다.


3. 현대적 책의 조건 1: 확장성

지난 몇 년간 국내 시각문화 씬(scene)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가 미술가와 디자이너 간의 협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협업을 기반으로 생산된 도록이다. 도록은 여전히 일부에선 전시의 부속물로 인식되곤 한다. 도록의 관점이라는 게 있다고 상상해볼 때 단행본이나 ISBN이 찍힌 정식 출간물 중심의 생태계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출판 카르텔이다. 그러나 좋은 북디자인은 도록을 책이라는 인식망 안으로 삽입시킬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상당히 급진적인 디자인이었지만, 1990년도에 발행된 <보고서\보고서> 5호가 바로 이런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1988년 창간된 안상수와 금누리의 <보고서\보고서>(도판 1)는 한 명의 디자이너와 한 명의 예술가의 의기투합으로 엮은 실험적인 한글 타이포그래피 간행물이자 문화/예술 잡지였다. 이 중 5호는 ‘선데이서울’이라는 전시의 일환으로 출간된 도록이자4) 잡지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 인쇄물이었다. 잡지이자 도록인 <선데이서울>은 인쇄물 자체가 전시에 대한 적극적인 발화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무언가가 주류계에 도전장을 내민 격이랄까. 전시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주류’ 매체인 전시의 기세에 안 눌린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마냥 안상수 디자이너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안상수체는 새로운 문자성의 표출로서 문자의 시각성을 적극 표출했다. 파편적 자소들로 분해된 한글은 <선데이서울>에서 ‘읽는 글자’가 아닌 ‘보는 음표’로 그 위상이 변화했다. 판형, 조판, 활자, 편집 등 여러 면에서 범상치 않음을 뽐냈던 도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형적 완결성과 독자성을 구축했다.

비슷한 시기, 또 하나의 사례가 정병규가 디자인한 <밝은 방>(도판 2) 학회지다. 이 책은 A4보다 옆으로 조금 긴 너비의, 제법 큰 판형에 상하단이 흑백으로 분리된 기하학적이면서도 현대적 면모의 표지를 자랑한다. 표지 오른쪽 상단에서부터 굵은 명조의 제목, 면이 흑백으로 분할되는 중간에는 학회지 발행번호인 숫자 1이, 바로 그 밑에는 ‘사진학회 카메라 루시다’라는 학회명 그리고 가장 하단에는 출판사명이 차례로 오른쪽 흘리기가 적용되어 있다. 문자와 흑백의 면 분할로 이뤄진 표지는 개념적인 현대미술의 기운을 강하게 풍긴다.

내지의 구성 또한 흥미롭다. ‘논고’와 ‘작품’라는 두 파트로 구성되었다. ‘작품’에는 사진가들의 사진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극적인 편집으로 배치된 구본창의 흑백사진 연작인 ‘긴 오후의 미행’이 매력적이다. 적극적인 화면 편집으로 학회지는 사진책의 편집과 물성을 능가하는 모습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완벽하게 분리된 채, 이미지 중심의 2부 편집에서 문자 중심의 세계는 잠시 이미지에 자리를 내준다. 북디자인의 개입으로 인해 제도권 출판 지형에서 학회지가 독립적 단행본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고, 일반 책으로 확장된 경우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그 추이를 짚어볼 수 있는 도록이나 학회지의 확장성은 1988년 이후 급변한 국내 정치, 문화 소용돌이의 자장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화에 대한 첫맛,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 디지털 환경의 도래 등 여러 사회문화적 요소들은 제도권 내 관습에 대한 의문을 낳았고, 영역 가르기를 수행했던 기존의 경계선들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미술가와 디자이너가 협업하는 양상이 199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도록과 학회지가 매체로서 확보한 확장성은 1988년 이후의 사회가 분열증 속에서 상상해온 경계 가르기의 과감한 시도이자 그 결과였다.



도판 1 _ <보고서보고서 –5: 선데이서울>(1990) / 편집인: 금누리 / 편집장: 김영주 / 수석 디자이너: 신경영 / 디자인: 이현주 / 컴퓨터 디자이너: 김강정 / 제본: 무선 / 판형: 211×241mm / 페이지수: 160쪽




도판 2 _ <밝은 방 1> (열화당, 1989) / 디자인: 정병규 / 인쇄: 옵셋 / 제본: 무선 / 판형: 224*290mm / 페이지수: 92쪽


4. 현대적 책의 조건 2: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

책의 형식적 실험들이 시도됨으로써 북디자인이 별개의 독립적 장르로서 자리매김할 때 책에서의 이야기를 직조해 나가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 변화는 사진과 함께한다. 문자 중심으로 지면에 나열되는 책의 구조는 전통적인 선형적(線形的) 세계관을 대표한다. 책은 표지에서 속표지, 차례, 본문 등의 구조를 지키며, 문자는 책의 공간적 질서에 합류한다. 그 속에서 문자들은 행과 문단으로 나열된다.

그러나 사진의 개입은 기존 문자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한다. 그 관계 설정이란 내용과 형식 두 층위에서 진행된다. 사진과 문자는 각각 어떤 내용을 담아내는가란 내용적 층위의 질문뿐만 아니라, 사각형의 지면 안에 어떤 공간적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란 형식적 층위의 질문도 수반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문자 중심의 책이 구현해낸 전통적 공간의 질서는 의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는 책의 구조 변환으로 이어진다.

구미권의 경우, 192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 의해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 구축을 통해 책의 공간과 질서가 새롭게 탐구되기 시작했다. 사진과 텍스트가 급진적인 양태로 지면에 등장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북디자인에 대한 의식적 사고를 포함해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 구축에 대한 의식적 개입과 성찰은 1980년대에 들어서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역으로 북디자인에 대한 자각 없이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 구축은 불가능함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아래 세 종의 책들은 각 시대에 따라 흥미로운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독특한 북디자인의 면모를 제시한 단행본들이다.

<압구정동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도판 3)는 앞선 <보고서\보고서> 5호와 함께 ‘확장성’ 기준에도 해당되는 독특한 단행본이다. 이 책은 1992년도에 열렸던 ‘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전시에 맞춰 발행된 단행본 형태의 도록이다. 지금도 미술 관련 서적을 발행하는 현실문화연구(당시 발행인은 김진송)에서 출간했다. 책은 1990년대 신세대 미술의 전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혼합 매체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여러 이미지들이 책 곳곳에 산만하게 인쇄되어 있다. 이 이미지들은 대부분 포토몽타주의 전형을 드러내고 있는데, 판권에서는 이 ‘이미지’를 ‘이미지 생산’이라는 항목으로 소개한다.

함께한 작가들은 김복진, 박불똥, 이지누, 정기용 등인데 작가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미술, 사진, 건축 등 여러 장르의 교차적 시점에서 이미지를 생산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1990년대의 혼합 매체의 성격을 계승하기라도 하듯 책의 디자인 또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축에 두고 각 챕터를 구성했다. 이미 차례가 제시하듯이 각 챕터는 글과 이미지로 분화된다.

가령, 첫 번째 챕터의 경우, 강내희가 ‘압구정동의 문제 설정 - 한국자본주의의 욕망 구조’를 기고했다면, 박불똥은 ‘세계자본주의와 압구정동’이라는 제목으로 이미지를 ‘생산’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어느 하나에 종속되지 않은 채 균등하게 지면 안배를 받으며 서로 충돌하고 대치하거나 평행한다. 유일하게 한 챕터가 사진가 이지누의 사진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이 또한 캡션이 달려 있는 사진 에세이 형식을 취한다. 본문은 기본적으로 왼쪽에는 이미지, 오른쪽에는 텍스트로 구성하되, 텍스트 지면에도 여백에 작은 도판을 실음으로써 지면에 이미지와 텍스트의 긴장관계를 촉발시켰다. 1990년대 미술계와 디자인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그러나 아직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수작 중 하나라고 본다.

현암사에서 2007년도에 출간한 <혼(魂) - 김수남 사진굿>(도판 4)은 일반 단행본 출판사에서 보기 드문 사진편집과 타이포그래피를 자랑한다. 평생을 아시아의 샤머니즘과 한국의 굿 기록에 몸 담은 사진가 김수남의 단행본으로서, 챕터마다 상이하게 적용된 타이포그래피와 사진편집이 인상적이다. 특히 세로짜기와 가로짜기의 혼용이 이색적이다. 현재는 ‘섞어짜기’란 이름 하에 세로짜기가 적극 시도되는 환경이지만, 2000년대 중후반에 가로짜기와 세로짜기의 동시 조판은 드물었다. 총 세 종의 다른 종이가 사용되어 각 챕터에 대한 구조적, 물성적 차별화를 꾀한다. 책은 선형적으로 읽히기보다 높낮이가 다른 선율처럼 다가온다. 장마다 다르게 변주되는 타이포그래피와 종이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북디자인은 홍디자인에서 진행했다.

지난 몇 년간 근대소설을 재출간 혹은 복간하는 바람이 일고 있지만, 이 중에서 디자인적으로 흡족한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종이섬이라는 1인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태준의 단편집 <꽃나무는 심어놓고 외>(도판 5)는 저작권 없는 근대 저작물을 ‘현대’로 호출할 경우, 그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반가운 단서를 제공한다. 과거의 것을 출간할 때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복고’다. ‘복고’는 과거가 선사하는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명성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복고’에선 상대적 친밀함이 우위에 섬으로써 디자인적 실험이 지니는 중요성은 후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명성에 기대어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만큼 안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근대소설의 복간 작업에선 이렇듯 ‘복고’적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종이섬에서 나온 이태준 단편집은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이태준이 묘사하는 근대에 2010년대의 파편적 풍경 이미지를 덧붙여 놓은 것이다. 행간 사이로 읽히는 근대의 이미지에 현대의 이미지들이 중첩되거나 뒤섞인다. 경우에 따라 글에 종속적이고 그래서 설명적인 사진들이 옥의 티로 작용하지만, 오혜진 디자이너의 강박적이지 않은 여유로운 조판 속에서 이태준의 단편집은 2010년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읽히는 풍경이 된다.

돌베개에서 나온 <역사의 역사>(도판 6)는 기존 상업 출판사에서 시도할 수 있는 사진 아트디렉션의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국내 출판 환경에서 표지나 내지를 전문 사진가에게 의뢰하여 별도의 표지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표지 사진 한 장에 스튜디오 촬영 등 상당한 비용을 할애하는 미국 상업 출판계와는 대비되는 국내 상업 출판계의 모습이다. 이러한 열악한 풍토 속에서 <역사의 역사>는 통쾌한 미감을 선사한다. 사진가에게 책의 콘셉트 및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프로젝트를 청탁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삽입된 사진들은 <역사의 역사>에 대한 메타-이미지들로 기능한다. 일반적인 역사서들이 문자 중심의 조판을 관습적으로 감행했다면, <역사의 역사>는 저자 글에 대한 사진적 해석을 담대하게 적용했다. 글을 읽은 후 마주하는 사진들은 일종의 환기 작용을 한다. 일반 단행본의 구조에서 일탈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는 제약된 조건 속에서 사진은 절제된 톤으로 글을 논박한다. 북디자이너 김동신이 디자인했고, 사진은 사진가 김경태의 작품이다.



도판 3 _ <압구정동: 유토피아, 디스토피아>(현실문화연구, 1999) / 저자: 강내희 외 / 디자인: 김복진, 조하익 / 인쇄: 옵셋 / 제본: 무선 / 판형: 188*257mm / 페이지수: 170쪽




도판 4 _ <혼(魂) - 김수남 사진굿>(현암사, 2007) / 저자: 김수남, 고운기 / 디자인: 홍디자인 / 인쇄: 옵셋 / 제본: 반양장 / 판형: 148*210mm / 페이지수: 304쪽




도판 5 _ <꽃나무는 심어놓고 외> (종이섬, 2017) / 저자: 이태준 / 사진: 박현주 / 디자인: 오혜진 / 인쇄: 옵셋 / 제본: 무선 / 판형: 128*188mm / 페이지수: 120쪽





도판 6 _ <역사의 역사>(돌베개, 2018) 표지 및 <역사의 역사>를 3권으로 분권해서 발매한 ‘99그램 에디션’ 표지 3종 / 저자: 유시민 / 디자인: 김동신 / 사진: 김경태 / 인쇄: 옵셋 / 제본: 무선 / 판형: 152 x 225mm/ 페이지수: 336쪽


5. 현대적 책의 조건 3: 물성

인쇄와 후가공, 제본 등은 북디자인을 가장 깔끔하게 매듭짓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로 넘어와 독립출판에 대한 문화계의 관심사 및 작은 동네 서점들의 잇따른 출몰로 책을 소비하고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그중 하나가 책을 ‘외양’만을 이유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용 중심으로 책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탈환이자, 책의 물성에 대한 재조명이다. 다만, ‘물성’을 떠올릴 때 대다수는 어떤 ‘과잉된’ 북디자인적 제스처를 상상하게 된다. 여러 후가공, 독특한 판형이나 제본 방식, 손의 노동을 그대로 과시하는 공예적 효과들, 그래서 비쌀 수밖에 없는 제작비 등. 그러나 이 또한 물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시대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대척점에 놓여 있는 두 종의 책을 사례로 들고 본다.

단행본 시장에서 46배판이니, 국판이니 하는 규격화된 체제가 부분적으로 무너지면서 다양한 판형과 구조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도입된 북디자인이라는 ‘개념’과 ‘장르’에 대한 인식에 더해 1990년대에는 북디자인이 하나의 전문 분야로 각광받으면서 좀 더 저돌적인 실험들이 감행되는데, 그 뒤에는 1세대 정병규의 뒤를 잇는 박상순, 서기흔, 송성재, 이나미 등의 새로운 디자이너 집단의 출현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이나미는 2000년대 초반에 ‘북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새롭게 만들며, 자신이 생산하는 책을 새롭게 정의해 나갔다. 북 프로듀서라는 의미 부여를 통해 책은 그 자체가 독립적 작품이 될 수 있는 예술적 위상을 얻게 된다. 이나미가 디자인한 <금단의 열매>(도판 7)는 ‘북 프로듀서’로서의 생각과 태도가 낳은 여러 결과물 중 하나다.

이 책에서는 국내에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북아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정사각형에 금속성 표지의 책은 표면상 일반적인 책으로 보이지만, 표지를 열면 다면체의 입체적 구조를 품고 있는 책이 튀어나온다. 거울과 같은 비침이 있는 앞뒤 표지 가운데로 책은 사방에서 아코디언 방식으로 열렸다 닫히는 구조를 취한다. 도록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이 책은 제 3회 성곡미술 기획대상 수상작 <금단의 열매>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을 본 전시의 일환인 post-production book project로 제작되었습니다.” 전시의 연장이자 개별 작품으로서 이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주의 타이포그래피의 전형을 따르는 내지 타이포그래피와 책에서의 공예적 면모를 최극단으로 끌어올린 사례 중 하나라는 점에서 도록이자 책인 <금단의 열매>는 1990년대 북디자인 실험의 한 단면을 조명한다.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물성에 관한 사례로는 2010년대 생산된 책을 들 수 있다. 사진가 정희승과 디자이너 박연주가 협업하며 꾸리는 헤적프레스에서 출판되는 ‘플로트’ 시리즈(도판 8)가 그 예다. ‘플로트’는 정희승과 박연주가 비정기적으로 여는 출판 프로젝트로서 경우에 따라 이 프로젝트는 단발의 이벤트 혹은 전시로 연계된다. ‘플로트’ 시리즈는 경제적이다. 판형은 A4에 16쪽이다. 도록이나 미술 작품을 담아내기엔 다소 ‘가난한’ 플랫폼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만큼 유연하기도 한 이 시리즈는 오히려 제약된 조건 안에서 파생시킬 수 있는 북디자인적 실험들과 이와 연동되는 예술적 실천 혹은 퍼포먼스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 매체로서 기능한다.

그런 면에서 앞선 이나미가 디자인한 <금단의 열매>와는 물성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측면에서 상당히 상반된다. <금단의 열매>가 전통적 의미로서의 과잉된 공예적 물성을 대변한다면, ‘플로트’ 시리즈는 금욕적 감각의 물성을 실천한다. 전자가 ‘양’의 물성이라면, 후자는 ‘음’의 물성이다. 후자의 물성은 시각적으로 표출되기보다 개념적으로 해석되고 변환된다.



도판 7 _ <금단의 열매 – 성곡미술관 기획전 작품집>(2002) / 디자인: 이나미 / 판형: 200x200mm / 페이지수: 58쪽





도판 8 _ ‘float’ 시리즈 중 일부 (헤적프레스, 2014~2018) / 디자인: 박연주 / 인쇄: 옵셋 / 제본: 중철 / 판형: 297x210mm / 페이지수: 16쪽


6. 현대적 책의 조건 4: 활자

기존 서체를 어떤 새로운 ‘용례’로 제시하는가는 디자이너에게 분명 매력적임과 동시에 도전적인 과제임에 틀림없다. 흔히 서체를 책의 내용에 비추어 표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대세고, 여기에는 특정 서체에 가미된 인상이 서체 선택을 좌우하게 된다. 가령, 누군가의 육성이 반영된 내용에는 고딕체보다 손글씨의 흔적이 가미된 서체를 찾기 마련이다. 이것은 글자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표현적 속성과 연결된다. 목소리의 시각적 구현이자 기록으로서 문자는 발명되었으며, 이 목소리의 흔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내용과 타이포그래피를 ‘표현적’으로 연결하도록 부추긴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글자들이 유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기되는 질문은 이러한 서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현대적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반표현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다. 내용을 상정하고 그에 맞춰 서체의 기존 인상에 근거해서 서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가급적 서체의 조형을 ‘디폴트’ 상태에서 상상해보고자 한다. 그곳엔 어떠한 값이 없다. 우리의 인식망 안에는 못생기고 잘생긴 글자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각 조형관에 따른 검증되거나 검증되지 못한 글자들이 있다. 물론 인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미의 기준은 분명 있다고 치자. 그러나 이 기준이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옵신 7호>(도판 9)는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서체의 선택과 용례에 대한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그곳엔 제도권 디자인계는 사용하길 꺼리는 엽서체가 본문 서체로 과감하게 채택되어 조판되었다. 급진적인 시도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엽서체가 획득한 새로운 인상이다. 기존 ‘아마추어적’인 인상을 걷어낸 채 엽서체는 거칠고 투박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부여받음으로써 책이 논하는 특정 사상과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서체의 인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북디자인에서 서체는 표지와 함께 책의 면모를 가장 부각시키는 개성적 요소 중 하나다. 끊임없이 의심하기를 통해 기존 조형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좋은 북디자인이 수행해야 할 임무 중 하나다.



도판 9 _ <옵.신 7호> (스펙터프레스, 2017) / 서동진, 서현석, 김성희 편집 / 디자인: 슬기와 민 / 인쇄: 옵셋 / 제본: 무선 / 판형: 138x204 mm / 페이지수: 224쪽


7. 현대적 책의 조건 5: 감수성

마지막으로 꼽고자 하는 것은 감수성이다. 이것은 일면 조형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비칠 수 있으나 가장 밀접하다. 시각이 특정 환경 속에서 훈육된다고 할 때 본다는 것에는 어떤 문화권의 지배적 정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젠더 감수성이다. 여기에는 성소수자 인권 등을 모두 포괄한다. 젠더 감수성은 디자인의 조형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디자인을 두고서 ‘여성적 디자인’ 혹은 ‘남성적 디자인’을 거론하는 것도 젠더 감수성의 부재와 직결된다.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 디자인 조형의 유효성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젠더 감수성을 키워야 하고 학습해야 한다.

<WOOWHO>(도판 10)는 디자인 방법론에 관한 책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소개하는 책도 아니다. 2010년대는 국내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데, 바로 페미니즘이다. <WOOWHO>의 표지는 맛깔손과 정새우가, 본문은 6699프레스의 이재영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여성디자이너정책연구모임 WOO 활동의 일부로 계획되었던 WOOWHO 하루치 행사를 담아낸 기획이다.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디자이너들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책은 간명한 디자인으로 여성들의 활자화된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겪는 불평등, 차별 그리고 일하고자 하는 욕망을 선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무엇보다 최근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소개되며, 그에 동원되는 표지디자인과 비교할 때 <WOOWHO>는 기분 좋은 반격이다.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청하는 소설이 서정적인 파스텔톤의 여성 뒷모습 이미지를 일관되게 내세운다. 이는 여성 이미지에 대한 재성찰이 아닌 나른한 재생산이다. 반면 글자와 색으로만 표지를 디자인한 <WOOWHO>는 박진감이 넘친다. 그곳엔 전통적 여성상에 기대는 이미지가 부재한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WOOWHO>는 앞으로의 그래픽 디자인이 이전과는 다르게 작동할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 여성에 관한 이미지 또한.



도판 10 _ 김린 외, (2017) / 표지 디자인: 맛깔손, 정새우 / 본문 디자인: 이재영 / 인쇄: 옵셋 / 제본: PUR / 판형: 120 x 187mm/ 페이지수: 184쪽


8. 결어

이 원고를 탈고하는 시점은 제 10회 언리미티드 에디션 개막 딱 하루 전날이다. 아마도 개막 후 원고를 붙잡고 있었더라면 탈고는 무한 연기되었을지 모른다. 최전선의 따끈따끈한 책들이 소개되는 그 행사에서 이곳에 제시된 10선의 목록은 재고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현대적 책은 시대를 선도한다. 과거는 비판, 부정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생산적 계승의 대상이 된다. 현대적 책을 위한 좋은 북디자인은 이 두 가지 방법론 사이에서 움직이거나 취사선택한다. 기존의 북디자인적 관습을 부정하고 재고하기 혹은 이를 창의적으로 계승하기는 책을 근미래로 이끄는 창조적 행위이자 훈련이다. 어딘가 서로 유사성을 지닌 엘 리시츠키와 리처드 홀리스의 말을 곱씹어 본다.

“사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한동안 영향을 미치다가, 결국에는 닳을 대로 닳아서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쯤 되면 예술가는 다시 새로운 발견을 물색해야 한다. ‘기술적’ 발명은 ‘예술적’ 발견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중 시장에서 판매되는 페이퍼백은 제목 페이지와 챕터로 나뉘는 본문이라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인쇄된 텍스트의 형식이 평준화되고 성공하면서 어떤 서사를 전달하고 이에 구조와 시퀀스를 동원할 줄 아는 책의 기능은 디자이너들에겐 오히려 절망적이었다. 그들이 탐구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기 때문이다.”5)

내일이면 또 달라질 아름다운 책의 조건들을 상상하며, 이 10선이 이후의 북디자인을 논박할 수 있는 나름의 재료이자 거름이 되길 바란다. 나아가, 이 10선은 불안정하면서 편견이 가득한 주관적 선정이지만, 글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선정 기준은 이후 다른 프로젝트에서 책을 바라보는 하나의 판별 기준에 도움을 줌으로써 북디자인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확장’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북디자인을 선정한다는 것; 그것은 곧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의 탐구 영역을 확장하는 제언이라 해야 할 것이다.



1) Laurenz Brunner, Tan Wälchli, “Neo-Pre-Modern?! In Conversation with the Jury, Berne, February 2008,” The most Beautiful Swiss Books 2007, Bundesamt für Kultur, 32-43.

2) 이에 대해선 로빈 킨로스(Robin Kinross)가 근 십여 년 전 <2007 스위스의 아름다운 책>에서 기고한 글 “Old Ideas of the New Book”을 참조해볼 만하다. 참고로, 그는 이 글에서 ‘현대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이라는 용어를 언급했다. 이 ‘새로운’을 ‘현대적’인 것, 그러니까 조금은 더 근미래로 이행해 나가려는 적극적 혹은 급진적 움직임으로 이해한다면 킨로스가 정리한 새로운 책에 관한 과거 사유들은 각 시대가 잉태시킨 현대적 책에 대한 사유라고 볼 근거는 충분하다. (Robin Kinross, “Old Ideas of the New Book,” The most Beautiful Swiss Books 2007, Bundesamt für Kultur, 48-63.

3) 물론 그 안에서도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사진책을 나눌 순 있다. 그러나 책의 역사라는 거시적 계보 안에서 책은 문자를 대변하는 상징적 매체였음은 부인할 순 없다.

4) 1990년대 한국 신세대 미술의 촉발을 알리는 전시로 평가받는다. 1987년 홍익대 미대 동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뮤지엄이라는 그룹이 기획했다. 이들의 세 번째 전시이기도 했던 ‘선데이 서울’은 고낙범, 명혜경, 최정화, 이불, 이형주가 참여했고, 디자이너 안상수와 조각가 금누리가 무크지 형식의 도록인 <보고서\보고서> 5호를 제작하는 것으로 가담했다. 문혜진은 이 무크지이자 도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보고서>에는 전시 서문 격인 윤동천의 글과 함께 뮤지엄 회원들의 글이 실렸는데, 진지함을 거부하고 해체적인 이 글들은 신세대 미술의 감각을 보여주는 일종의 표본이 되어 매체에 널리 회자된다.” (문혜진,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 미술의 기원을 찾아서>. 현실문화, 2015, 255-256.)

5) Richard Hollis, “Ways of Seeing Books”, The Form of the Book Book, ed. by Sara de Bondt and Fraser Muggeridge, Occasional Papers, 2015, 51.



도판을 제공해 주신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더배곳의 권민선, 유예나, 야위엔 및 디자이너 김동신, 오혜진, 이재영, 최성민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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