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 2019.09

VOL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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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역사 대중화, 그 정당성과 그늘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대중화의 긴장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에 휩싸이면서 다시 한 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대중적으로 소비할 때 그 기준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듯하다. 원래 갑옷으로 무장했던 스파르타 병사들을 식스팩이 보이게 팬티 차림으로 출연시킨 영화 <300>의 왜곡을 거론하기도 하고, 장희빈을 패션 디자이너로 둔갑시켰던 어떤 TV드라마를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과 상상, 학문과 대중성의 관계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사실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편이고, 따라서 대중화도 그 사실의 엄밀성이 지켜지길 바란다. “대중화란 진지한 학문이 갖는 위대한 휴머니즘적 전통의 일부분이지, 단순히 즐거움이나 이익을 위해 쉽게 고쳐 쓰는 훈련이 아니다”라는 관점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은 “저널리스트나 정치가, 방송 해설가나 영화감독, 미술가는 역사가 특유의 ‘기술’이나 ‘방법론’ 없이도 그 나름대로 방식을 만들어 ‘과거’에 성공적으로 접근해왔다”고 보는 견해도 맞다고 생각한다. 대중화란 학계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진-영화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군의 전투복장. 저렇게 몸통을 드러내놓고 싸우다가는 다 죽는다. 실제로는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싸웠기 때문에 역사왜곡이라고 지적받았다. 정작 심각한 역사왜곡은 신중했던 페르시아 국왕 크세르크세스를 광적이고 흉악한 악마쯤으로 묘사하는 헐리우드식 백인종 우월주의일 것이다.

호모-히스토리쿠스(Homo-Historicus)

대중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첫째, 역사는 인간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전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역사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여기의 역사’를 한쪽으로 밀어놓는 데서 역사공부는 편협해진다. 과거와 현재를 대립시킴으로써 역사의 단절을 가져오고 대칭성을 붕괴시킨다.
둘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면 종종 뭔가 대단한 사건을 떠올린다. 나랏일은 큰일이니까 역사적 사실의 가치가 있고, 우리네 일상은 소소하니까 그런 가치가 없는 듯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무리 큰 사건도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과연 일상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역사적 사건이 있기는 한가?

6.25 한국전쟁의 경우 그 일을 겪은 부모님의 하루하루 삶을 통해 실체와 아픔이 드러난다. 21세기 한국사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친구의 일상에서 드러난다. 언제나 역사적 사건과 현실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롯이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쉽게 말해 인간=역사적 인간이라는 말이다. 내 일기가 역사이고, 역사학의 대중화 이전에 이미 역사는 대중인 나와 붙어 있다는 뜻이다.

팩션(Faction) : 네모난 원?

대중화의 양상으로 팩션이라는 말을 쓴다.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의 합성어이다. 역사의 이야기와 팩션이 다른 점은 이렇다.

사실 + 추론 + 사실 …… = 이야기
사실 + 허구 + 사실 …… = 팩션

추론은 사실에 기초하지만, 허구는 없던 사실을 지어낸다. 그런데 상식에 입각하여 정의하면 역사 또는 역사학은 지어낼 수도 없고 지어내서도 안 된다. 공자는 ‘있는 대로 기록하고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는 명제를 세웠다. 이것이 역사학도로서 공자가 지닌 원칙이었고, 지금까지 역사학의 최소 기준이기도 하다. 역사를 어떻게 활용하고 소비하든 그것은 다음 문제이다.

당연히 영화나 게임에서 허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즐기는 놀이의 영역에서 흥미를 더하기 위해 허구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다. ‘노는 인간(Homo Rudens)’은 분명 인간의 특성 중 하나이다. 즐거움, 놀기는 역사대중화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던가?

추론 역시 사실에 기초하지만 사실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또한 사실에 기초한다. 추론이 허구일 수 있다. 둘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사실과의 관계에서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에 기초한다면 상상력이지만,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을 부정하거나 파괴한다면 왜곡이 된다. 뒤의 경우라면, 추론은 학문적 정당성을 잃고, 허구는 역사와 결별한다. 이 경계를 혼동하면 그때부터 팩션은 위태로워진다. 그 경계를 혼동하여 나타난 병폐의 사례가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따위의 ‘대중서’이다.

두 가지만 만족되면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논문 수준의 엄격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각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다만 역사를 소비할 때, 즉 대중화할 때, 두 가지만 지켜졌으면 한다. 첫째, 이야기의 줄기를 바꿀 사실 왜곡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글을 신미가 만들었다든가, 장희빈은 패션 디자이너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왜곡이 나오면 시나리오가 꼬일 수밖에 없다. 너무도 엄청난 역사 개작이 필요한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나랏말싸미>는 그런 점에서 실패한 듯하다.

둘째, 사실과 다르게 처리된 곳은 가능한 대로 알려주는 기법을 택하면 좋다는 것이다. 내레이션이나 자막, 또는 영화나 드라마의 흐름 중에 자연스럽게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광해’에서는 광대 하선이 임금으로 스카우트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광대 하선을 역사속의 광해로 오해하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에 PD 한 분과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앞으로 사극을 제작할 때는 역사학자와 제작자가 참여하는 사전 모임을 갖자는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 뒤 그 분이 아직 사극을 만들지 않아 실제로 논의해보지는 못했지만, 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 공부의 출발, 관점의 차이

대중화든 역사 연구든 한 가지만 생각하고 가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과거를 재현할 수 없고 남아 있는 기록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오류의 가능성이 역사 탐구에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은 역사 탐구의 숙명이다. 꾸준히 자료를 검토하고 추론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의도적인 경우는 사사로운 이해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경우에 주로 발생하는데, 콩쥐팥쥐론이나 당쟁론으로 빠지면 그 왜곡이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패싸움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특히 식민사관이나 전체주의 같은 방식으로 국가가 역사 탐구에 개입하면 정치가 역사를 먹어버리거나 헤집어버린다. 이는 국사=국민국가사의 슬픈 운명이기도 하다.

‘여러 역사’, ‘작은 역사’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째, 인간의 역사는 국사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러 차원과 영역의 역사가 인간을 형성하고 또 인간이 그런 역사를 만들어간다. 둘째,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여러 역사’와 ‘작은 역사’는 자칫 권력에 의해 동원될 수 있는 국사의 횡포를 막아낼 댐이나 저수지가 된다.

‘너는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나대로 생각할 테니!’ 하는 태도는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제일 초보적인 태도이다. 역사학은 ‘원래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한다. 거기서 출발하여 사실을 탐구하면서 ‘아! 저 사람은 저래서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이해해가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 탐구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자기-이해의 출발이며, 소통-공감을 위한 첫걸음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역사 ‘대중’에서 역사 ‘주체’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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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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