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09

VOL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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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저자의 실종

현상철(성균관대출판부 기획팀장)

책 쓰는 사람

‘책 읽는 이’의 실종을 이야기한다. 비단 출판계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ㆍ문화계 전체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듯하다. 그로 인한 위기감은 각계의 실존과 직결되므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없다. 독자를 끌어들이고 붙잡아두려는 대책이 각 주체별로 쏟아진다. 기발하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그러면 ‘책 쓰는 이들’은 무탈한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특별히 이수해야 할 과정이나 통과해야 할 관문 없이도, 마음만 먹으면 책에 자기 이름 새기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게다가 불황이라면서도 신규 등록하는 출판사 숫자는 해마다 는다는데, 그 많은 사장님들은 어디 믿는 구석이 있어 자신을 대표로 세웠을까. 탈은커녕 책을 쓰고 만드는 이들은 그 욕망에 비례해 증식 중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마저 비켜간 듯, 책 쓰는 작가에게도 실종이란 존재의 레테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가는 곳이 있다(물론 이는 필자의 매우 주관적인 인상과 판단에 의거한다). 필자가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곳, 이름하여 21세기 한국의 대학이다. 필자는 이곳에 15년쯤 편집자로 있다.

 

권위부터 자조까지

굳이 먼저 고백하지만, 필자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미래의 책을 예측하는 쪽이라기보다 인문주의와 동행해온 전통적인 책의 소명에 여전히 경사되어 있는 쪽이다. 좀 더 아재처럼 말한다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종로서적 몇 층이던가에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서 있던 각 대학(출판부)별 서가를 그리워하는 쪽 말이다.

어감 탓일까. 왠지 이곳에서 책을 쓰는 이들―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렸던, 연구자 개인 혹은 집단―에겐 작가(writer)보단 저자(author)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고 어울려 보였다. 남다른 수련 과정과 어려운 관문들을 통과해야만 했다고 여겨지기에, 그들 자체에 주어지고 그들의 소산에 매겨지던 권위(authority)가 정당하다 여겨져서다. 그것은 오랜 시간 학자라는 소명의식 속에 양심을 지키며 연구에 매진해온 결과,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이었다. 사회가 대학과 이들에게 비교적 높은 기대를 품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실 『포스트모던적 조건』(1979)에서 리오타르가 ‘지식-본질’이 ‘정보-수량’으로 변형되는 정보화 사회에선 지식이 시장의 상품처럼 생산ㆍ소비되는 징후를 포착해내고, 고전적인 지식인의 종언까지 언급해버린 것이 이미 40년 전이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의 거대한―메타적인―이야기들은 차례차례 붕괴했고, 인간의 삶은 이젠 잘게 부서진 채로 회자될 뿐이다. 더 이상 “지식은 교화적 가치(…)에 따라 확산되지 않”으며, 계몽시대의 백과전서마저도 누구나 접근 가능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변환되었다.

자연스럽게 지식은 정보라는 다른 호칭과 캐릭터를 부여받고서 다양한 방식으로 출납되거나 거래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컨대 과거 지식의 주된 전유자이자 발신자였던 대학교수 등의 식자 집단은 특정 데이터베이스의 접속구 앞에서 게이트키핑(gate keeping)을 담당하는 지식의 전달자쯤으로 그 위상이 변해버렸다. 당연히 교환가치나 그 매개자 정도에 권위란 게 매겨질 수는 없었다.

실제로 한국 대학 내 지식인들도 어느 시점부턴가 ‘○○학자’를 대신해 사용되던, ‘△△전문가’라는 다소 기능적인 호명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자신의 전공―전문성―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소환되는 신뢰도 높은 정보만을 활용해 이른바 탈 없는 업적을 생산하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시다시피 이 업적에 최적화된 장르가 바로 학술논문이었다. 정형화된 형식에 제한된 분량으로, 주로 시한이 정해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깊이를 강요함으로써 대중과 멀어지는 전문성을 고취한 이 장르는, 그러나 특별한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용되는 전공자들끼리의 소통수단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필자 주변에선 아직도 가끔씩 학회지 수록 논문들의 독자는 단 2인―투고자와 심사자―뿐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확산을 기대해야 할 깊이 있는 연구결과가 학계 자체의 파편화를 보여주는 증거로 연결되어버리는 이 사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논문에서 저서로

필자는 지금―연구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들로 매여 있거나 도리어 안존하고 있다는―학술논문의 한계에 주목하려는 게 아니다. 그와 반대로 필자는 역할 상, 장기적인 구상 하에 시차를 두고 연구ㆍ발표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총체적인 저술을 기획하는 연구자들의 시도를 자주 접하곤 한다(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연구자들은 곧장 저서 집필로 진입하는 경우보다 투고를 통해 검증ㆍ보충 받은 논문들을 차근차근 저서로 수렴하는 경우가 실제로도―현실적으로도―월등히 많다).

이는 마치 주춧돌이 놓이고, 골조와 벽체가 세워지며, 들보와 지붕이 앉으면서 집체가 축조되어가는 방식과 같아서, 이때 연구자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고립된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논문들을 보다 완성도 높은 연구의 부문별ㆍ단계별 기초로 활용한다. 그 자체로 완결적이면서도, 이렇게 총체적인 저술을 지향하며 언제든 해체-재구축되는 집중력 높은 수고를 회피하지 않는 학술논문의 밀알 같은 ‘순기능’은 학계의 파편화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킬 수 있다. 판단건대 바로 이렇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시도와 과정이 권위를 얻으며 연구자가 저자로 변신해가는 ‘실질적인 경로’가 되는 것이리라.

물론 이 경로엔 기본적으로 구축ㆍ확보ㆍ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권위의 달성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논문(꼭지 글)에서 저서로의 지향 계획이 체계적으로 담긴 설계도라든가, 개별 단위로 진행되던 각 부문 연구결과들의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결합, 그리고 쫓기지 않으면서 이 지난한 작업을 완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등이 먼저 떠오른다. 또한 연구자들도 일개 생활인인 이상, 그들이 실존적으로 관여된 모든 세계의 여건들이 여기에 개입할 수 있다.

 

석연찮은 알리바이?

필자는 진단을 의뢰받은 “사회의 지식생산 거점인 대학과 잠재적 고급 저자인 교수의 출판 기여가 왜 부진한가”라는 주제를 두고, ‘대학에서 책을 쓰는 저자의 실종’이란 문제의식을 설정했다. 구조조정의 풍문이 예사스러워질 만큼 대학의 교수인력은 포화상태고, 이젠 아예 고정된 사회문제로 인식될 만큼 석ㆍ박사급 이상 고급 연구요원들의 공급 역시 과잉이라는데, 이 넘쳐나는 연구 인력은 왜 해당 전문가에서 권위 있는 저자로의 변신을 꾀하지 않는 걸까? 잠재 저자의 증가와 실질 저자의 감소라는, 이 역설적인 비대칭 상황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학에 있다 보니 오고가며 마주치는 분들이 교수요, 강사요, 연구원 등의 연구자들이다. 안부치레 끝에 “선생님, 요새 어떤 재미난 주제에 매달려 계신가요? 기회 닿으면 책 한 권 쓰시죠?”라는 채근이 일상적인 편이다. 그러면, 개인적인 경험치를 종합해보건대, 선생님들 대개는―전부는 아니었다―흥미진진 현재 관심 분야에 대해 열변을 이어가다 ‘책’이란 단어 앞에서 길게 한번 호흡을 바꾼 뒤, 짧은 대답 몇 마디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곤 했다. 대답은 크게 이런 갈래였다. “책 쓰는 게 어디 쉽나요?”(현실 인식 형), “요새 누가 책을 읽나요?”(동기 부족 형), “바빠서요.”(사태 외면 형)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그 소임에 자신의 부재를 합리화하려는 알리바이… 석연찮다.

상황은 이렇다. 대학 내 전문 연구진의 학문적 총화와 연구의 결산이라 요약할 수 있는 책 쓰기. 이는 말마따나 체계적인 연구 설계도는 물론, 장기간에 걸쳐 실행ㆍ구축되는 여러 연구 단위들의 완성도 높은 결합이 선행되어야 하는 강도 높은 작업이다. 더구나 그 결과물 또한 경색된 채 회복을 모르는 출판시장의 심판―판매―까지 받아야 한단다. 무엇보다 이 일은 여전히 대학 안에서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업적 평가 인식이 그리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한 전문가가 금쪽같은 자기 절대 시간을 별도로 할애해야만 추진 가능한 지난한 사업이 되어버렸다는 의미다.

뿐인가. 연구자들을 휘감고 있는, 그들이 대학 안에서 연구 외로 수행해야 할 책무 가운데 하나인 교육의 현장 분위기 역시 만만치 않은 형편이다. 아시다시피 대학의 교육기능은 수험ㆍ취업ㆍ스펙 등 당면 현실 대처에 급급한 채 강력한 실용 드라이브에 포획된 지 오래되었다. 이에 발맞춰 기본 소양을 쌓고 생각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데 기여하던 기존 강좌들―특히 인문ㆍ사회ㆍ이학ㆍ순수예술―은 축소되거나 기능화하거나 (하향) 패턴화되었다.

그마나 통합 개설된 교양강좌엔 어느새―기본 소통마저 난감한―외국 유학생들이 일정 비율 이상이다. 어느 눈높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고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교수자들과, 정말 교양을 쌓고 싶어 차라리 대학 밖으로 나선다는 학생들이 목격된 지도 오래되었다. 거기다 논란 끝에 개정된 고등교육법―강사법―은 다시 논란의 소지를 안은 채 실행되어선―시행 첫 학기라곤 하지만 벌써부터―누군가에겐 절망(해고)을, 누군가에겐 피로(수업시수 가중)를, 또 누군가에겐 피해(분반 축소ㆍ통폐합에 따른 수강 선택권 제한)를 낳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강의실에서 혼쭐이 빠지고 나면, 연구자들은 책 쓸 용기는커녕, 쓰고 싶다던 욕망의 한 가닥조차 다시 기어들어갈 판국이다. 앞서 필자가 대학에서 책을 쓰는 데 권위부터 소환해내고 학자적 소명 운운한 까닭은 그렇게라도 명분을 강조하지 않으면 급기야 이곳에서 책 쓰는 사람의 실종, 나아가 멸종까지 가능하리란 위기의식의 발로였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다.

 

학술기획총서를 모색하다가

사실이 그랬다. 지난 2015년부터 모종의 계획 하에 학술기획총서를 모색하면서 조금은 더 격식을 갖춰 여러 예비 저자들과 면담한 결과가 그러했다. 그때 필자는 책 안 읽는 독자의 문제보다 책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저자의 토로에 더욱 집중할 필요를 느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대학 연구자들의 저서 및 저술 활동의 중요성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그것은 국가 또는 (기업을 포함한) 사회가 막대한 ‘공공 재정’을 투입한 한국 대학의 인프라가 이 세상의 밑그림을 그리고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다시 사회로 결과물을 환원하는 공적 작업의 일환이었다. 저자 개인의 권위가 대학 전체의 권위를 다시 도모하는 구도다.

상업 출판사 임직원이 함께했다면 참 답답해 할 노릇이었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유통되는 책의 외피를 입고 탄생함에도 자기 결과물들의 시장성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사족이지만, 이와 관련지어, 예컨대 계약 전후로 책의 인세나 저작지원금 여부를 묻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면담 시 오고간 대화들만을 놓고 볼 때, 저술 활동은 명분과 소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가정이 합리화되는 순간이었다. 나아가 이처럼 저술 활동 자체에 공공성 인식의 비중이 크다면, 이를 위해 합당한 공적 제도의 설정이 필요치 않을까도 싶었다.

그러나 무릇 대의가 너무 커서일까. 저술 활동은 현실의 그들에게서 우선 멀리―후순위로―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일개 생활인이자 대개는 대학이란 ‘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눈앞의 일들로 ‘바빴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대학들은 거의 하나같이 평판도 과몰입 상태다. 현실의 대학은 수이 얻어질 수 없는 권위보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명성을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어느 대학의 홈페이지든 초기화면에 “○○대학교 △△부문 ××위 달성” 식의 홍보 카피가 달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전국 단위로 각 대학의 저자들과 학술기획총서 교섭을 시도하면서 제일 먼저, 그리고 자주 접속해야만 했던 곳이 해당 대학 홈페이지들이었는데―농을 좀 섞으면―한국 대학의 홍보기획자 혹은 카피라이터는 단 한 사람이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일사불란하던 산업화시절 ‘△△불 수출 달성’하던 장면이 연상되면서 교육기관에 회사라는 호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혼자 씁쓸해 하곤 했다.

한 꼭지만 더 덧붙이자면, 좀 늦은 나이에 한 대학에 전임으로 자리 잡은 문학 선생이 신임 교수 환영식에 다녀온 뒤 풀어놓았던 넋두리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 말이지, 대기업 신입직원 연수회 온줄 알았어. 다들 주먹 불끈 쥐고, 그 어느 것 못할 게 없는 사람이 되었어.”

그렇다면 산업화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두고 당시의 개발독재권력을 비판하듯이, 저 랭킹의 허상이 놓치고 있을지 모를 것들에 대한 원망은 그저 국고 지원의 고삐를 쥐고 흔드는 교육 당국만 탓하면 되는 일일까?

 

부재증명과 미필적 고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형국에 처한 피고용인 (예비) 저자들의 실존 인식으로 보인다. 대학이 저 높은 랭킹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이 단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연구실적―논문―들을 쏟아내도록 유도되었겠는지, 연구와 관련 없는 캠페인과 이벤트엔 또 얼마나 자주 소환ㆍ동원되었겠는지 재확인하려는 게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4차 산업혁명시대라는데 정작은 1~2차 산업혁명시대 식의 과업 수행에서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로부터 기인하는 현실 괴리감―콘텐츠와 프로세스의 부조화―이 이들을 내적 자괴감과 자포자기―허무―의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을 읽고 쓰느라 다른 일 할 시간이 없다”며 연구실 문 걸어 잠근 채, 모든 보직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키던 교수님이 계셨다. 당시는 그 교수님이 단지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시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오고가며 만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책 쓰지 않아도 바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라는 일상화된 푸념을 듣고 있자니, 그 깐깐한 교수님이 학자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사투를 벌였던 것인지 비로소 수긍이 간다. 연구실로의 실종을 선택한 그 교수님의 알리바이는 권위의 실종을 방조하는 미필적 고의를 향한 최후의 항거였다.

그렇다면, 들려오는 저 일상적인 푸념들이란 어쩌면 그저 피고용인으로서 불지불식간에 자신이 속한 구조로 순치되어 들어간다는 징후는 아닐까. 곧 있으면 “책을 쓰지 않아도 직은 유지됩니다”라는 또 다른 자조의 통찰로 이어져버리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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