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VO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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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번역인가?

표정훈(출판평론가, 작가)

1. 언어: 한국어의 확장과 심화

역사, 전통, 민주, 이념, 개혁, 정의, 인도(人道), 민족, 사회, 자유, 질서, 정치, 경제, 문화, 권리, 의무, 국민, 세계, 평화, 인류, 행복….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으로 시작되는 우리 헌법 전문에 나오는 말들이다. 대한민국 헌법 체제‧질서의 근간이 유럽의 이념과 개념들이며, 그 개념, 표현의 매개자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 일종의 기표는 한자(漢子), 상당 부분 일본이 고안해낸 한자어이며 기의는 서양 개념이다.

We, the people of Korea, proud of a resplendent history and traditions dating from time immemorial, upholding the cause of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born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and the democratic ideals of the April Nineteenth Uprising of 1960 against injustice, having assumed the mission of democratic reform and peaceful unification of our homeland and having determined to consolidate national unity with justice, humanitarianism and brotherly love, and To destroy all social vices and injustice, and To afford equal opportunities to every person and provide for the fullest development of individual capabilities in all fields,…

고종석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우리 사상, 언어의 본질적 부분이 그리스 이래 유럽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럽 문화가 우리의 ‘지배적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감염된 언어』, 1999)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며 중국인이자 일본인이고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이스라엘인…이다.” 말의 번역을 통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국어 어휘가 외래어에 감염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국어 문체가 번역문투에 감염돼 있다고 지탄하는 언어민족주의자들 또는 언어순결주의자들이 있다. 이에 대해 고종석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화어휘’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서양말의 개념을 옮겨 만든 한자어가 19세기 말 이래 수입된 것이며, 한국어 글말의 탄생과 발전, 정착 그 자체가 번역의 과정이라는 논리로 맞선다. ‘감염’과 ‘혼탁’과 ‘불순함’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며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것.

번역된 말은 번역되는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미의 다양한 변주를 겪기 마련이며 새로운 의미를 갖추기도 한다. 사회(社會)라는 말은 society의 번역어지만, society의 뜻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는 없었다. 요컨대 society라는 말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 자체가 일본에 없었다. 사회는 본래 중국에서 신령을 맞이하기 위해 벌이는 모임,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여 조직한 조직의 뜻으로 쓰였다. 이러한 좁은 뜻에서 더 넓고 깊은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은 일본인들이 그것을 society의 번역어로 채택한 이후다.

일본에서 society는 처음에 ‘세상(世上)’으로 번역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세상’이라는 말은 오히려 너무 익숙했기에 제외되었다. society가 생경한 개념이었기에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사회’가 채택된 것이다. 그러는 편이 society의 뜻을 담는 데 적합하다고 보았던 것. 요컨대 번역어의 선택과 번역 행위는 모험이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라는 번역어는 서양의 society의 뜻을 수용하게 해준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society 자체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이상 다음 참조. 양세욱, 「중국의 번역어와 중국의 근대」, 『근대번역과 동아시아』, 동의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박문사, 2015)

번역 활동은 한국어의 개념과 의미 체계를 확장시키는 활동이다. 한국어의 개념과 의미 체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한국인이 현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의미 체계가 확장되고 더욱 다양해지며 또한 심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은 고정되어 있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유동(流動)한다. 유동하는 말의 세계에서 번역된 말들은 그 유동의 모양새와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구실을 한다. 비록 그러한 작용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라도.

 

2. 고전: 사상과 감성의 토대 구축

일본 문부과학성이 지원하는 학술 진흥 공모연구과제 가운데 ‘고전학의 재구축’ 과제가 있었다. 교토대학에서 주관하고 관련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학술프로젝트인데(1998-2002), 일본학, 중국학, 티벳학, 인도학, 이스라엘학, 이슬람 및 이란학, 서양 고전학 등을 모두 포괄한다. 연구 성과를 ‘강좌 고전학’ 총서로, 고전 번역의 결과를 ‘고전선집’ 총서로 각각 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고전학의 여러 분야들 사이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보편적 고전학의 패러다임을 지향하며, 새로운 고전 번역을 통해 새로운 고전상을 제시하고, 고전학 전문가 이외의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연구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고전학 이외의 학계 및 일반인들 사이에 고전 자체 및 고전의 가치와 고전학의 장래에 대한 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배경, 어떤 취지에서 설정되었는가? 다음을 읽어보면 그것이 지극히 현실적이며 실천적인 배경과 취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전환기적 상황을 맞이한 오늘날 일본에서, 일본의 전통 윤리는 이미 상당 정도 그 기반을 상실했으며, 메이지 시대 이래로 고무되어 왔던 개인의 자각이라는 보편적 모럴도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고전 읽기의 필요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여러 민족의 사고방식과 감성의 근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존의 인식 틀과 언어를 넘어서는 시야를 획득함으로써, 현대 일본 및 세계의 방향을 정위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과 깊은 통찰을 통해 일본인의 사상적, 감성적 뼈대를 형성하는 과제는 필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고전학계의 역량이 총 집결된 위의 프로젝트의 성과가 과연 그 목적과 취지에 부합되는 것인지 여부는 접어두고서라도, 이미 완정(完整)한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는 (일본의) 현실 속에서도 고전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학문적 노력이 공적(公的) 지원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만큼 우리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 뼈아픔은 19세기 미국의 콩코드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도 느낀 것 같다. (아래 『월든』 인용문)

시정(市井)의 천박함을 넘어서서 당신에게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고전어의 어휘 몇 마디나마 배운다면, 당신 청춘의 값진 시간을 보낼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비록 농부라 하더라도 얻어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외우고 되뇌어 보는 것은 절대 헛일이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보다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길을 비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험적인 학생이라면 그 책이 어느 언어로 쓰였건 얼마나 오래되었건 간에, 언제나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고귀한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불후의 유일한 신탁이다.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 대해 델피나 도도나 숲도 밝히지 못한 해답이 바로 그 안에 들어 있다. 고전이 오래되었다 해서 그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 해서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3. 지식: 번역과 축적의 시간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는 이른바 ‘지식 두 배 곡선(Knowledge Doubling Curve)’으로 인류의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속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지식 총량은 10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해왔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부터는 25년으로, 현재는 약 13개월로, 2030년이 되면 지식 총량이 3일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늘어나는 지식 총량을 그 언어로 보면 영어를 비롯한 이른바 주요 국가‧언어권 언어가 절대적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 인공지능 번역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갈수록 활용 빈도가 늘어나며 점점 더 주목받는 이유도 지식 총량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관련 있을 것 같다. 실시간 또는 실시간에 가깝게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행본 출판번역은 지식 번역‧수용의 속도와 효율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올드 미디어’(낡았다는 의미에서)에 해당되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전체 도서 발행종수 중 번역서의 비중을 살펴보면 1990년대 중반까지 15%대에 머물렀다. 이후 번역출판 점유율이 높아지면서 2000년대 초반에는 30%에 육박할 만큼 대폭 증가했다.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시기에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이 2배 정도 증가한 것. 이후 2006년 당시 전체 도서 중 번역서의 비중은 23.0%(1만 482종)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도 전체 발행 종수(4만 5,213종)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21.5%(9,714종)였다. 이 비중은 대체로 지금까지 이어진다. 번역 원서 국가별로는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축적의 시간』(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정동 지음, 지식노마드, 2015)이라는 책이 화제를 모으며 경제‧산업계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축적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일종의 유행어처럼 자주 회자되기도 했다. 책의 요지는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이를 확보하기 위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이란 제품이나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서 당면 문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역량이다. 우리나라 산업의 발전 모델은 선진국이 제시한 개념설계를 기초로 빠르게 모방, 개량하면서 생산하는 모방적 실행 전략에 바탕을 두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개념설계 역량의 확보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우리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성장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시행착오와 경험을 ‘축적’해야 얻어진다. 새롭게 접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해보고, 실패하고 또다시 시도하는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을 축적하지 않고는 개념설계 역량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진국처럼 100년 이상을 기다리면서 찬찬히 경험을 축적해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내수시장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을까? 산업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인센티브 체계, 문화를 바꾸어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변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축적의 범위를 산업의 바깥 경계로 극적으로 넓혀 생각할 때, 비로소 선진국의 시간과 중국의 규모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축적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동원하고, 항상 정해진 목표를 조기에 초과 달성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시행착오의 과정과 결과를 꼼꼼히 쌓아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

번역은 ‘지식의 수용과 축적의 시간’이다. 그 가운데 단행본 출판번역은 ‘짧은 시간에 실시간으로 지식정보를 번역하여 어떤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경험을 축적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꼼꼼히 쌓아가는’ 문화다. 괴테는 1825년 자택을 방문한 한 영국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독일어는 번역을 통해 19세기 초 ‘축적의 시간’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의 시간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 귀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독일어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많이 알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의 경우 이들 나라의 최고 작품은 훌륭한 독일어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그 말들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4. 번역출판의 위기 또는 문제

출판계는 위기 담론(?)에 익숙하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매년 회자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좋았던 적은 언제였는가?’라고 물으면,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번역출판의 위기’를 말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몇 가지 되짚어본다.

첫째, 번역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위기. 번역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직업 번역가로 살아간다는 건 늘 위기였고 지금도 위기다. 이에 대해 매절‧인세 등 번역료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당위가 제기되곤 하지만, ‘출판 시장의 현실’상 당위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이에 맞선다.

둘째, 학술 번역에 대한 보상‧평가 수준의 위기. 예전보다는 그래도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술 번역에 대한 보상과 평가 수준은 높지 못하다. 연구자 입장에서 자기 분야 주요 고전이나 학술서를 번역한다는 것은 이른바 가성비가 무척이나 낮은 일이다. 각종 프로젝트에 따라 논문을 다량 생산해내야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셋째, 번역 비평‧평가의 위기. 번역의 옥석(玉石)을 판별하고 정확한 근거에 따라 비평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미비하다. 번역서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비판‧비평이 아니라 사실상 비난하는 풍토도 만연해있다.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어는 대부분 힐난, 조롱, 비하하는 언어다. ‘건전하다’는 말의 뜻이 폭이 매우 넓긴 하지만, 건전하고 생산적인 번역 비평‧평가 문화가 필요하다.

넷째, 번역서 에디터십의 위기. 우리나라 저자의 저서보다 번역서를 편집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편견이 없지 않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에도 ‘번역자라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저자의 저서는 ‘저자라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 역량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데 비하여 번역서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 하기도 한다.

원고에 대해서만 하더라도, 편집자가 번역 원고를 마주하는 일은 우리나라 저자의 저술 원고를 마주하는 일과 다르다. 어느 쪽이 더 어렵다는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편집자가 번역 원서의 언어에 반드시 능숙해야 할 필요는 없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말에 대한 전반적인 역량과 감각이 오히려 번역서 편집에서 더 필요하다고 본다.

다섯째, 번역서 시장 수요 편중의 위기. 번역서 가운데 분야별 비중은 매년 거의 비슷하다. 문학, 만화, 아동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해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세 가지 분야가 50%~60% 정도를 차지한다. 이러한 번역서 분야별 비중이 대체로 번역서 시장 수요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을 가리켜 위기라고까지 표현하는 건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 시장 수요가 형성되고 그 수요에 출판 공급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편중 현실은 시장 수요가 상대적으로 낮은 분야 양서(良書)의 출판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기라고 표현할 근거가 없지 않다. 이 지점에서 번역서 출판에 대한 공적(公的) 지원의 필요성이 생긴다.

 

맺는 말: 문명‧문화는 번역이고, 번역이 곧 문명‧문화다

자아(自我)는 ‘구성된 자아’다. 어떤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무수히 다양한 텍스트들이 교직(交織)하는 그물점으로서의 자아다. 21세기 2019년 대한민국에 사는 ‘나’라는 자아는 문자 그대로 동서고금의 텍스트들이 종횡으로 교직되어 구성된 자아다. 그 교직은 넓은 의미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산스크리트 텍스트를 한역(漢譯)한 역경승들, 희랍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아랍 학자들, 그 아랍 텍스트를 라틴어로 번역한 유럽 학자들, 메이지 시대 서양어 주요 개념들을 한자어로 번역한 일본인들, 그리고 20세기 이후 외국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애쓴 많은 번역가들. 그밖에 역사를 통하여 번역에 복무한 수많은 번역가들이야말로 오늘날 ‘나’라는 자아를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을 자아낸 이들이다.

번역서가 왜 중요하고 더 많이 제대로 번역되어야 하는가? 번역서는 지식을 수용하고 기존 지식을 심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는 바탕이 된다. 번역서는 우리 언어의 지평과 가능성을 확장시켜준다. 번역서는 세계와 문화 인식의 범위를 확대시켜준다. 번역서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인간성에 대한 보편적 공감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번역가들은, 그리고 번역서를 편집하는 편집자들과 펴내는 출판사들은 지식과 언어와 세계와 인간의 측면에서 헌신한다.

지금 왜 번역인가? 다시 말해서 지금 왜 번역이 문제인가? 번역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사람들에게서나 현재진행형의 문제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지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본다. 번역이 문제인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다. 문명‧문화는 곧 번역이고 번역이 곧 문명‧문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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